# 170
4
촬영을 마친 후에도 민수는 린 시오 메이, 린의 연기가 계속 생각났다.
그녀가 아역 시절부터 연기를 잘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종종 아역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누구도 아역에게 대단한 연기력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PD나 감독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 정도였다.
어린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주의가 산만하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방에서 카메라가 움직이고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촬영 현장에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오늘 린은 그런 일반적인 아역들과는 전혀 달랐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촬영 환경 속에서 긴 시간 동안 집중력을 유지하며 끝까지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민수가 가장 놀란 이유는 오늘 그녀가 보여준 연기가 상대역인 조와 완전히 반대되는 분위기의 연기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아역들은 주변 분위기에 민감하기 때문에 대부분 아역의 연기는 주변 분위기에 묻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슬픈 장례식장에서 우는 역할이나 화기애애한 가정에서 발랄하게 애교부리는 역할처럼 극을 이끌어가는 역할보다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하나의 소품처럼 장면과 분위기를 풍성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만약 아역 연기자에게 모두가 침통해 하며 울고 있는 장례식장에서 혼자서 밝고 즐겁게 웃는 연기를 하라고 한다면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런 연기를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아역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린이 보여준 연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오늘 린은 허무감으로 매몰되어버린 조 앞에서 세상없이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주며 극 자체를 주도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민수도 장면이 들어가기 전에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린 이라도 저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연기하는 조의 분위기에 휩쓸려 가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민수의 걱정은 그냥 기우에 불과했다.
린은 민수의 연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만의 연기를 완벽하게 보여줬다.
그리고 오늘 린의 연기가 완벽했기 때문에 공허한 조가 조금씩 인간성을 찾아가는 뒤의 이야기가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민수가 린의 연기를 생각하며 감탄하고 있는데 민수의 개인 영상촬영 준비를 마친 동원이 민수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 같이 연기한 귀여운 꼬마 아가씨 말인가요?
정말 야무지게 잘하긴 하더군요.
우리 혜민이도 저렇게 잘하면 참 좋겠는데 말이죠.”
“네? 혜민이요?”
민수는 동원이 혜민이를 언급하자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아…. 모르셨나요?
이번에 이수연 배우님이 들어가는 “로열”에 혜민이가 아역으로 들어갑니다.
이수연 배우님 딸 역할인데 나름대로 비중이 있는 역할이라서 지금 한창 윤 대표님이 혜민이를 지도하고 있죠.”
“맙소사…..”
전혀 예상치 못한 동원의 말에 민수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느닷없이 혜민이가 아역 연기자로 데뷔한다니, 자신이 떠나오기 전에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자신이 떠나온 2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번에 “로열”에 나오는 아역이 제법 비중이 높아서 제작진들도 신중하게 배우를 찾고 있었는데 마땅한 아역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수연 배우님이 소속사 식구들에게 한탄하면서 하소연했는데 그걸 혜민이가 듣더니 호기심이 생겼는지 어떤 배역인지 물었습니다.
혹시나 한 이수연 배우님은 배역을 설명한 다음 혜민이에게 대사를 시켜봤는데 혜민이가 너무 자연스럽게 잘해 버린 거죠.
게다가 대사연기를 몇 번 해보더니 혜민이가 자기도 배우가 되고 싶다고 계속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혜민이의 뜻대로 이수연 배우님이 “로열”의 오디션장에 혜민이를 데리고 갔는데.”
“그냥 뽑혀 버린 거군요. 혜민이가.”
“네. 그 소식을 접하신 윤 대표님이 그날 바로 혜민이에게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해보셨고, 윤 대표님도 혜민이가 좋은 연기자가 될 수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허, 대표님 테스트도 통과했다고요?”
“네, 그래서 결국 지금은 윤 대표님에게 연기를 배우는 중이고요.”
혜민이가 연기 지도를 받고 있다는 말에 민수의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졌다.
민수는 혜민이가 나이 또래의 친구들이랑 평범하게 일상을 보내기를 바랐다.
지금까지 아파서 병원에만 있었던 그런 고통스럽고 외로운 날들을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잊어가길 바라서였다.
만약 혜민이에게 재능만 있다면 배우도 물론 좋은 직업이 되겠지만, 만약 배우의 길을 선택한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역부터 배우로 생활한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모든 추억을 포기한다는 말과 같았고 너무 이른 나이에 연예계 생활을 한 사람들은 훗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상 명랑하기만 혜민이가 과연 이 연예계에 적응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하… 그 밝고 여린 아이가 이 연예계에 적응할 수 있을지…..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지.
준수 이 녀석은 대체 왜 안 말린 거야.”
옆에서 듣고 있던 동원은 민수의 말에 조금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혜민이가 그렇게 여린 아이라고는….. 그리고 항상 밝다고 보기도 좀…. 그렇지 않습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혜민이처럼 밝고 여린 아이가 어디 있다고.”
“음…. 제가 알기로는 그렇게 여린 아이는 아닌데요.”
동원과 민수가 서로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다른 소리를 하고 있자 옆에 가만히 있던 수정이 고개를 저으며 민수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배우 오빠. 혜민이가 여리고 밝을 건 배우 오빠랑 설아 씨 한정이에요.
평소에는…. 기본적으로 도도하고 시크한 편이죠.”
“엥?”
“음… 아직도 모르고 계셨구나.
그러니까 우리 귀염둥이 혜민 양께서 배우 오빠랑 설아 씨 앞에서는 좀 내숭을 떤다고 해야 하나요? 어쨌든 그래요.”
민수는 수정의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내숭이라니 민수로써는 생각도 못 한 일이다.
“어쨌든 혜민이의 연기력만은 합격이네요. 배우 오빠가 생각도 못 할 만큼 연기를 잘한 거니까요.”
“아니…. 혜민이가 내 앞에서 왜 내숭을 떨어? 그럴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연기력이 무슨 문제야.
혜민이는 이제 9살이라고 벌써부터 연예계에 발을 올리다니, 그 나이 때에는 한창 친구들이랑 같이 어울려 놀아야 할 나이라고.”
“아니 왜 이유가 없어요.
배우 오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거죠.
귀여움받고 싶으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혜민이 친구들이랑 안 놀거든요.
맨날 소속사에 놀러 오는데 누구랑 놀아요?
게다가 혜민이 말이 학교 친구들은 유치해서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데요.
아마 연예계에 발을 올리지 않아도 학교 친구들이랑 놀 일은 없을걸요.
솔직히 얘가 하도 조숙해서 그런 말 하는 것도 이해가 가요.
그리고 그 녀석 가족들도 결국 못 말린 일인데요.
가족들이 그 녀석의 선택을 존중해 준 것이니 우리는 그냥 제3자에요.
하겠다면 도와주는 것밖에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이죠.”
“하… 조숙….”
수정의 말을 듣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예전에 처음 혜민이를 봤을 때의 기억이었다.
그때 혜민이는 자신의 고통을 억지로 참으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민수조차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혜민이가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
혜민이는 그때 이미 일상처럼 연기를 하고 있었다.
아파도 안 아픈 척, 외로워도 괜찮은 척.
“맙소사, 하긴 그런 경험을 한 아이가 그렇게 천진하고 밝기만 할 리가…..”
민수는 혜민이의 과거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아이가 밖으로 보여주는 모습만을 믿고 있었던 자신이 너무 한심해졌다.
민수와 수정이 대화하는 것을 듣고 있던 동원은 평소에 조금 까칠하고 시크한 혜민이만 보다가 민수에게는 혜민이가 천진난만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혜민이라니 상상이 잘 안 가네요.
그런데 설아 씨한테도 그런다고요?
배우님은 생명의 은인이니 그렇다 치고 설아 씨한테는 왜 그런 걸까요?”
수정은 동원의 말에 피식하고 웃으며 동원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설아 씨가 혜민이 워너비 라던데요.
자기도 크면 꼭 설아 씨처럼 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특히 외모가요.
그리고 아마 약간의 동질감 같은 걸 느끼는 거 같기도 하고요.”
민수가 보기에 아무래도 수정이 자신보다 혜민이를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자신도 소속사에서 쉰 건 마찬가지인데 혜민이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혜민이가 자신과 설아 앞에서만 내숭을 떤다면 다른 배우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았는지 의문이었다.
“하… 그럼 수연 선배랑 윤 배우는 알았다는 거잖아.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지?”
“그걸 왜 말해줘요?
평소에 조금 뚱해 있는 아이가 배우 오빠 앞에서 방긋방긋 웃는 게 얼마나 귀여운데요.
무슨 큰 문제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말할 이유도 없죠.”
수정의 말이 맞긴 했다.
그리고 태준이라면 그냥 재미있어서 보고만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민수는 어제도 자신과 통화했던 설아가 자신에게 혜민의 데뷔 소식을 전하지 않은 것은 조금 화가 났다.
아무래도 혜민이가 소식을 전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나 본데, 그래도 자신에게는 말해줬어야 했다.
생각이 복잡해진 민수를 보며 수정이 조금 말을 덧붙였다.
“어쨌든 그런 걸 떠나서 혜민이를 배우로서면 생각해 보세요.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데요.”
수정의 말대로 혜민의 성공 가능성을 따져 보았다.
우선 외모.
외모는 혜민의 강점이었다.
엄청 귀엽다. 솔직히 외모만 본다면 지금의 린과 비교할 만했다.
성장 과정에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탑 클래스였다.
그리고 연기.
일상생활 자체가 연기다.
자신도 속을 정도의 내숭에 능숙하다.
아마 상황에 따라 충분히 뛰어난 연기를 보여 줄 거 같았다.
가장 중요한 집중력.
혜민이는 나이답지 않게 성숙했다.
아마 또래의 친구들이 유치해서 못 놀아 주겠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어려운 가정환경과 아픈 몸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다.
정신연령이 높은 만큼 아마 연기할 때도 성인 연기자 같은 집중력을 보여 줄 것이다.
오늘 린이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하…. 되겠네. 혜민이는 되겠어.
윤 대표님이 잘만 다듬어 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그거 봐요. 그렇다니까요.
그러니 배우 오빠는 진정하고 혜민이를 응원해 주세요.
어리지만 성숙해서 자신의 길을 미리 선택한 거니까요.
그리고 아역으로 데뷔한다고 꼭 그 길을 걷는 건 아니잖아요.
나중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으니까요.
아
역으로 데뷔하고도 평범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러니 우리는 제3자로써 그냥 지켜봐 주고 응원해 주는 게 옳아요.
“하…..”
수정의 말이 맞았다.
그리고 할머니인 김 여사님이랑 오빠인 준수도 생각이 있을 것이다.
사실 혜민이가 정말 하고 싶다면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지금까지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고 살아온 아이였으니 그 아이가 하고 싶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옆에서 응원해 주는 것뿐이었다.
혜민에 대한 걱정으로 허탈해하는 민수를 보며 동원이 조심스럽게 촬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배우님. 오늘 개인 영상을 촬영한다고 하셨으니 우선 그것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혜민이에 대한 일은 나중에 생각하시죠.
이따가 따로 전화를 해보셔도 되고요.”
동원의 말대로 오늘은 따로 소속사 홈페이지에 올릴 영상을 촬영하기로 한 날이었다.
민수는 사전에 에드워드 사장과 에릭 감독에게 개인적으로 영상을 촬영해 소속사 홈페이지에 올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고 촬영을 허락받았다.
에드워드 사장의 입장에서는 민수가 올린 영상이 화제가 된다면 많은 홍보가 되기 때문에 흔쾌히 허락했다.
아마 에드워드 사장은 주연인 민수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에 영화를 수출할 가능성을 점치고 한국의 배급사들과 물밑으로 접촉을 시도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세트장을 따로 촬영하는 것은 지정된 날짜에만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트장 전체를 찍고 싶으면 오늘밖에 시간이 없었다.
“네, 그렇죠. 세트장 전체를 찍을 수 있는 날은 오늘뿐이니 서둘러야겠네요.
혜민이 일은 한국에 가서 직접 혜민이에게 물어봐야겠어요.
자, 바로 나가죠.”
민수와 동원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 촬영을 준비했다.
촬영은 동원이 할 테고 민수는 인사와 영화에 대한 소개 그리고 세트장을 소개하면 끝이었다.
민수가 카메라 앞에 서고 동원이 촬영을 시작했다.
촬영이 시작된 장소는 “천루 시티”의 전체 모습을 화면에 담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건물인 “세트-G-16 마천루” 의 옥상이었다.
마천루라고 해도 엄청 높은 건물은 아니었고, 촬영용으로 고층 건물의 상층부만 따로 제작한 5층짜리 건물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팬들에게 인사하는 민수의 등 뒤로는 중국의 천루 미디어가 마음먹고 제작한 거대한 영화 세트장 “천루 시티”의 전경이 그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