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169화 (169/325)

#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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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격적인 영화 촬영이 얼마 남지 않는 시기가 되었다.

민수도 이제 스턴트맨들과 맞출 부분은 다 연습이 끝난 상황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 있던 민수의 전담팀도 당연히 민수의 곁으로 돌아왔고 그 안에는 민수의 매니저 동원과 스타일리스트 겸 코디이자 팬클럽 회장인 수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수정은 민수가 스케줄이 거의 없던 지난 한 달간 회사로 출근하지 않고 유니 스튜디오로 출근하고 있었다.

지금 수정은 따로 조윤희 선생님께 이것저것을 배우고 있었는데 가장 중점적으로 배우는 것은 역시 조윤희 선생님 특유의 패션 감각과 패션 스타일이었다.

민수는 하루하루 갈수록 자신의 패션 감각이 늘어나고 있으니 다음에 한국에서 촬영할 때를 기대하라며 으스대는 수정의 머리를 그냥 쓱 하고 헝클어트렸다.

사실 민수는 수정에게 계속 배울 것을 권하며 중국 촬영에 따라오지 않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할리우드 스타일로 찍는 영화는 어떤 식으로 촬영되는지 궁금했던 수정은 무조건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우기면서 동원과 함께 비행기에 올라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자신의 머리를 망쳐놓은 민수에게 한참 잔소리를 늘어놓은 수정은 팬 카페 회원들이 민수가 활동을 하지 않아 서운해하고 있으니 그들을 달랠 사진이나 영상을 따로 촬영하겠다고 말했다.

민수는 자신이 방송에 따로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바람에 팬들이 실망하고 있다는 것에 씁쓸함을 느끼면서 수정이 찍은 영상이나 사진으로 그들의 서운함이 조금이나마 씻겨 내려가기를 바랐다.

한편 한국에서 돌아온 동원은 민수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찍고 싶은 만큼 개인 영상을 촬영해서 홍보팀에 보내 달라는 말이네요.

그리고 영상을 많이 보내주면 나중에 따로 다른 인터뷰나 예능 출연은 빼준다는 거고요.”

“네, 배우님.

그 영상을 편집해서 회사 홈페이지에 올려서 홍보자료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민수는 자신들이 스케줄에 무관심한 것이 결국 이런 결과를 만든 것 같아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재미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방송 카메라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자신에게는 이런 개인적인 영상을 찍는 게 더 수월할 거 같았다.

그리고 이 영상을 자주 찍으면 자신의 팬들도 조금 서운함이 줄어들지 않을까?

“아마 다른 배우들도 다 영상을 올리겠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희 배우들의 성향을 생각하면 따로 방송 스케줄을 잡는 것보다 이게 낫다고 생각할 게 뻔하니까요.”

“그렇군요. 알았어요. 저도 잘 생각해 볼게요.”

동원이 나가자 민수는 바로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연결했다.

“음….. 다른 배우들은 어떤 영상을 올리려나….”

민수는 웃으며 바로 회사 홈페이지에 접속하였다.

과연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배우들의 이야기”라는 새로운 게시판이 만들어져 있었고, 배우별로 영상을 올릴 수 있게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올라와 있는 영상은 수연의 영상 하나뿐이었다.

아마 지금 가장 한가한 수연이 첫 타자로 영상을 올린 모양이었다.

수연이 올린 영상은 놀랍게도 요리 영상이었다.

화면 속에서는 수연이 집에서 가볍게 밥을 만들어 먹으면서 소소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찌개를 끓이고 반찬을 만드는 수연의 솜씨가 민수가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았다.

“와, 수연 선배가 요리도 잘하는구나.

현모양처 감이라더니 진짜 대단하네.

우리 윤 배우가 진짜 복 받았네, 복 받았어.

그런데 저거 촬영은 대체 누가 한 거지? 어? 저런 미친….”

순간 카메라가 움직이며 촬영을 하는 사람의 발이 슬쩍 지나갔는데 그 사람이 신고 있는 양말이 평소 태준이 민수에 방에 올 때 자주 신었던 양말이었다.

하도 특이한 무늬의 양말이라 민수도 기억하고 있었던 건데 저 양말을 봤을 때 이번 영상은 태준이 찍은 게 확실했다

물론 시청자들은 태준의 그 특이한 양말을 알 리가 없으니 그냥 카메라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민수는 태준의 부주의함에 조금 어이가 없었다.

“하…. 윤 배우 진짜….

저걸 수연 선배 집까지 따라가서 지가 찍었다고?

저거 혹시 일부러 저러나?”

민수는 태준이 정말 걸려서 공개연애를 하고 싶어 저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왠지 태준이라면 진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 같았다.

“에이… 윤태준 이기적인 녀석.

이러면 안되지.

수연 선배가 공개하자고 해도 지가 말려야 할 녀석이 저러고 있으니…..”

민수는 아직 공개하는 것이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태준이 그럴 생각이라면 자신이 나서서 말릴 생각은 없었다.

“그래. 본인이 알아서 잘하겠지. 그럼 난 무슨 영상을 찍을지 생각이나 좀 해볼까.”

민수는 자신이 괜한 참견이다 싶어 공개 연애에 대한 생각을 애써 지우고는 수연의 영상을 다시 보면서 자신은 무슨 영상을 올릴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드디어 영화의 촬영 날이 밝아 왔다.

첫날 민수가 찍을 장면들은 영화의 시작 부분인데 평화로운 분위기에 취한 조가 조금씩 사람답게 변해가는 장면이었다.

에릭 존스 감독은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민수에게 초반부 민수가 반드시 표현해 주어야 하는 몇 가지 부분을 세세하게 지시했다.

사람의 정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아온 조가 한 가정의 화목한 모습을 보며 인간성을 조금씩 회복해 나가는 모습을 점차적으로 표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 지시의 주된 내용이었는데 이 부분이 스티븐 로우가 이 영화의 주연이 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았다.

민수는 에릭이 사소한 부분까지 조목조목 지적하며 연기 지시를 내리는 것을 보며 자신이 이 감독에 대하여 너무 선입견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긴 액션 거장이라고 다른 연기에 대하여 무지한 것은 아니겠지.

그랬으면 할리우드에서 거장이라는 명칭을 받을 수조차 없을 테니 말이야.”

그리고 감독의 지시를 되새겨 보면 이번 영화는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단순한 영화는 절대 아니었다.

완전히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기 직전, 중국인 부부가 죽으면서 다시 인간성을 잃어버리는 주인공과 그 주인공의 마지막 보루인 소녀.

그리고 그 소녀를 위하여 다시 살육 병기로 돌아서는 주인공.

이런 일련의 흐름에 관객이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주인공과 동조할 수만 있으면 아마 이 영화는 단순하게 때려 부수는 액션 영화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민수는 촬영이 시작하기 전까지 자신이 생각해 왔던 조의 모습에 감독이 지시한 사항들을 추가해 완성된 조의 모습을 끊임없이 이미지화하였다.

촬영이 시작할 시간이 되고 민수는 오늘 자신과 같이 연기할 “메이”와 만날 수 있었다.

귀엽고 깜찍한 중국인 소녀.

앞으로 자신과 함께할 꼬마 숙녀를 만난 민수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잘 부탁드립니다.

린 시오 메이 라고 합니다.

친한 사람들은 저를 린 이라고 불러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부지게 인사하고 있는 저 귀여운 중국인 꼬마 숙녀.

이제 겨우 혜민이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 저 귀여운 소녀는 민수도 익히 알고 있는 배우였다.

린 시오 메이.

전생에서 린 시오 메이는 중국에서 절대적인 원탑 여배우였다.

중국에서는 당연히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고, 중국 자본을 등에 업고 할리우드까지 진출.

할리우드에서조차 큰 인기를 누려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세워준 최고의 배우.

하지만 누구도 린 시오 메이가 중국인의 자본을 업고 주연을 꿰찼다고 욕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단순히 중국어로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영어 연기에 더 능숙한 완벽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민수가 기억하기로 할리우드에서 동양인과 서양인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발점이 된 배우가 바로 린 시오 메이였으니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배우였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귀여운 숙녀가 훗날 몽환적인 분위기의 미녀 배우가 된다니, 민수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귀여운 린 시오 메이를 바라보며 묘한 감흥을 느꼈다.

린 시오 메이가 돌아가고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게 바라보던 민수의 입에서 순간 픽 하는 실소가 세어 나왔다.

“스티븐 로우에 린 시오 메이라…..”

한국을 떠나오자마자 거물급 배우를 둘이나 만난 셈이었다.

물론 세상은 아직 그들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훗날 사람들은 이 영화를 뭐라고 기억할까?

할리우드 액션 스타 스티븐 로우가 출연한 액션 영화?

아니면 중국의 전설적인 여배우 린 시오 메이가 데뷔한 영화?”

혼자서 생각하며 실소를 짓던 민수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단단하게 굳은 표정을 짓고 의욕이 넘실거리는 눈동자로 촬영장을 응시하던 민수는 촬영장으로 걸어가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말이야…… 그럴 순 없지.

내가 주연인데 들러리를 설 수는 없는 거니까.”

민수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생각할 때 배우 정민수가 자신의 액션 연기에 끝을 보여준 영화라고 기억되길 원했다.

이 영화의 주연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촬영이 시작되고 민수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민수는 평소에 자신이 가졌던 조금 따듯하고 친절한 느낌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버려 허무함 만으로 가득 찬 조가 되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저쪽에서 밝게 웃으며 한 소녀가 사뿐사뿐 조에게 다가온다.

병아리색 밝은 원피스를 입고 입에 한껏 미소를 지은 소녀는 눈이 부실 정도로 귀여워서 보고만 있어도 마음속 한구석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소녀는 아무 생각 없이 하늘만 보는 조를 발견하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조 쪽으로 다가왔다.

“아저씨. 중국인이에요?”

자신에게 맹랑하게 다가와 말을 거는 소녀, 조의 눈이 순간 소녀 쪽으로 돌아간다.

소녀는 아무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그의 눈이 이상하지 않은지 조 옆에 앉아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중국인 맞죠?

헤헤헤. 저도 중국인이에요.

이 동네에서 중국인을 보는 건 처음이라서 너무 반가워요.”

소녀는 조가 대답을 하든 말든 상관없이 자신의 말만 계속 재잘거렸고, 그런 소녀를 바라보는 조의 눈빛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조는 자신에게 이렇게 무방비하게 다가오는 생명체가 처음이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살육을 저질렀고, 그 대상 중에는 저 소녀보다 더 어린아이도 있었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 병기였다.

감정도 생각도 없이 상부에서 지시 내리는 대상을 전부 제거하는 그런 병기.

잦은 살육으로 내재된 살기, 그리고 느껴지는 짙은 허무함 때문인지 사람들은 자신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저 소녀는 어떻게 자신에게 쉽게 다가올 수 있었고 저렇게 즐겁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일까.

조의 표정에 처음으로 감정이라는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첫 감정은 바로 호기심.

조는 호기심이 조금 담긴 눈으로 자신 앞에서 재잘거리는 소녀를 바라 보고 있었다.

“아저씨 이제야 저를 보시네요.

아, 제 소개를 아직 안 했죠?

제 이름은 메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아저씨.”

조 와 메이가 만나는 첫 장면의 촬영이 끝났다.

OK 사인을 던진 에릭은 촬영된 부분을 살펴보면서 작게 웃음을 터트렸고 에릭 감독 옆에서 민수의 촬영을 구경하던 스티븐은 민수의 연기를 보고 놀란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와…… 대사가 한마디도 없는데…..”

민수는 한마디의 대사도 없이 완전히 허무감에 물들어 있던 조가 메이에게 점점 호기심을 느끼는 과정을 깔끔하게 표현했다.

스티븐은 방금 민수가 보여준 연기를 보며 평소에 에릭 감독이 자신에게 요구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잘 봐둬. 네 녀석이 가장 부족한 것을 저놈이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녀석은 자신만이 가진 묘한 분위기가 있어.

그런데 그 분위기가 저런 허무하고 슬픈 연기를 할 때 더 명확하게 드러나고 관객들에게 공감을 끌어내는 거야.

넌 정말 훌륭한 액션 배우이긴 하지만 아직 연기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지 저런 섬세한 감정 표현에는 미숙하니까 이번에 저 녀석이 연기하는 걸 끝까지 잘 관찰하면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에릭은 스티븐에게 민수의 연기를 잘 살펴보라고 충고한 후 메이가 찍힌 영상을 살펴보고 있었다.

“하….. 이 꼬맹이는 진짜 물건이네.

어떻게 이런 아역을 찾았지?

에드워드 녀석은 참 재주도 좋단 말이야.

설마 예전에 농담처럼 중국 전역을 다 뒤졌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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