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168화 (168/325)

#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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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에릭 존스가 중국에서 Joe를 찍겠다고 말했을 때 로우는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주연으로 출연할 영화였는데 결국 주연을 뺏겨 버리고 만 것이다.

이제 자신도 감정연기에 익숙해 지고 있었고 조금만 기다리면 자신이 충분히 조를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로우는 이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였을까.

로우는 민수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릭이 자신에게 맡기지 못한 배역을 저 배우에게 맡겼다는 것은 에릭의 눈에는 자신보다 저 배우가 더 우월하다는 뜻이었고 로우는 그 점을 참기 힘들었다.

로우도 자신의 단점을 알고 있었다.

아직 진짜 연기를 많이 경험하지 못해 감정 연기가 어설프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당연히 저 배우는 자신보다 그쪽 방면에서는 월등할 것이다.

그러니 에릭이 저 배우를 주연을 결정한 것이겠지.

하지만 스턴트 연기만은 자신이 저 동양인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저놈 앞에서 더 적극적으로 어려운 동작들을 연습했고, 일부러 거친 말로 저놈을 자극했다.

만약 자신의 말이나 연기에 그가 자극받고 화를 내거나 감탄을 했다면 자신의 기분도 조금 풀어졌겠지만, 저놈은 자신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고, 그 점이 자신을 더 불쾌하게 만들었다.

로우는 자신이 건물을 완벽하게 오른다면 민수도 감탄할 수밖에 없을 거로 생각했다.

자신은 그런 민수를 한껏 비웃어줄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로우를 더 용감하게 만들었고 그는 한발 한발 신중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로우는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로우는 어느새 8층까지 올라갔다.

저런 악조건 속에서 저기까지 올라가다니 민수도 로우의 클라이밍 능력에는 감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8층을 지나가는 순간 오묘한 불쾌감이 민수의 뇌리를 강하게 자극했다.

민수는 바로 로우의 주변을 확인했다.

8층의 통유리 구역이었다.

민수의 급히 지금 로우가 있는 위치 앞에 어떤 사무실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저 자리는 바로 사장실이 있는 자리였다.

“빌어먹을…. 사장실이라니”

민수가 작게 욕지기를 하는 순간 강한 돌풍이 몰려오고 신중하게 움직이던 로우의 발이 장식물에서 미끄러졌고 허우적대던 로우는 결국 균형을 잃고 말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동료들이 놀랄 틈도 없이 미끄러진 로우는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난간 틈을 움켜잡았고 자신의 강한 악력만으로 몸을 지탱하는 처지가 되었다.

로우가 미끄러지는 모습을 확인한 민수의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옥상으로 가 줄을 내린다고 해도 저 상황에서는 줄을 잡을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안전 장비를 차고 올라간다면 그를 구할 수 있겠지만 그때까지 로우가 버틸 수는 없어 보였다.

아무리 단련된 스턴트맨이라도 저런 좁은 구역에 양손 끝으로 몸을 지탱하면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길게 버틴다고 해도 3~4분 정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시간 안에 저기까지 올라갈 수 없었다.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이었다.

다른 스턴트맨들이 패닉에 빠진 상황에서 민수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민수는 바로 8층 사장실을 향해 뛰어갔다.

당황하던 다른 스턴트맨들도 민수가 움직이자 정신을 차리고 사방에 구원을 요청하러 뛰어가기 시작했다.

온 힘을 다해 뛰어 사장실에 도착한 민수는 자신을 가로막는 경비원을 설득할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그를 쓰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군대에서 배운 특공무술로 경비원을 빠르게 제압한 민수는 바로 사장실로 뛰어들었고 갑작스러운 민수의 등장에 의아해하는 에드워드 사장을 무시한 채 바로 사장실 내부를 살펴보았다.

강풍이 부는 지역의 사장실 통유리.

저 유리는 분명히 방탄유리와 비슷한 강도의 고 강화유리가 분명했고 자신의 힘으로 저걸 깨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 분명했다.

그때 민수의 눈에 띈 것은 입구 근처에 비치된 소화기였다.

민수는 바로 소화기를 집어 들고 창 쪽으로 뛰어갔다.

일련의 과정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에드워드도 민수가 창 쪽으로 이동하자 그때야 창밖에 매달린 로우를 발견하고는 아연실색하였다.

“아니…. 저게 무슨.”

민수는 바로 로우가 있는 곳 바로 옆쪽을 소화기로 내려쳤다.

로우가 있는 자리에 유리를 깨다가는 잘못하면 로우의 다리에 충격을 줘 그를 떨어트릴 수도 있었으니 지금은 옆쪽에 구멍을 뚫는 게 최선이었다.

“꽝!”

“이 유리는 그렇게 깰 수 있는 게….”

“꽝! 꽝! 챙~”

민수가 온 힘을 다하여 소화기로 내려치자 조금씩 우그러들던 유리 벽이 결국 조금씩 파손되기 시작하더니 결국 한 부분이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유리가 찢겨 나갈 때마다 에드워드 사장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 갔고 자신의 몸을 완전히 내보낼 수 있을 만큼 유리를 찢어버린 민수는 상체를 밖으로 내밀어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우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한편 갑작스러운 광풍으로 균형을 잃은 로우는 두 손으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며 버티면서 이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매달려있던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고 문득 자신이 스턴트를 처음 배울 때 스턴트 배우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순간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에릭 감독의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가자 로우는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거고, 이제 앞으로 자신에게 남은 기회는 전혀 없었다.

자신은 이렇게 매달려있다 힘이 떨어지면 결국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운명에 한탄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자신의 다리 옆쪽에서 쿵쿵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유리창이 조금씩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유리창이 다 찢겨 나가고 자신이 그렇게 무시하던 동양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로우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민수는 자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로우의 허리띠를 한 손으로 강하게 쥐었다.

지금 로우가 살려면 로우가 자신을 믿어야 했다.

“로우. 신호하면 몸을 이쪽으로 튕겨.

내가 바로 너를 잡아끌 테니까.

OK?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다행히 로우도 지금은 민수를 믿는 모양인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3, 2, 1 GO!”

민수의 신호에 맞춰서 로우가 두 손을 놓으면서 최대한 몸을 민수 쪽으로 튕겼고 민수는 놀라운 완력으로 로우를 건물 안으로 잡아끌었다.

로우가 끌려오면서 민수와 로우가 한데 뭉쳐서 사장실 안에 널브러졌고 사방에 유리 조각투성이인 바닥에 널브러진 둘은 몸 곳곳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쓰러진 몸을 겨우 가눈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리면 고개를 저었다.

웃음이 나올 상황이 전혀 아니었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웃음이 났다.

어이가 없어서, 기가 막혀서, 그리고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에, 살렸다는 안도감 때문에.

그렇게 한참을 웃은 민수는 이 상황을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에드워드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제야 민수는 자신이 에드워드에게 대단한 무례를 범했다는 것이 생각났다.

민수는 이 상황에서 에드워드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웃음을 멈춘 민수는 에드워드에게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 사장님? 사장실 유리 벽이 완전히 박살 나서 정말 유감입니다.

그런데 저 유리 정말 비싼 거겠죠? 제가 어떻게 배상해야 할지….”

에드워드는 진지하게 배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민수의 말에 헛웃음 터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에릭의 말대로 저놈은 진짜 미친놈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미친 짓을 해서 사람을 살렸으니 그건 그거대로 좋았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건물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이번 소란으로 스턴트맨들은 에릭에게 엄청나게 강도 높은 정신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 미친놈들아. 죽으려면 집에 처박혀서 수면제나 처먹으라고.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내가 처음에 스턴트를 시작할 때 뭐라고 말했는지 다들 기억도 못 하는 건가?”

조금 방만하게 행동하던 스턴트맨들도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정신을 바짝 차렸는지 훈련할 때 느껴지는 집중력이 전과는 완전 달랐다.

특히 가장 극적으로 변한 것은 스티븐 로우였다.

가장 자유롭게 훈련하던 로우는 가장 꼼꼼하게 안전 장비를 챙기는 스턴트맨이 되었다.

민수는 그런 로우를 보면서 어쩌면 저 배우가 전생에서보다 더 많은 작품을 남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수가 알기로 전생에 로우가 당한 사고도 스턴트 연기 중에 안전 불감증으로 인하여 발생한 사고였으니 만약 로우가 앞으로도 이런 태도를 유지한다면 그런 사고는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로우가 민수를 대하는 태도 역시 완전히 달라졌다.

“Hey~Boy. 오늘 연습 마치고 저쪽 펍에서 맥주 한잔 어때?

거기 안주가 완전히 죽여준단 말이지.”

로우가 생명의 은인인 민수를 대하는 태도는 살갑기 그지없었다.

다만 아직도 호칭은 변함없이 Boy였는데 로우는 이 호칭을 그냥 민수를 부르는 애칭처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민수도 이제는 자신을 살갑게 대하면서 장난스럽게 부르는 호칭에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헤이, 로우. 몇 번이나 말하는 거지만 내가 너보다 한 살 많다고.

아직도 이해를 못 하는 거야?”

“오 쉣.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짜였다고? 네 얼굴 보면 그냥 20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그리고 로우말고 스티비라고 부르라니까.

가족들이나 친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부르니까 너도 앞으로 그냥 그렇게 불러줘.

그나저나 그래서 간다는 거야 안 간다는 거야?”

민수는 로우, 아니 스티비의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OK 가자. 대신 술값은 네가 내는 거야? 난 아직 출연료를 못 받았거든.”

주연인 주제에 조연인 자신에게 술값을 내라는 민수의 말에 로우도 헛웃음을 지으며 민수의 어깨에 팔을 올려 어깨동무를 걸었다.

“안돼 그건. 나도 아직 안 받았단 말이야.

돈은 각자 내자고? OK?”

자신도 돈이 없다고 너스레를 떠는 스티비의 말에 민수도 그냥 웃으며 OK 사인을 보냈다.

미래의 할리우드 액션 스타와의 친분이라….

민수도 자신에게 웃으며 다가오는 스티비가 싫지 않았다.

원래 인성 자체가 글러 먹지 않은 것은 진작 알고 있었고 짧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을 같이 해서인지 전우 같은 기분도 들었기 때문이다.

민수가 스티븐 로우와 사이가 좋아지자 스턴트맨들 역시 민수를 더 살갑게 대했다.

특히 스턴트맨들은 자신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민수가 달려가 로우를 구한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나중에 민수가 경비원을 때려눕힌 후 초고강도 강화유리를 찢어버리고 로우를 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민수의 능력에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정말 고맙군.

스티비는 내가 제일 아끼는 녀석이었는데 요즘 왠지 너무 자신만만한 거 같아서 조금 걱정하고 있었어.

자네가 없었으면 정말 어떻게 됐을지….

그리고 이제 저 허파에 바람만 가득한 놈들도 정신을 차리겠지.”

에릭에게 따로 치하를 들은 것은 덤이었다.

에릭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에릭도 그런 스턴트맨들의 분위기가 조금 걱정되긴 했었나 보다.

하지만 아마 에릭이 조금 더 빨리 그들에게 경고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이런 일이 한번은 있었을 것이다.

원래 사람이란 족속들이 직접 당해 보기 전까지는 감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솔직히 에릭의 경고만으로 로우의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면 전생에 로우가 그렇게 사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에드워드 사장도 경비원을 때려눕히고 자신의 집무실에 함부로 들어온 민수의 행동을 그냥 가벼운 해프닝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민수에게 나가떨어진 경비원도 여러 번 고개 숙여 사과하는 민수의 태도에 그냥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경비원은 배우의 공격 한 번에 자신이 나가떨어졌다는 것에 조금 충격을 받은 듯 보였는데 아마 이것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떠들만한 좋은 안줏거리가 되어 줄 것이다.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결국 이 일은 모두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스턴트들은 자신의 위험에 더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고, 스턴트맨들과 민수의 사이는 더 좋아졌다.

그리고 민수는 이 일이 이번 영화를 찍을 때 자신이 겪을 액땜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다.

“항상 뭔가 할 때마다 악재가 있었지.

아마도 이번에는 오늘 일이 그 악재가 아닐까?”

아무래도 사람이 죽을 뻔한 일보다 더 큰 일은 없을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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