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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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가 이곳에 와서 스턴트맨들과 같이 호흡을 맞춘 지 일주일이 지났다.
처음에는 민수를 조금 꺼리던 스턴트맨들도 이제는 민수를 자신의 동료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텃세가 존재하는 법이라지만 그래도 남자들만 바글바글한 이곳은 다행히 텃세가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었다.
물론 자신은 주연 배우였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에게 악감정을 가진다 한들 자신에게 피해를 줄 방법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몇 달 동안 호흡을 맞출 사이인데 완전히 데면데면한 것보다는 사이가 좋은 게 좋았다.
특히 이런 스타일의 액션 영화에서는 스턴트맨과 주연 배우가 서로 친해지면 다양한 의사소통을 통하여 감독의 생각보다 더 좋은 합을 낼 수도 있기 때문에 이들과 친해지는 것은 더 좋은 영화를 만드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된다.
이미 전생에서 스턴트맨으로 긴 시간을 보냈던 민수는 이쪽 사람들의 생리를 어느 정도 꿰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다.
스턴트맨들도 처음에는 자신들과 같이 합을 맞추러 온 동양인 주연 배우를 보고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그냥 평소처럼 별생각 없이 동작 합을 맞춰 볼뿐이었다.
‘그래도 액션 연기를 제법 한다고 하니 말귀는 알아먹을 테고, 이번에는 그렇게 힘들진 않겠네’라는 것이 그들이 민수에게 가진 유일한 감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배우인 주제에 스턴트맨들의 습성에 더 능통한 듯한 그의 모습에 점점 더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자신들이 가진 편견과는 달리 동양인 주제에 영어에도 능통해서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없었고, 주연 배우이면서도 전혀 거들먹거리지도 않았으며, 자신들이 설명해 줄 필요도 없이 능숙하게 스턴트 연기를 하는 민수의 모습에 그들의 호기심은 점점 호감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대부분의 스턴트맨이 민수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민수도 이곳에서 여러 스턴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민수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바로 액션 거장 에릭 존스와 함께하는 스턴트맨들의 수준이 자신이 알고 있는 한국 스턴트맨들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다른가였다.
다행히 이곳 스턴트맨들의 수준이 월등히 높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곳의 스턴트맨들은 확실히 많은 자본이 투자된 블록버스터 액션에 익숙해 보였는데 그런 아마도 한국과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 환경이 다르고 이들이 그런 대형액션을 더 많이 경험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스턴트맨으로 오래 생활했던 민수조차 이들이 지금껏 찍은 장면들을 설명들을 때는 조금 생소하고 감탄이 나올 정도였으니 확실히 이들은 블록버스터 액션의 대가들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Hey, Boy. 어때 할만해? 너희 나라에서는 이런 스턴트 연기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을 텐데.”
물론 모든 스턴트맨이 민수에게 호의적 이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지금 민수에게 다가와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하는 이 녀석이 있었다.
스티븐 로우.
이 남자는 엄밀히 말하자면 스턴트맨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에릭 존스의 스턴트맨으로 생활하다 지금은 이제 당당한 액션 배우로 데뷔한 이 녀석은 이번 영화에서도 제법 비중 있는 마피아 보스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수가 영 못마땅한지 항상 이름 대신 Boy라고 부르며 얕잡아 보고 있었다.
딴에는 동양인이 서양인보다 더 어려 보여서 그렇게 부르나 본데 사실 이 배우의 나이가 민수보다 한 살 어렸으니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민수는 전생에서 이 남자에 대하여 대충 알고 있었다.
에릭 존스를 따라다니다가 우연히 영화에 데뷔하게 된 이 남자는 에릭 존스를 아버지같이 존경하는 남자 중 하나였다.
그리고 몇 년 후 에릭 존스와 함께 첫 주연작을 찍으면서 최고의 액션 배우로 점점 인정받게 되는데 그때 스티븐 로우가 출연한 “버닝 레이지(Burning Rage)는 그의 인생 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액션 영화였다.
그리고 사고로 단명하는 바람에 영화배우로서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한 것이 그의 유일한 단점이라는 말까지 있었으니 확실히 이 녀석이 좋은 액션 배우임은 분명했다.
민수는 처음에 이 남자가 스턴트맨 팀에 끼어서 같이 연습 하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
그리고 이번 영화에서 특별히 스턴트 연기를 하지 않음에도 단원들과 연습하는 이유가 자신이 액션 배우이기 이전에 스턴트맨이고 여러 선배와 같이 지내는 것 자체가 좋아서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 녀석의 인생이 생각보다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자신도 가능하면 좋게 지내고 싶었는데 상대가 처음부터 저런 식으로 나오니 민수로써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민수가 스티븐 로우의 태도에 조금 짜증이 날 무렵에 한 스턴트맨이 로우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는데 그 이유를 들어보니 조금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이번 영화는 사실 예전에 에릭 존스가 스티븐 로우와 함께 찍으려고 했던 영화라고 한다.
다만 스티븐 로우가 액션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데 비해 표정 연기는 아직 완벽하지 않아 잠시 미뤄둔 상황이었는데 급하게 중국에서 영화를 찍게 되자 어느 정도 기획이 완료된 이 시나리오를 꺼내게 된 것이었다.
민수가 스티븐 로우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원래 자신이 찍기로 되어있던 영화였는데 그 영화를 갑자기 동양에서 온 녀석이 찍는다니 하니 조금 뿔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민수의 입장에서 보면 진작에 자기가 연기를 잘했으면 애당초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며 나중에 이것보다 더 좋은 영화로 데뷔하는 주제에 그런 것으로 한심하게 구는 것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민수도 틱틱 거리는 로우를 굳이 상대해 주지 않고 있었는데 어쩌면 그런 민수의 태도가 그를 더 자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 하긴 이 녀석은 자기가 무슨 영화로 데뷔할지 모르는구나.”
문득 쉬는 날까지 보기 싫은 자신을 찾아와 시비를 거는 로우를 보니 이놈이 자신이 데뷔하는 영화가 얼마나 인기가 있을지 알게 되어도 이런 유치한 짓을 계속할까 궁금하긴 했다.
민수가 자신도 모르게 한국말로 중얼거리자 로우의 표정이 더 안 좋아진다.
“뭐라고?”
“아, 아니. 뭐 액션은 할만하다고 그런데 웬일이야? 쉬는 날까지 날 찾아올 정도로 우리가 친한진 몰랐는데.”
“하…. 따라와 봐. 내가 진짜 스턴트가 뭔지 보여줄 테니까.”
민수의 말에 인상이 더 구겨진 로우는 민수에게 따라오라고 말하고는 자신 먼저 밖으로 나가 버렸고 민수는 그의 태도가 어이없었지만 무슨 짓을 하나 싶어 말없이 그를 뒤따랐다.
로우가 민수를 데리고 간 곳은 바로 티어즈 시네마의 건물 앞이었다.
그곳에는 로우 말고도 여러 스턴트맨이 모여있었고, 건물에는 빌딩 클라이밍을 할 수 있는 안전장비가 설치된 것을 보니 미리 계획된 일인 것 같았다.
“잘 봐. 이게 진짜 스턴트다.”
로우가 민수에게 빌딩 클라이밍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민수의 기를 죽일 생각인가 본데 그는 아무런 안전 장비 없이 그냥 건물에 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무슨 짓을 하나 지켜보려고 했던 민수도 그가 아무런 장비 없이 그냥 올라가려 하자 서둘러 그를 제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봐. 로우. 안전 장비를 잊은 것 같은데.
이곳 건물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그건 너무 위험하다고.”
“하? 위험하다고? 웃기는 소리. 이거보다 더 높은 건물도 쉽게 오르내린 나야.
물론 너 같은 겁쟁이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야.”
로우는 민수의 제지에 더 자극받은 듯 한차례 비아냥을 터트린 후 민수를 무시하며 건물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민수는 자신 말고는 아무도 로우를 말리지 않자 아연한 기분이 들었다.
“이봐요. 잭슨, 저거 안 말려도 되는 거예요? 너무 위험하잖아요.”
민수가 자신과 가장 친하게 지내던 잭슨에게 물었지만, 잭슨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에이, 괜찮아. 겨우 10층짜리 건물이잖아.
스티븐의 주특기가 저 빌딩 클라이밍이야.
지금까지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다고.
스티븐한테는 저 정도는 그냥 준비 운동밖에 안 돼.”
잭슨까지 저렇게 나오자 민수는 할 말이 없었다.
빌딩 클라이밍.
솔직히 스턴트맨이 빌딩 클라이밍을 잘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물론 건물에 매달리거나 건물에 올라가는 액션을 찍을 때가 있긴 하지만 그건 매우 드문 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민수에게도 빌딩 클라이밍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하지만 잭슨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곳 스턴트맨들은 종종 빌딩 클라이밍을 연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만약 민수가 지금껏 모든 스턴트를 잘 따라 하는 것이 아니꼬워서 민수가 따라 할 수 없는 스턴트로 기를 죽이기 위해 빌딩 클라이밍을 선택했다면 우선 종목은 아주 잘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민수라도 생전 처음 해보는 걸 완벽하게 할 순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민수의 기를 죽이기 위함이라도 보호장비 없이 건물에 오르는 건 너무 과했다.
스턴트맨들이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고 이제 스턴트에 대하여 잘 알게 되면 그들의 행동은 대충 두 부류로 나뉘게 된다.
한 부류는 스턴트를 잘 알기 때문에 더 조심하며 안전에 온 힘을 쏟는 부류였고 나머지는 스턴트에 자신이 붙어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게 되는 부류였다.
아무래도 이쪽 사람들은 대부분 두 번째 부류인 모양이다.
민수의 기억 속에도 이렇게 스턴트맨 전체가 자신감에 팽배해 있는 그런 팀이 있었다.
계속되는 성공으로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거 같은 그런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넘치는 자신감으로 점점 더 어려운 연기에 도전했고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스턴트 팀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넘치는 자신감은 결국 자만심이 되었고 작은 부주의 때문에 큰 사고를 겪게 되었다.
아마 지금, 이 스터트맨 팀이 그런 상황이 아닌가 싶다.
넘치지는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넘어가는 그런 단계 말이다.
저 트어즈 시네마 건물은 초보자인 민수가 생각하기에도 클라이밍이 쉽지 않은 형태였다.
얼핏 보기에는 예술적인 형태의 여러 조형물이 클라이밍을 도와줄 것 같지만 저런 불규칙한 조형은 차라리 클라이밍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중층부터 고층까지 이어진 판 유리 벽은 클라이밍 하기에는 최악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문제는 기후였다.
민수가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 동안 가끔 불규칙하게 불어오는 돌풍을 만난 적이 몇 번 있었다.
엄청나게 강한 돌풍은 아니었지만, 그 바람이 건물을 오르는 스턴트맨에게 불어 닥친다면 그의 신경을 분산시킬 것이 분명했다.
민수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기를 죽이기 위하여 저런 무모한 짓을 하는 로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저러는 것일까?
민수가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 중에도 로우는 부지런히 건물을 오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솜씨였다.
빌딩 클라이밍 경험이 없는 민수가 봐도 정말 대단했다.
확실히 자신의 주특기라고 자부할만한 그런 실력이었다.
하지만 민수는 감탄하는 대신에 계속 주변을 살폈다.
혹시 위급상황이 온다면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로우는 건물을 오르면서 연신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건물의 형태가 거지 같았다.
아래에서 봤을 때는 몰랐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 로우를 곤란하고 만들고 있었다.
특히 이 장식물.
로우는 분명 저 장식물들을 밟고 올라가면 충분히 건물에 오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대리석으로 보이는 이 장식물들은 생각보다 미끄러웠다.
3층 정도 올랐을 때 로우는 차라리 그냥 내려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자존심.
큰소리 뻥뻥 치고 올라왔는데 그냥 내려가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