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162화 (16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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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수의 예상대로 오늘 운동은 정말 쉽지 않았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말이다.

    한여름이 되어서 최대한 얇고 짧은 운동복을 입은 설아의 공격력은 민수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땀을 흘리는 그녀로부터 그녀 고유의 체향이 점점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평소에 워낙 운동을 열심히 해서 체내 노폐물도 거의 없는지 그녀의 체향에서 느껴지는 것은 은은하고 부드러운 살 냄새와 아마 그녀가 평소에 사용하는 바디로션 향인 듯한 산뜻한 꽃향기뿐이었다.

    심지어 땀을 흘리면서 운동복이 더 몸에 밀착하며 그녀의 몸매가 더 선명하게 드러났으니 민수로써는 점점 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도 분명 같이 운동한 경험이 있었고 비록 지금 정도는 아니지만, 그때도 상당히 노출이 심한 운동복이었다.

    그리고 민수는 그때 설아의 무자비한 공격을 무사히 방어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랑은 조금 달랐다.

    그때 자신이 조금 무감각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이 원래 타인에게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스타일이기도 했고 괜히 설아에게 불쾌감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 사람이 나랑 특별한 관계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가 가진 호감을 확인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무던하고 여성에게 담백한 민수라도 호감을 느낀 대단한 미녀가 저렇게 접근하면 참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민수는 가능한 한 평정심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민수는 결국 장난기가 가득 묻은 그녀의 눈매와 앳돼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최대한 자신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조금 아니 조금 많이 흔들리던 민수가 이내 평정을 되찾자 조금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은 설아는 공격 템포를 느슨하게 바꾸고 이내 운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사히 운동을 마치고 씻으러 들어가는 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민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살랑살랑 걸어가는 뒷모습조차 더럽게 예뻤다.

    민수는 이제 설아가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지만, 그녀가 가끔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다가올 때면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하기 힘들 곤 했다.

    운동을 마치고 쉼터에 마주 앉은 둘은 민수가 중국에서 출연을 요청받은 작품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같이 운동을 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설아는 평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 에릭 존스요? 그 고독한 새벽 찍으신 감독님 아니에요?

    헤….. 그분이 지금 중국에 계시는구나.

    중국이 그래도 대단하긴 하네요.

    할리우드 감독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다니요.”

    “중국이 대단한 건 맞지만 그보다 에드워드 사장이 감독님이랑 친분이 있다는 게 대단한 거겠죠. 원래 그런 무례한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조금 웃긴 일이니까요.

    어떤 감독이 자신의 노하우를 대놓고 알려달라는데 기분 좋을 수 있겠어요?”

    “음… 그건 그렇네요.

    하지만 그렇게 어려울 때 자신을 도와준 사람을 잊지 않은 것만 해도 감독님의 인간성을 엿볼 수 있다고 할까요?

    그분도 좋은 분인가 봐요.”

    설아의 말에 민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확실히 설아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에릭과 에드워드 간에 다른 이야기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과거의 은혜를 잊지 않은 에릭 감독의 인간성은 그런대로 믿을 만해 보였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원래 그 당연한 것조차 잘 지켜지지 않는 곳이 이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네요. 영화랑은 상관없지만 어쨌든 그런 면은 본받을 만하네요.”

    “그래서 중국으로 가시는 거예요?”

    “아마도 그렇게 될 거 같아요.

    솔직히 지금 마땅한 대안도 없어요.

    이왕 액션 영화를 찍을 바에는 그래도 제대로 된걸 찍고 싶긴 해요.

    다만 문제는 대본인데…. 이거 참…..”

    민수가 대본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려다 한숨을 짓자 설아는 궁금하다는 듯이 보채며 계속 물었다.

    “왜요? 대본에 무슨 문제가 있어요? 음… 어쨌든 중국 영화니까 중국어라서 그래요?

    하지만 민수 오빠 중국어 잘하시잖아요.

    저번에는 사극이라서 문제였던 거고, 이번엔 현대극이라 별문제 없을 텐데요.”

    민수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의 걱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실 중국어는 별문제가 아니죠. 설아 씨말대로 저번에는 사극이라 문제였던 거니까요.

    그런데 그 전에 대본에 대사 자체가 많지 않아요.

    그러니 제 연기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오…..”

    주연의 대본에 대사가 많지 않다는 말을 듣고 설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눈을 크게 뜨면서 감탄은 내뱉었다.

    “와….. 진짜 액션으로 끝을 보겠다는 거네요. 민수 오빠 진짜 힘들겠어요.”

    “뭐, 힘들 것보다 걱정이 더 커서요.”

    “아,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진짜 어려운 연기네요.

    어쨌든, 주연이니까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카메라에 나올 거잖아요.

    게다가 단독 주연이니까 더 그럴 거고요.

    대사가 없어도 주인공은 내면은 관객들에게 알려야 할 텐데 대사 없이 그러려면 표정이 정말 중요할 거 같아요.”

    그냥 지나가는 듯이 말하는 설아의 말 속에서 민수는 바로 자신이 뭔가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주연 배우가 액션만으로 모든 걸 해결한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의 오판이었다.

    대사가 없다는 것은 설아의 말대로 대사 외의 것으로 관객에게 자신을 설명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액션일 수도 있고 설아의 말대로 표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자신은 지금 액션에만 너무 정신이 팔려있었다.

    아마도 에릭 존스라는 이름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기본적인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하, 바보 갔네요. 제가.

    당연한 건데 그런 착각을 하다니….

    표정이라….. 그렇게 생각하니 괜찮은데요.

    설아 씨말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나온다는 것도 나름 매력적이고요.

    확실히 이건 해야겠네요.

    고마워요. 설아 씨.”

    민수가 결정을 내리고 마음 편하게 웃자 설아도 옆에서 같이 웃어 보였다.

    “제가 아무래도 오빠에게 조금 도움을 준거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오늘 저도 한 가지를 얻었으니 오빠도 한 가지를 얻는 것이 공평하긴 하니까요.”

    “네?”

    민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설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설아는 짓궂은 눈빛과 조금은 도발적인 표정으로 민수에게 대답하였다.

    “음, 제가 오늘 민수 오빠가 “정신적 고자”가 아님을 확신한 날이거든요!

    헤헤~ 오빠도 정상적인 남자였어요!”

    설아의 엉뚱한 말에 민수는 픽하고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체 이 아가씨가 평소에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또 한편으로 이번 기회에 오늘처럼 과한 방법으로 설아가 접근하는 것을 자제시킬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아 씨.

    전 정상적인 남자가 맞아요.

    음…. 그러니까 혈기왕성한 20대의 남성이라는 말이죠.

    제가 예전에 설아 씨의 몸매나 외모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던 것은 설아 씨에게 불쾌함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모든 남자가 여자가 예쁘다는 이유로 껄떡대기 시작하면 당하는 입장에서 얼마나 짜증 나겠어요?

    아마 설아 씨도 지금껏 살면서 그런 일을 많이 겪어 봤을 테니까요.

    전 제 행동이 설아 씨에게 불쾌함을 주는 것이 싫었고 그래서 최대한 조심한 거뿐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설아 씨랑 저는 서로 호감을 확인했고, 전 설아 씨에게 충분히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오늘처럼 그렇게 너무 무방비하게 나오면 제가 조금 곤란해요.”

    “곤란…이요?”

    “네, 남자는 생각보다 더 충동적인 동물이거든요.

    전 나름대로 이성적인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충동이란 놈이 생각보다 강할 수도 있는 거예요.”

    “…..?”

    민수는 자신이 계속 돌려 말하면 설아가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이번에는 조금 쉽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오늘처럼 그렇게 다가오면 우리의 진도가 중간 지점 몇 군데를 생략하고 쭉 멀리 가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설아 씨가 기분 나쁠 수도 있고 어쩌면 우리의 사이가 조금 어긋날 수도 있잖아요.”

    설아는 인제야 민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민수의 말 중에 무엇이 웃긴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에이, 난 또. 무슨 말인가 했네.

    킥킥, 도대체 오빠는 어느 시대 사람이에요?

    오빠가 생각하는 진도가 그 자리에서 끝을 보겠다는 말은 아닐 테고…..

    뭐, 좋아요. 원래 오빠가 그런 사람인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오빠가 저에게 진지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어서 기분이 좋네요.

    그러니 제가 좀 기다리도록 할게요.”

    말을 마친 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민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자신의 말을 듣고 조심하겠다는 대답을 기대하던 민수는 설아의 말과 행동에 당황해서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가온 설아의 입술은 민수의 귀 바로 옆에서 멈추었고 민수의 귓가에 그녀의 부드러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는 건 싫어요.

    만약 계속 기다리게 하시면 그때는 오늘보다 더 세게 나올 거에요? 아셨죠?”

    민수의 귓가에 작게 속삭인 설아는 부끄럽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민수는 멍한 표정으로 그런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떠나가는 설아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 민수는 대담하고 도발적인 말을 던진 후 부끄럽다는 듯 도망치는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며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저건 대체 대담한 거야? 부끄러워하는 거야?

    그나저나 또 한 방 먹었네.

    당연히 조심한다고 말할 줄 알았더니…..

    역시 재미있네. 이 여자.”

    민수는 자신을 계속 기다리게 하지 말라는 그녀의 말에 솔직히 살짝 가슴이 떨려왔다.

    “귀엽네, 귀여워…..

    설마 내가 예전에 도발적인 여성이 좋다고 해서 무리하는 건 아니겠지?

    저게 연기면 진짜 아카데미 감인데….

    참 알 수가 없구만.”

    민수는 저런 도발적인 모습이 설아의 원래 성격이라도 좋았고, 자신 때문에 그녀가 무리하고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만약 자신 때문에 무리하고 있다면 좀 더 기분이 좋으리라.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신에게 큰 호감을 느끼고 있고 자신도 그렇다는 것이었다.

    민수가 결정을 내리자 윤 대표는 민수와 함께 중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윤 대표는 티어즈 시네마의 에드워드를 직접 만나보고 그들이 내미는 계약조건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배우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감독인 에릭 존스를 직접 만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출연을 결심한 민수는 상대가 내미는 조건이 특별히 나쁘지만 않으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다만 가능하면 개런티는 러닝 개런티로 단일화할 생각이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민수는 자신이 주연 배우로써 영화의 흥행을 같이 누리고 실패를 같이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자신에게 얼마의 개런티를 제시할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큰돈을 미리 주는 것보다 흥행에 따라 수익을 나누는 것을 거절할 것 같지는 않았다.

    중국이 넓긴 했지만, 한국과 그렇게 멀진 않아서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항에서 천루가 보낸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민수는 액션 거장이라는 감독 에릭 존스를 만날 수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한 올의 머리카락도 없이 반질거리는 머리 그리고 편한 반소매 티에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는 에릭 존스는 권위적인 감독이라기보다는 그냥 펍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고 있는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오! 너구나.

    하하하 반가워. 난 에릭 존스야.”

    민수는 에릭이 내미는 손을 잡고 영어로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한국에서 온 배우 정민수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에릭은 민수가 영어로 자신을 소개하자 더 환하게 웃으며 민수를 반겨 주었다.

    “영어도 어느 정도 하는구나. 좋아, 가자고.

    내가 영화에 대하여 설명해 줄 테니까.”

    에릭은 계약에 대하여서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민수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민수도 에릭한테 끌려가면서도 이 감독의 마이페이스적(자기 스타일대로 밀고 나가는) 태도에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웃음이 먼저 나왔다.

    ‘역시 이런 스타일인가? 하긴 대부분 한 분야의 거장이라면 보통 이런 식이지.’

    자신의 분야가 아닌 것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자신의 것에만 집중한다.

    민수는 어쩌면 이것이 어떤 한 분야의 대가가 되는 기본적인 조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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