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161화 (161/325)

#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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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가 윤 대표의 호출을 받은 것은 차기작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비웠을 시기였다.

“아. 왔구나, 앉아라.”

민수가 자리에 앉자 윤 대표는 민수에게 책 두 권을 내밀었다.

영어와 중국어로 만들어진 두 권의 대본이었다.

“이게 뭔가요?”

민수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윤 대표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 솔직히 나도 이게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어쨌든 네 앞으로 들어온 대본이란다.

에릭 존스 감독의 중국 영화 대본이라는 구나.”

“에릭….존스…….. 로운리 던 (The Loney Dawn : 고독한 새벽)의 에릭 존스요?”

“그래. 에릭 존스라는 이름의 감독은 그 사람뿐이겠지.

어쨌든 너한테 섭외가 들어온 건 확실해.”

“하……. 중국 영화라고 하셨죠? 그래서 중국어 대본이…..”

민수가 조금 더 익숙한 영어 시나리오를 펴보는 사이에 윤 대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민수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우리에게 연락을 한 사람은 삼화 필름의 위시춘 사장이었다.

티어즈 시네마의 에드워드 사장 쪽에서 민수 너를 섭외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이야.

예약 내용을 조율하기 전에 이 영화를 할 의사가 있는지부터 확인하려는 거지.”

“흠…..”

“위시춘 사장에서 대충 사정을 물어보니 지금 천루에서는 대규모의 영화단지를 조성한 상태고 이 영화가 그곳에서 촬영될 첫 영화라고 하는구나.

특히 할리우드에서 이름난 감독을 모셔와 중국 내에서 할리우드 스타일의 영화를 제작하면서 그 과정을 배우는 게 천루의 첫 목표하고 하니 이 영화가 어떤 의미인지 대충 알 수 있지.”

“음… 쉽게 말해서 교보재 같은 거군요.

분명 메이킹 영상도 꼼꼼히 촬영될 테고, 앞으로 중국에서 영화를 찍을 때 충분히 참고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나저나 의외네요.

에릭 존스 정도로 이름난 감독이 그런 영화를 찍어 준다니.”

“위시춘 사장이 말하길 에릭 존슨이 티어즈 시네마 사장인 에드워드랑 막역한 사이라고 하는구나.

에릭 존스가 이름을 날리기 전 겪었던 어려운 시기를 에드워드 때문에 쉽게 넘겼다고 하는데 아마 금전적이 문제였겠지?

그래서 모든 감독이 거절한 그 일을 에릭 존스가 흔쾌히 허락하게 된 거지.”

“어려운 시기라….. 역시 돈이란 건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돈으로 그런 인연을 살 수 있다니…..”

돈에 특별한 가치를 두지 않고 살던 민수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참 돈이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에릭 존스 정도에 거장 감독의 경험과 노하우를 돈으로 산다면 대체 얼마를 줘야 할까?

천루에게는 분명히 목적을 공개했을 테고 에릭 존스도 자신의 영화가 중국 감독들 사이에서 교보재처럼 활용 될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과정에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노하우를 어느 정도 습득하게 된다는 것을 감독인 그가 모를 리가 없다.

아마 천루에서는 어마어마한 거액을 제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릭 존스를 제외한 모든 감독이 천루의 제안을 거절한 것만 봐도 그들의 경험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예전에 에드워드가 에릭 존스를 도와준 돈은 지금 천루가 제안한 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 돈이 이어준 인연 때문에 에릭 존스가 흔쾌히 중국을 왔다.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가르쳐주기 위해서.

“돈이 이상하다기 보다는 아무래도 상황과 마음 때문이겠지.

돈은 그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포장지 같은 거고 말이야.

원래 사람은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어려울 때…. 포장지라…..”

“어쨌든 에릭 존스가 그렇게 중국으로 와서 영화를 찍는데 지금 그 영화의 주연을 너에게 부탁하는 상황이다.

내가 들은 것은 대충 이 정도인데….. 너의 생각은 어떠냐?”

사실주의 액션의 대가 에릭 존스.

에릭 존스는 기본적으로 액션이 주는 화려한 동작을 거부하는 감독이었다.

액션의 크고 화려한 동작을 지양하고 지극히 현실적이고 간결한 느낌으로 액션 영화를 촬영한다.

그리고 밋밋한 느낌을 주는 현실적인 동작들을 자신의 연출을 통하여 긴박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것이다.

아마도 에릭 존스의 연출 능력은 자신이 감탄했던 김찬진 감독의 그것보다도 월등한 수준일 것이다.

그런 감독이 자신과 영화를 찍자고 하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에릭 존스 정도의 감독이라면 그 영화가 어떤 목적으로 촬영되는 영화든지 한 번쯤은 달려들어 봄 직했다.

하지만 민수가 신경 쓰는 부분은 감독이 누구냐 보다는 이 감독이 찍을 영화 그 자체였다.

민수는 신중하게 시나리오를 살펴보았다.

그렇게 살펴보던 민수의 입에서 순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이거 진짜 어이없는데요.

마피아에…. 마지막 부분에는 삼합회도 나오네요.

게다가 이거….. 주연 배우인데도 어이없게 대사가 많지 않네요.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솔직히 민수 입장에서는 상대가 에릭 존스가 아니라 스필버그 감독이라고 해도 이런 대본은 사양이었다.

민수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윤 대표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우리가 생각하기 힘든 어이없는 내용에 생각지도 못한 스타일의 주인공이긴 하더구나.

나도 대본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대본을 보니 왜 감독이 너를 원하는지 대충 짐작이 가더구나.

그리고 이건 전적으로 내 생각이지만 아마 에릭이랑 에드워드의 관계는 제쳐 두고라도 천루에서 자국인이 아닌 너를 영화의 주연으로 요청한 것은 그들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에릭 감독의 주장일 가능성이 크다.

아마 나라도 이런 기념비적인 영화에 타국인을 주연으로 쓰고 싶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감독이 널 쓰려고 하는 걸 천루가 막지 못했다는 것은, 천루의 의지를 꺾을 만큼 에릭 감독이 너를 강하게 원한다는 뜻이겠지.

어쩌면 감독은 아시아에서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을 만한 배우는 너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음…..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음… 뭐 그게 소속사 대표 입장에서 본다면, 내가 천루에서 더 많은 걸 뜯어 먹을 수 있다는 뜻이겠고, 배우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그래도 재미있지 않니? 자신밖에 못 하는 걸 하는 것 말이야.”

“자신밖에 못 하는 것….”

“솔직히 이 대본, 내가 볼 때는 그냥 쓰레기다.

내가 배우라면 절대 이런 영화 안 찍을 거다.

그리고 한국 감독 중 누가 이런 걸 나한테 가져오면 그놈 보고 미쳤냐고 묻겠지.

하지만 그 감독이 에릭 존스고 주연 배우가 너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져.

솔직히 감독이 너를 꼭 집어서 요구한다는 것은 결국 너만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최고난이도 액션이 이어진다는 것이겠지.

시나리오만 봐도 어떤 식일지 대충 짐작이 가.

아마 보통배우들은 절대 소화할 수 없는 그런 액션일 거다.

그러니깐 너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거지.

내가 만약 너라면 난 이런 기회를 놓치지는 않을 거 같구나.

왜냐하면 영화의 내용을 떠나서 너의 참모습을 정확히 보여줄 수 있는 감독은 현재로서는 에릭 존스뿐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앞으로 네가 다시 에릭 존스 같은 감독을 만날 수 있을 거 같지는 않구나.

이건 너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건 아마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한다.”

윤 대표의 말이 맞긴 했다.

솔직히 에릭 존스조차 자신의 신체의 한계를 끄집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감독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에릭 존스뿐일 것이다.

그리고 윤 대표의 말대로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할리우드의 액션 거장 에릭 존스를 자신이 다시 만날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건 능력의 유무를 떠나 자신이 동양인이기 때문에 가지는 필연적인 한계라고 볼 수 있었다.

특히 그 영화의 장르가 액션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액션 영화에서 동양인이 맡을 수 있는 배역은 중간 악역이나 주연을 도와주는 적당한 조연 정도였다.

그것도 이제 중국의 투자가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변화였으니 그들의 생각과 시각이 얼마나 편협한지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건 영화 제작자의 문제도 아니고 감독의 문제도 아니고 할리우드 영화의 주된 고객이 북미나 유럽인 같은 서양인이기 때문에 발생한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만약에 서양인보다 동양인이 영화를 더 많이 보고 그런 시기가 계속된다면 어쩌면 주연 배우들이 동양인으로 대체 될 수도 있었다.

영화 산업은 자본주의의 결정체고, 결국 영화는 돈이 되는 곳으로 흘러 들어가니 말이다.

어쨌든 윤 대표의 말대로 민수가 에릭 존스 같은 감독과 주연으로 같이 할 기회는 아마도 지금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런 방향으로 생각하자 민수도 생각이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민수 액션의 끝을 보여준다라….. ”

“어차피 넌 아직 젊고, 다른 감성적인 모습들은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고 본다.

너의 연기력이 어디 가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액션도 그럴까?

과연 저 감독 말고 다른 감독 밑에서 너의 역량을 충분히 보여 줄 수 있겠니?

나는 액션을 잘 모르지만 민 단장이 그러더구나.

한국에서 아마 너보다 액션을 잘하는 배우는 없을 거라고, 네가 진짜배기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진짜 제대로 날뛰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구나.”

“음….”

민수의 고민이 길어질 때 윤 대표는 조금 현실적인 이야기를 덧붙였다.

“지금까지는 배우 선배로서 너에게 이야기해 준 거고, 이건 조금 현실적인 이야기다.

너도 알다시피 지금 딱히 찍을 만한 영화도, 드라마도 없는 상황이고 적어도 겨울까지는 손 놓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잖느냐.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가서 좋은 경험을 하나 쌓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구나.

이건 그냥 내 생각이니 참고만 하여라.

당장 결정을 하긴 힘들 테니 한번 잘 생각해 보아라.

그래도 가능하면 빨리 답을 주는 것이 좋겠지.”

윤 대표의 말에 민수는 생각을 해보겠다고 말한 후 대표실을 나섰다.

“액션이라….. 에릭 존스와 할리우드의 액션……. 민 단장님의 액션과 뭐가 다를까?

솔직히 조금 궁금하긴 하네.”

민수는 조용히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날 저녁 민수는 오랜만에 헬스장을 찾아갔다.

액션 연기를 할 수도 있으니 현재의 몸 상태를 점검해 보기 위해서였다.

저녁 시간 다른 배우는 없었지만 언제나처럼 설아는 헬스장을 지키고 있었다.

민수는 그런 설아가 참 한결같다고 생각하며 헬스장으로 들어서다가 잠시 움찔하였다.

설아의 복장이 과하게 짧고 얇았기 때문이다.

다른 배우들도 없고 이곳에 올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그녀의 복장은 평소보다 더욱 간소했다.

하긴 어차피 이곳에 출입할 만한 사람은 여배우 세 명뿐이고, 자신이 이곳을 찾는 시간은 대부분 낮이었으니 그런 설아의 복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그냥 설아를 피해 나갈까 아니면 그냥 생각대로 들어가서 운동을 할지가 고민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민수의 고민을 덜어 주겠다는 듯 설아는 예리하게 민수의 등장을 포착했다.

“오! 민수 오빠. 이 시간에는 오랜만이네요.”

그녀는 민수가 반가운 듯 손을 들어 파닥파닥 흔들며 민수를 반겨 주었다.

그리고 민수의 행동이 조금 굳어 있는 것처럼 보이자 방실방실 웃으며 천천히 다가갔다.

“오랜만에 같이 운동하는데 조금 빡세게 가볼까요? 솔직히 소희 언니나 수연 언니는 제 운동량을 못 따라오거든요.”

“아…네…. 그래요 그럼.”

민수가 목소리가 조금 굳어 있고 어색해서일까.

설아는 조금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무언 가를 깨달은 듯 배시시 웃음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설아의 눈가에 장난기가 물들기 시작하자 민수는 아차 싶었다.

그냥 반응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야 이미 늦었다.

민수는 오늘 운동이 그리 편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한숨 지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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