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4
태준의 이야기를 듣고 민수에게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당황이었다.
전생을 경험했던 민수는 지금부터 한동안 중국 극장가에 다른 영화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자본의 대규모 투자,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배경, 게다가 주연 배우 중 한 명이 중국인인 트랜스포머는 그 내용과는 상관없이 중국에서 흥행에 성공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민수의 기억 속에서도 트랜스포머는 북미에서보다 중국에서 더 큰 흥행을 기록했었다.
할리우드 영화가 북미보다 중국에서 더 큰 수익을 내는 최초의 케이스가 된 트랜스포머는 중국 영화 시장이 얼마나 거대해 졌는지를 알리는 지표가 되었고, 동시에 할리우드 영화가 중국 현지화를 할 경우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되었다.
“음…. 과연 “용명”이 중국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시기에?
솔직히 좀 회의적인데.”
“우리야 솔직히 아니면 그만인데. 중국 쪽은 아니면 손해가 크잖아.
그쪽도 무슨 생각이 있으니 상영을 하는 거 아니겠어?”
“어떻게 되려나......”
민수의 예상대로 중국에서 트랜스포머의 인기는 대단했다.
개봉과 동시에 연일 매진 행진을 계속하며 첫 주에 관객 동원 신기록을 기록했고 그 열기는 다음 주까지 이어졌다.
북미와 한국에서는 자신들이 기대했던 트랜스포머가 아니었고 실망스러웠다는 평가와 함께 점점 열기가 식어가는 분위기였지만 중국 관객들은 그런 평가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개봉 후 2주.
트랜스포머의 열기에 묻혀 “용명”은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 “용명”이 상영한다는 사실이 중국에 알려지자 중국 관객들의 반응은 응? 왜? 였다.
“용의 울음”을 모르는 관객들은 응? 그게 무슨 영화인데? 차라리 그 자리에 트랜스포머를 넣는 게 좋을 텐데. 라고 생각했고 해적판으로 “용의 울음”을 접해서 영화를 아는 관객들은 그걸 왜 인제야 상영하냐? 이미 다 봤는데. 라고 반응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용명”을 반기는 관객들은 “용의 울음”을 봤음에도 다시 한번 극장에서 제대로 보고 싶어 하는 소수의 관객뿐이었다.
트랜스포머가 극장가의 이슈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용명”을 본 소수 관객의 평가는 빠르게 묻혔고 결국 2주 동안 “용명”은 전혀 날개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천루 내부에서는 트랜스포머의 흥행과 “용명”의 부진을 바라보며 “용명”을 내리고 그 자리에 트랜스포머를 채워 넣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티어즈 시네마의 사장 에드워드(중국인)는 처음 자신이 주장한 대로 트랜스포머가 내려올 때까지는 “용명”을 내릴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여러 각도에서 긴 논의가 진행된 끝에 천루의 회장도 에드워드의 손을 들어주었고 결국 어느 정도 손해를 보더라도 “용명”은 내리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 결과 극장가에서 2주면 충분히 영화가 내려가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용명”은 내려가지 않고 계속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었다.
“용명”이 중국에서 죽을 쑤고 있는 동안 한국에서는 설아의 차기작이 결정되었다.
설아에게 가장 먼저 접근했던 드라마 “미스 신데렐라” 의 “제니” 역이었는데 예전에 설아가 격렬하게 거부했던 바로 그 배역이었다.
태준과 민수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바꾼 설아는 태준의 뜻대로 작가님과 일대일 만남을 가지게 되었고 작가님에게 드라마 진행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들고 난 후 결국 출연을 승낙하게 된 것이다.
나중에 설아의 말을 들어보니 “제니” 역은 중 후반에 여주인공을 도와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므로 단순한 조연이 아니었고 그 점이 설아의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민수는 드라마 제목인 “미스 신데렐라” 의 이름을 듣고 문득 작년에 자신이 찍은 드라마의 경쟁작인 “신데렐라의 남자” 떠올랐다.
그리고 그 드라마는 전혀 빛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녀가 촬영하는 첫 드라마가 선전하기를 강하게 기원하였다.
설아까지 출연작을 확정 짓자 민수의 마음도 조금 조급해졌다.
9월과 10월쯤에 방영하는 드라마의 주연들이 다 결정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민수는 다음 차기작을 결국 액션 영화로 결정하였고, 자신에게 들어온 대본들을 전체적으로 다시 검토하고 있었다.
이왕에 액션을 다시 하기로 한 이상 무조건 흥행이 되어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빛내줄 영화를 선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번에 자신에게 들어온 영화 중에 전생에 크게 성공한 영화는 없었다.
오히려 촬영 중에 감독과 투자자와의 갈등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겪었다고 얼핏 전해 들은 그런 영화뿐이었다.
다음 작품을 무조건 성공하고 싶었던 민수의 고민은 점점 깊어 지기만 했다.
“용명”이 상영을 시작하고 2주가 지나고 트랜스포머의 열기가 빠져나가는 시점에서 “용명”의 관객 수가 갑자기 증가하기 시작했다.
극장가에서 트랜스포머의 이슈가 사라지자 “용명”을 보고 온 관객들의 감상이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용의 울음”을 본 사람들이면 영화를 보고 더 감동할 거라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관객이 증가하면서 평가 또한 늘어났고 좋은 평가가 또 다른 관객을 부르는 선순환이 계속 반복되며 3주 차 주말에는 결국 “용명”이 상영되는 모든 상영관이 매진되기에 이르렀다.
“용명”을 관람하고 나오는 관객들은 모두 하나 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한국에서 수입된 영화라고 들었는데 자신이 보고 나온 것은 영락없는 중국영화였기 때문이다.
중국 관객들은 트랜스포머처럼 중국 현지화를 시도하고 있는 영화가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타국인이 자신들의 언어로 영화를 찍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트랜스포머의 상영관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삼화도 “용명”의 관객 수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3주 차에 관객이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하고 인터넷에서도 “용명”의 이야기가 많이 나돌기 시작하자 트랜스포머의 자리에 “용명”을 끼워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국 내에서 “용명”의 스크린은 점점 늘어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이슈 역시 커져 나갔다.
“용명”의 가장 큰 이슈는 역시 언어였다.
타국인이 자신의 언어로 영화를 촬영하였다는 것.
한때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던 중국인들은 현재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에서 한발 물러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용명”의 존재는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워 주는 좋은 위안거리였다.
자신들에게 맞춰서 현지화한 트랜스포머에 그들이 열광한 이유와 그들이 “용명”에 큰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눈에 “용명”은 자신들에게 맞춰 현지화시킨 영화의 끝판왕이었다.
배경과 의상도 자신들의 전통에 맞춰져 있었고 황태자가 민중을 이끌어 개혁을 주도한다는 스토리의 흐름도 자신들에 취향에 맞는 데다가 마지막에는 영웅이 나라를 위해 장엄하게 목숨을 바치면서 큰 감동을 선사한다.
그런 영화가 심지어 자신들의 언어로 만들어졌으니 그들은 이 영화를 반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용명”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가면서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에 대한 관심 역시 커져만 갔다.
이미 중국에서 어느 정도 알려진 태준, 그리고 리온이 출연했던 “송포유”로 젊은 사람들에게만 조금 얼굴을 알린 민수와 수연.
그리고 이제 막 처음을 얼굴을 선보인 설아와 소희까지.
중국인들은 이제 이 배우들을 단순히 한국 배우로 생각하지 않았다.
지극히 자문화 중심주의에 물든 중국인들은 중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며 영화를 찍은 이 배우들을 반쯤은 중국 배우들과 마찬가지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민수에 대한 호감도는 가히 뜨거울 정도였다.
모든 사람에게 배척당하던 진이 나라를 위하여 천 명의 군사로 30만의 외적에 대적하는 영웅적인 행보(중국의 실정에 맞춰서 3만 명은 30만 명이 되었고 그에 맞춰서 CG 작업이 이루어졌다)를 보일 때는 보는 이의 가슴을 떨리게 하였고 전투에서 승리한 후 역적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영웅으로 죽어서 만족한다는 마지막 대사를 내뱉으며 눈을 감는 모습은 그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다.
특히 30만을 천 명으로 격파하고 장렬하게 전사한 진을 일부 중국인들이 “무신”이라고 부르며 감탄했으니 민수가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물론 그런 애칭은 민수가 아니라 진에게 국한된 것이긴 했지만 그것도 대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불붙기 시작한 “용명”의 인기는 이제 걷잡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용명”을 상영 중인 천루와 이제 상영을 시작한 삼화, 그리고 한 발 떨어져 있던 진룡까지 “용명”을 상영하기 위하여 삼화를 찾게 되었으니 이제는 중국 곳곳에서 “용명”을 상영하지 않는 곳은 찾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용명”이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인터넷에 “용명”에 대한 여러 가지 이슈가 불붙기 시작할 무렵 티어즈 시네마 사장실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자가 찾아와 사장인 에드워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헤이, 에드워드. 정말 이럴 거야?
도대체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왜 이런 배우를 나에게 소개해 주지 않은 거야?”
티어즈 시네마의 사장인 에드워드는 유학 시절 깊은 친분을 나누었고 지금은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거장 중 한 명인 에릭 존스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에릭, 미안하지만 그 배우는 중국 배우가 아니야.
난 그런 배우가 있었는지도 몰랐고, 그러니 당연히 소개해줄 수도 없었지. 내 말 이해해?”
“What? 그게 무슨 소리야. 이렇게 중국어로 연기하고 있는데 중국 배우가 아니라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에릭. 그 배우는 한국 배우라고 자네가 지금 보고 있는 그 영화도 한국 영화고.”
“하…. 그게 도대체 무슨…..”
액션 영화의 거장 중 한 명인 에릭 존스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에드워드의 요청으로 중국에 머물고 있었다.
에드워드의 목표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액션 영화를 중국인들의 취향에 맞게 중국인 배우로 촬영하는 것이었다.
이는 천루가 자국 영화의 경쟁력을 높이려는 방안으로 가장 영화 산업이 발달한 할리우드의 촬영 방식을 자신들의 실정이 맞춰서 변형 적용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많은 감독이 거절하고 유일하게 에릭만이 에드워드와의 친분 때문에 중국행을 선택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을 위해 친히 중국으로 들어온 에릭을 위하여 가능한 한 모든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편의에는 영화 촬영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다는 것과 에릭이 원한다면 어떤 배우라도 섭외해 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에릭은 오자마자 자신의 액션에 어울릴 만한 중국 배우를 찾아 나섰고 중국에서 이름난 액션 배우들 모두의 메이킹 영상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에릭의 마음에 차는 사람은 없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지 못한 에릭은 이대로 가다가는 배우들에게 액션까지 따로 가르쳐야 할 위기에 처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에릭의 눈에 들어온 영화가 바로 “용명”이었다.
에릭이 “용명”을 접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뒤숭숭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거리를 돌아다니던 에릭의 발걸음이 문득 어떤 극장 앞에 이르렀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예매한 중국 영화가 “용명”이었다.
자신은 개 망작이라고 생각했던 트랜스포머가 중국에서 역대 최고급 흥행을 기록하는 것을 보며 중국 관객들의 수준을 의심하고 있던 에릭은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예매한 “용명”이 생각보다 인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자 처음에는 영화를 보지 않고 그냥 나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도 중국 관객들의 취향에 맞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인기 있는 중국 영화의 성향도 확인할 겸 그냥 앉아 있었는데 이 영화는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영화였다.
에릭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화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 그의 눈에는 배우들의 액션 연기가 더 선명하게 들어왔다.
특히 한 배우의 액션은 거장이라고 불리는 자신조차 놀랄 정도였다.
더 많이 알수록 더 잘 보인다고 액션 분야에 오래 몸담고 있던 에릭은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더 다양하게 볼 수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민수의 액션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영화가 끝난 후 에릭은 흥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놈이다. 이놈이면 자신의 현실적이면서 과격한 액션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
그 길로 에릭은 바로 에드워드를 찾아왔다.
에드워드를 찾아오면서 에릭은 조금 화가 났다.
분명 중국의 모든 액션 배우의 영상을 달라고 했는데 방금 이 배우의 영상이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드워드에게 소리를 친 거였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배우가 중국 배우가 아니라니.
분명 중국어로 연기하고 있었는데 중국 배우가 아니라고?
그럼 이놈은 대체 뭐야?
에릭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