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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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준이 와서 분위기가 바뀌자 민수는 쾌재를 부르며 태준을 반겼다.
“아, 윤 배우. “일리걸”찍기로 했다면서 축하해.”
“오, 땡큐. 그나저나 우리 못난이 동생님은 왜 또 저렇게 뾰족해?
난 또 무슨 고슴도치인 줄.
아~ 오늘 오디션에서 시원하게 물먹은 거 때문에 그런가?
오디션에서 물 좀 먹었다고 그렇게 사방을 찔러대고 있으면 곤란하지 않겠니?
큭큭, 동생아. 제발 좀 정신 차리고 분발하렴.”
민수의 눈에는 주연을 확정 짓고 당당하게 설아를 놀리는 태준의 모습이 제법 위엄차 보였는데 왠지 등 뒤로 후광이 비추는 거 같았다.
설아는 그런 태준이 못마땅한 듯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내밀었다.
“그래도 그나마 그게 괜찮아 보였단 말이에요.
이거 떨어졌으니 이제 뭘 해야 할지…..”
설아의 투정에 태준은 오늘 설아가 오디션 본 드라마의 대본을 훑어보았다.
그렇게 잠시 대본을 살펴본 태준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설아를 바라보았다.
“야. 설마 이거 봉순 역을 오디션 본건 아니겠지?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
네가 생각이 있으면 이건 아닐 거야? 그렇지?”
태준의 말에 설아가 슬며시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니 봉순 역이 맞나 보다.
그런 설아의 모습을 본 태준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야. 이거 주연이 주진이잖아?
그런데 네가 봉순이로 나오면 그게 뭐가 되겠냐?
그야말로 춘향전에서 춘향이 보다 향단이한테 눈이 더 가는 그런 웃긴 상황이 되지 않겠니?
우리 못난이 동생님아?”
배우 주진이는 수연과 같은 청순한 스타일의 단아한 미녀 배우였다.
물론 그녀의 외모가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스타일상 그녀와 설아가 함께 나온다면 설아에게 시선이 먼저 향할 것이다.
주진이 주연에 봉순이가 나오는 드라마라.
설아와 태준의 대화를 듣다 보니 민수도 설아가 오디션을 보고 온 드라마가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 드라마는 올가을부터 방영된 후 대박을 터트리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무난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민수가 기억하기론 저 봉순이란 배역은 어떤 개그우먼이 연기했었다.
그녀는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극에 잘 묻어 들어서 오히려 더 좋은 평을 받았었다.
솔직히 민수가 생각해봐도 태준의 말대로 그 자리에 설아가 있는 건 그냥 설정파괴였다.
한껏 핀잔을 준 태준은 이번에는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봐요. 동생님.
그냥 이번에는 동생님한테 들어온 거 하세요.
도대체 왜 그렇게 불만인 거야?
어디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자.”
태준의 말에 설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 이 배역은 너무 들러리 같은 느낌이에요.
물론 봉순이도 들러리긴 한데 가끔은 진지하기도 하고 그리고 코믹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줄 순 있잖아요.
하지만 이건…… 그냥 드라마를 꾸며주는 꽃 병풍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예쁜 모습만 모여주고 잘난 척만 하고 끝이잖아요.
물론 초반부 대본이니 뒤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 분위기는 그런걸요.
그리고 너무 예쁜 척하는 거 같아서 바로 비호감으로 찍힐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좀 그래요.”
설아가 말을 마치자 태준은 설아의 말을 간단하게 정리하면서 그녀의 의사를 재차 확인했다.
“그러니까, 들러리인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딱히 연기력을 보여 줄 만한 요소도 없고 그냥 끝까지 예쁘게만 나와서 사람들의 빈축을 살수도 있으니 불안하다. 이거네?”
태준의 말에 설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민수는 태준과 설아가 대화를 하는 동안 조용히 설아의 대본을 살펴보았다.
원래 민수는 다른 배우들의 배역에 가능하면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배우들이 흥행작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가능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촬영하길 바라서였다.
물론 저번에 태준이 “별당신”을 차버리고 다른 영화를 찍으려고 하는 것처럼 전생과 너무 다른 경로로 간다면 한 번쯤 말려 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간섭은 불필요하다는 것이 민수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그래서 설아에게 캐스팅이 들어온 드라마도 어떤 드라마인지 전혀 확인하지 않았다.
그런데 설아의 말을 들어보니 조금 호기심이 생겼다.
무슨 배역이길래 저렇게 강하게 거부하는 걸까.
민수가 대본을 살펴보는 사이.
태준은 설아에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동생아.
그건 네 생각이 너무 짧은 거야.
잘 들어봐.
이 배역이 설정으로도 굉장한 미녀라고 설명하고 있고 대사 하나하나가 기본적으로 예쁜 척과 잘난 척으로 도배가 되어있지.
한마디로 이 배역은 예쁜 척하는 진짜 예쁜 애라고 정의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 배역이야말로 진짜 연기 잘하는 배우가 필요한 거야.
솔직히 말해서 예쁜 애가 자기가 예쁜 걸 알고 예쁜 척하는 걸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기본적으로 좀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잖아.
그런데 그렇게 연기하는 거야 누가 못하겠어?
그냥 대충 잘난 척만 해도 재수 없어 보일 텐데.
그럼 당연히 네 말대로 캐릭터가 너무 밉상으로 돌아서고 별로 좋지 않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이 캐릭터는 연기만 절묘하게 잘하면 진짜 멋있는 캐릭터가 될 수 있어.
네가 지적하는 예쁜 척하고 잘난 척을 빼고 저 캐릭터를 봐.
대사를 내보내는 상황과 이 캐릭터의 대사.
이건 분명 조언이고 주인공을 도와주는 거야.
이게 후반에는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초반에는 이 캐릭터가 여주인공을 도와주는 확실한 도우미 위치라는 거지.
물론 그 조언조차도 잘난 척이라서 잘 눈에 들어오지 않지?
대사 내용이 워낙 거만하고 대사 중에 잘난 척이 섞여 있어서 그렇지 정말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딱 알맞은 조언이거든.
자,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연기해야 하겠어?
이건 잘난 척 예쁜 척을 하면서도 미움받지 않게 연기해야 하는 거야.
이 배역을 연기한 후에 “와, 좀 얄밉긴 한데 이상하게 그렇게 막 싫지는 않고, 왠지 좀 귀여운데” 이런 말을 들으면 대성공인 거지.
이제 이게 얼마나 어려운 연기인지 이해하겠어?”
설아는 태준의 말을 듣고 조금 묘한 표정으로 대본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처럼 보였다.
대본을 읽어보던 민수도 내심 놀라고 있었다.
우선 자신이 아는 드라마가 아니었다.
작가의 이름도 생소한 것이 그렇게 유명해지는 분은 아닌가 보다.
그런데 대본은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다.
그리고 태준이 말한 대로 설아에게 들어온 배역인 “제니”는 확실히 작가가 힘을 준 캐릭터처럼 보였다.
등장하는 씬 자체는 그렇게 많지 않아서 평범한 조연이라고 생각하기 쉬웠지만 등장하는 장면, 장면이 다 중요한 씬 뿐이었고, 심지어 가끔 “제니”가 나와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환기하고 있었다.
민수는 작가가 대놓고 씬 스틸러로 만들어 놓은 조연을 보고 병풍 같다고 말한 설아에게 조금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 배우가 외모와 연기력, 가창력 인맥까지 모두 갖춘 대신에 대본 보는 눈을 가지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전생에도 연기를 기막히게 잘하는데도 꼭 작품이 망해서 못 뜨는 배우들이 있었는데 그런 배우들을 이 바닥에서는 해태 눈이라고 불렀다.
해태 눈으로 연예계에서 살아남는 배우들은 정말 인간성이 좋고 연기를 엄청나게 잘하는 배우들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배우들에게 있어 이 해태 눈 배우는 같은 작품을 하기에는 왠지 좀 불안하면서도 꼭 한 번쯤은 같이 연기해 보고 싶은 상대였으니 참 아이러니했다.
민수는 이번 일로 설아가 해태 눈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 짓고 다음부터는 작품을 선택할 때 꼭 조언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해태 눈은 경험으로 충분히 고칠 수 있는 것이었으니 설아가 작품 보는 눈을 키울 때까지는 민수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건 정말 작가님이 힘줘서 만든 캐릭터네요.
설아 씨. 혹시 작가님 만나 보셨나요?”
민수까지 나서서 그렇게 말하자 설아는 조금 혼란스러워하며 대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요. 할 생각이 없어서 만나보지는 않았죠.”
“거절은 확실히 드린 거고요?”
“네, 못할 거 같다고….. 아마 소속사 통해서 연락이 갔을 거예요.”
“거절한 후에는 그쪽에서 별말 없데요?”
“그건…..”
아무래도 그 뒷이야기까지는 설아도 잘 모르나 보다.
설아가 얼버무리고 있는데 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내가 알지. 내가 오늘 이거 때문에 소속사로 나온 거야.
그쪽 작가님이 설아랑 자리를 좀 만들어 달라네.
아는 선배 쪽으로 연락이 왔어.
사적으로 자리를 꼭 한번 보고 싶다고.
제작사는 웬만하면 다른 배우를 쓰자고 하는데 작가님은 꼭 설아를 쓰고 싶다 나봐.
그러니 동생님.
작가님을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사적으로 작가가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말에 설아도 조금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작가가 설아에게 꽂힌 거 같은데 저러면 정말 가벼운 배역이 아닐 것이다.
“이거 제가 보기에는 “서쪽 해변”에 윤 진만큼 어렵고 작가님이 신경 쓴 캐릭터 같아요.
게다가 연기만 잘하면 완전 씬 스틸러고요.
그러니 한번 작가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내 말대로 예쁜 애가 진짜 예쁜 척하는데도 밉지 않게 연기할 수 있으면 네 연기력은 완전히 인정받을걸.”
태준에 민수까지 그렇게 말하자 설아는 자신의 안목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태준의 말대로 예쁜 척을 하는데도 밉상이 아니라 귀엽다는 느낌을 주는 건 확실히 어려운 연기였다.
설아가 연기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을 때 민수는 태준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관하여 묻고 있었다.
“영화 크랭크인은 늦가을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럼 여름 동안은 일정이 비는데 뭘 할 생각이야?”
“아….. 뭐…… 이 기회에 여행이나 한번 가볼까 생각 중이야.
가능하면 해외로 말이야.
한국에서는 솔직히 어디 돌아다니기 힘들잖아.”
민수는 태준이 해외로 나가겠다고 하자 조금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차기작 때문에 계속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해외로 나가서 쉬겠다니.
아무리 민수라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행가는 태준을 보며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민수가 태준을 그만큼 가깝게 생각하기 때문이겠지만 가까운 건 가까운 거고 얄미운 건 얄미운 거였다.
게다가 민수는 태준이 해외에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는데 자신의 전 재산을 다 걸 수 있었다.
“아… 해외.
수연 선배도 분명 겨울에 촬영 들어가는 거였지?
그러면 같이 가겠네.”
민수가 너무 자연스럽게 말을 해서일까.
태준은 아무런 생각 없이 민수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고 말았다.
“아, 뭐 그렇지. 수ㅇ.....”
태준이 아무 생각 없이 말하다 움찔하며 말을 멈추자 연기에 대하여 고민하던 설 아가 태세를 바꾸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수연 언니랑 단둘이 해외가 놀러 간다고?! 오라버니 미쳤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수연이는 바빠서 못 간다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어.”
“오라버니. 앞에 말이랑 이어지지 않잖아요.
같이 가겠네. 아 뭐 그렇지. 수연이는 바빠서 못 가.
이건 대체 어느 나라 말이죠?
한쿡말 몰라효?”
설아의 공격에 태준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저 바보는 아직도 우리가 그들의 연애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하나 본데 어쨌든, 설아에게 공격당하는 태준을 보니 기분이 좀 풀리는 거 같았다.
그리고 민수는 이래서 태준과 설 아가 그렇게 사람들에게 말장난을 걸고 핀잔을 주는구나 싶었다.
재미가 아주 쏠쏠한 것이 중독될 것 같은 즐거움이었다.
설아도 아주 태준을 KO 시킬 생각은 없었는지 적당히 밀어붙이다가 넘어갔다.
아마 설아의 마음속에는 이 재미있는 걸 겨우 한두 번만 써먹고 넘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한참 진땀을 뺀 후 한숨을 쉬고 있던 태준의 전화기가 울리고, 잠시 통화를 하고 돌아온 태준은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아쉬운 것 같기도 한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우리 영화 지금 바로 중국에서 개봉한다네.”
“어? 벌써? 트랜스포머 때문에 안되는 거 아니었어?”
“그럼 우리 바보 오라버니 밀월여행은요?”
“뭐….. 그거야 쫑이지. 앞으로 어떤 스케줄이 잡힐지 알 수가 없으니까.”
대답하는 태준의 표정은 조금 허탈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