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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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미팅이 끝나고 며칠 뒤, 스케줄이 없는 날.
민수의 또 다른 팬 미팅이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개최되었다.
참가인원은 [민수네]의 원로 회원이자 “힐링 멘토”의 구성원인 어르신들 약 스무 분 정도였다.
조윤희 선생님을 필두로 한 이분들은 “힐링 멘토”에서 여러 가지 세상 사는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던 일명 인터넷 친구였는데 민수의 팬 미팅을 계기로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 안면이 없어서 그런지 다소 서먹한 느낌이었지만 “힐링 멘토”에서 나왔던 공통 관심사가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하면서 금방 분위기가 좋아졌다.
그리고 서로 분위기가 풀리자 하나둘씩 무리를 지어 세상 사는 이야기와 근심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는데 결국 팬 미팅으로 시작했던 모임은 서로 친구들끼리 근심을 나누는 동창회 같은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민수는 결국 어른들의 동창회나 등산회에 끼어든 젊은 청년 같은 입장이 되었지만, 어르신들이 서로 마음을 나누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민수의 테이블에는 조윤희와 이 음식점의 사장인 천주호, 그리고 팬 클럽 회장이자 민수의 코디네이터인 조수정이 앉아 있었다.
“민수 씨. 이거 미안해요….. 팬 미팅을 하자고 해놓고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네요.”
기껏 민수를 불러 놓고 자기네들끼리 노는 형태가 되어버리자 윤희는 민수에게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반면 민수는 그런 윤희의 모습을 보며 그냥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에이…. 선생님도 참…..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그냥 이렇게 한번 서로 얼굴을 보고 회포를 푸는 게 중요한 거죠.
솔직히 예전에 선생님께서 저희 촬영장에 오셨을 때요.
그때를 생각해 보면 이런 분위기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요?”
민수의 말에 윤희는 몇 명의 회원들과 도시락을 준비해 촬영장에 갔다가 민수의 얼굴을 보고 격려해 준 것은 좋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조진성과 윤강철의 사인만 받고 돌아왔던 것이 떠올라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 그 일은…”
“에이, 원래 어르신들이 저를 팬심으로 좋아하시는 게 아니라 음…. 그래.
아들이나 손자, 어쩌면 동네 아는 친구 아들이나 손자 또는 아들 친구 이런 식으로 친한 사람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좋아하시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그런 어른들이 모이면 아마 이런 식으로 흘러갈 거라고 반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자리 마련한 것이기도 하고요.
솔직히 보기 좋네요.
어른들이 좋아하시는 거 같아서요.”
민수는 정말로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노년에 “힐링 멘토”에 접속할 정도로 정서적인 불안감을 안고 사시는 어르신들은 대부분 외로운 분들이셨다.
민수는 그런 어르신들을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말년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분들이 서로서로 의지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를 바랐다.
원래 처음 안면을 트기가 어렵지 이렇게 한번 만나고 나면 다음 기회를 만들기는 더 쉬웠다.
민수의 바람은 오늘을 계기로 이 어르신들이 더 자주 만나 서로의 정을 나누는 것이었다.
원래 “힐링 멘토”라는 커뮤니티의 목적이 그것이 아니겠는가.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어르신들도 민수를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닌지 한 분씩 번갈아 가며 민수가 있는 테이블로 와 술을 한잔 건네며 격려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돌아가셨다.
민수가 겪은 여러 가지 일들을 이야기하며 너무 모나게 살면 안 되고 인기가 갑자기 올라가도 항상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그런 충고부터 일이 많아져도 건강은 먼저 챙겨야 한다는 걱정까지, 민수의 부모님이 살아 계셨으면 민수에게 해줬을 만한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민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웃으면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다.
모임이 끝나고 계산을 할 필요가 없다는 천주호 사장님의 말에 고개를 저은 민수는 당당하게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민수의 태도가 워낙 완강해서 천주호 사장도 민수의 카드를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고 한우로 대접했기 때문에 가격은 만만치가 않았다.
아직 영화와 관련된 스케줄에 대한 정산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민수의 카드도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따로 돈 쓸 곳도 없었던 민수에게 어르신들을 대접하는 것은 마음이 푸근해지는 일이었다.
민수가 이런저런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을 때 태준과 수연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설아와 소희는 세 배우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자 조금 한가해지는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세 배우에게 시선이 더 끌리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아직은 들러리 입장밖에 못 되지만 이제 두고 봐요!”
설아는 소희의 손을 꽉 잡고 태준에게 투덜거렸고 태준은 그런 설아를 보며 넌 아직 멀었으니 한창 분발해야 할 때라고 놀리다가 옆구리를 얻어맞고 도망쳤다.
민수는 그 모습을 보며 요즘 들어서 왠지 태준의 분위기가 점점 더 유쾌해지고 가벼워지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태준과 수연은 CF 촬영은 최소화하고 예능에 나서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민수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수연뿐만 아니라 태준까지 예능에 나가 제 몫을 다 하다니, 민수는 이제 예능 고자는 자신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아 조금 씁쓸하기도 했고, 왠지 모를 위기감도 들었다.
특히 태준이 예능에서 자신과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사람들을 웃음 짓게 할 때는 자신에게 예능감이 없다는 것이 조금 억울하기까지 했다.
한편, 태준과 수연이 찍은 CF는 둘이 같이 찍은 가전제품 CF 하나와 태준은 남성복 한 가지, 수연은 아파트 CF 한가지뿐이었다.
횟수를 최소화한 덕분에 단가는 거의 최고가로 받을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수연이 거절한 모 화장품 CF는 우리나라 톱스타들만 찍던 CF이다 보니 그녀가 거절한 이유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대충 서로 스케줄을 다 소화하고 모인 날, 서로가 스케줄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CF 이야기가 나왔을 때 수연은 인상을 쓰며 거절의 이유를 직접 밝혔다.
“아니 망할 놈들이 CF 하나 찍는데 별별 제한을 다 걸어대길래 짜증 나서 그냥 안 한다고 했어.”
품위유지, 체중 관리, 연애 금지 등등.
제품의 품격을 지킨다는 목적하에 계약 기간 중 그녀에게 지켜주길 원하는 조건이 제법 많다 보니 너무 성가셔서 거절했다는 것이 수연의 대답이었다.
수연의 설명에 민수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단가가 매우 높고 유명한 회사의 고급 제품일수록 계약 기간 중에 광고 모델에게 특정 이미지를 유지하길 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제품은 최고급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요구조건이 많았나 보다.
“후훗…. 연애 금지 조항 때문이지.”
민수는 설아가 옆에서 혼자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서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민수도 태준과 수연의 연애를 기정사실로 하고 있었다.
설아의 말을 들은 후에 자세히 살펴보니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련함에서 애틋함과 따듯함으로 바뀌었으니 민수 입장에서는 못 알아채기가 더 힘들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밝히기 전에 굳이 아는 척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냥 웃으며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태준과 수연이 CF를 조금만 찍은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아마 저 둘은 자신들의 연애가 공개될 때를 대비해 모델의 이미지 유지조항이 있는 모든 CF를 거절한 것 같았다.
둘이 같이 부부로 나오는 가전제품 광고, 그리고 가정주부로 나오는 아파트 광고는 공개 연애를 할 경우에도 이미지를 실추시키지 않으니 그것만 남은 것이 아닐까?
민수는 자신의 예상일 뿐이었지만 왠지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1800만 돌파…..”
민수가 자신의 연애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태준은 “용의 울음”의 관객 수가 1800만을 넘어섰다는 기사를 보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기사에서는 이대로 계속 가면 2000만이 넘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네….. 2000만이라……
진짜 가는 건가?
생각도 못 했는데……
한국 최초의 2000만 영화는 딱 윤태준 단독주연의 영화가 되어야 했는데 아쉽단 말이야.
그러면 온 대한민국 사람들이 이 윤태준이를 열광할 텐데…. 이거야 원.
아버지한테 묻어가는 꼴이라니.”
태준은 영화가 2000만에 다가가고 있다는 기사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짓다가 마지막에는 건방지게 웃으며 단독주연으로 스포트라이트를 혼자 받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 너스레를 떨었다.
태준의 말에 일행들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 있자 태준은 건방진 표정으로 자신만의 시나리오를 써 나갔다.
“이번에 딱 1900만 정도 기록하는 거야.
그리고 다음 영화에 이 윤태준이 단독 주연으로 2000만을 때리는 거지.
그러면 내가 한국 최고의 배우라고 사람들이 추켜세우지 않겠어?”
“또 이분이 아주 혼자 김칫국을 드링킹하고 계시네.”
“우리 바보 오라버니 단독주연이면 기껏해야 1000만이 한계일걸요.
주제를 아세요. 오라버니.”
소희는 건방진 표정의 태준과 그를 타박하는 수연, 설아를 보면서 이분들이 원래 이렇게 노냐고 묻는듯한 얼굴로 민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희는 소속사에 들어온 직후에는 연습에 바빴고, 이후에는 영화 촬영장에서 거의 여자들이랑만 어울려서 태준이 얼마나 쓸데없는 소리를 잘하는지 몰랐으니, 이런 실없는 소리를 할 때마다 당황스럽긴 할 것이다.
소희의 머릿속에서 태준은 그야말로 톱스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식구가 되었으니 태준의 실체를 깨닫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다.
밖에서는 톱스타지만 식구들 사이에서는 전반적으로 유쾌하고 밝은 분위기 메이커라는 것을 말이다.
“혼자서 2000만이라…..”
조금 당황하는 소희의 모습을 뒤로하고 민수는 전생에서 태준의 흥행기록에 대하여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도 태준이 혼자서 단독주연으로 2000만을 기록한 적은 없었던 거 같았다.
물론 여러 주연 배우들의 힘으로 결국 2000만 영화를 찍기는 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용의 울음”은 전생에서는 존재하지 않은 영화였기 때문에 민수도 관객 수를 예측하기는 힘들었다.
“어쨌든 우리 여배우님들의 비키니 준비는 순조로우신지?
우리 진짜 2000만 갈 기세라서 준비해야 할 거 같은데…..”
자신의 공약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태준은 역시 뻔뻔했다.
“끄득… 바보 오라버니나 딱 붙는 삼각 입을 준비 단단히 하세요.
얼렁뚱땅 트렁크나 이딴 거 입으면 제가 찢어 버릴 거니까요.”
설아의 분위기를 볼 때 태준은 무조건 딱 붙는 삼각이 확정이었다.
민수가 생각하기에 설아의 저 표정은 100% 진심이 확실했다.
솔직히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태준도 조금 난감한 입장이었다.
분명 그냥 한 소리였고, 2000만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가시권에 들어와 버리다니.
여자들 비키니도 그렇지만 자신의 삼각 수영복도 문제긴 문제였다.
“후….. 운동을 해야겠군.
그래도 배우인데 추한 모습을 보일 순 없지.”
“흥. 오라버니가 아무리 해 봤자.
상대가 민수 오빠라면 오라버니에게 남은 건 굴욕뿐이에요.”
설아의 말에 태준이 끙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젠장…..”
그리고 태준이 절망에 찬 욕설을 내뱉을 때 수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준이도 나쁘지 않을 텐데…..”
왠지 윤 엔터의 배우들 사이에서는 역사적인 첫 2000만 영화가 탄생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비키니나 수영복을 입는 것이 더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하….. 이분들 정말 왜 이러시는 건지…..
정말 역사상 첫 번째 2000만 영화가 될지 안 될지 긴장되는 순간인데, 그깟 수영복으로 다투고 계시다니….”
그나마 윤 엔터에도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배우가 한 명은 있었나 보다.
“소희야. 우리가 긴장할 게 뭐 있어.
어차피 넘으면 넘는 거고 못 넘으면 못 넘는 거지.
넘으면 기록 세워서 좋은 거고, 못 넘으면 비키니 입지 않아서 좋은 거고.
둘 다 좋은 거니 그냥 마음 편하게 있자고.”
수연의 말에 소희도 할 말을 잃었다.
처음에는 이런 역사적인 순간에 겨우 수영복 때문에 싸우는 것이 어이없었는데 생각해보니 이들의 대범한 태도가 너무 멋있게 느껴졌다.
자신은 조연에 불과하지만 요즘 밤마다 조마조마해서 잠을 못 자는데 주연 배우가 포함된 저 넷은 그냥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가 않았다.
어쩌면 방금 태준이 한 말처럼 이번이 아니라도 다음에 넘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소희는 정말 자신이 배워야 하는 것은 저런 대범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저런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으면 자신의 소심한 태도도 점점 나아질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소희는 오늘부터 저 배우들의 생활 태도부터 하나하나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