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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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아의 말에 태준은 잠시 인상을 쓰고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을 본 수연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저 바보가 지금,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어.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배가 불러도 참 저렇게 부를 수가 있는지.
저 바보 말이 이 영화 흥행이 자신의 것 같지가 않데.
주연은 자기지만 두 선생님한테 업혀 왔다는 거지.
그러니 영화가 흥행해도 별로 감흥이 없는 거고.
물론 시작부터 두 선생님의 은퇴 작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상황이었고, 두 분이 중심을 잘 잡아 줘서 영화에 깊이가 더해진 건 맞지만 이게 그렇게 생각할 일인가?
태준이랑 민수도 주연으로서 자신의 연기를 충분히 보여 준거잖아.
이건 대체 무슨 일인지….”
민수는 수연의 말을 듣고 태준의 생각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이 그랬으니 따로 이해할 것도 없었다.
처음 시사회 때 관객 앞에서 인사를 건넬 때는 마냥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영화는 훌륭했고, 반응은 좋았으니까.
그때 민수는 이 영화의 주연배우로써 큰 자부심을 느꼈다.
물론 그 자부심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영광이 자신의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조금 생각이 달랐다.
민수는 관객 수가 늘어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이 남긴 평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곤 했다.
많은 사람이 영화를 극찬했고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하곤 했다.
초반에는 자신의 액션을 칭찬하는 사람들, 그리고 강철과 진성의 연기에 밀리지 않은 연기를 보여준 태준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영화를 다시 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고 그렇게 영화를 다시 보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스토리 흐름보다는 배우들의 연기 자체에 더 집중해서 보곤 했다.
스토리를 알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이 보이는 그들은 태준과 민수보다는 강철과 진성의 연기에서 더 큰 여운을 느낀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글들을 보며 민수는 자신이 시사회 때 본 영화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물론 모든 배우가 연기를 잘했다.
하지만 인상 깊고 여운이 남은 연기를 한 것은 결국 강철과 진성이었다.
주연과 조연이었다.
민수에게는 주연으로서 마지막에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만한 장면들이 즐비했다.
태준도 마찬가지로 양 진영을 오가면서 상황에 따라 다른 연기를 보여주며 충분히 임팩트 있는 연기를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두 주연의 연기가 조연들의 깊이 있는 연기를 따라가지는 못한 것이다.
물론 조연들과 주연들의 연기가 한데 어우러지면서 시너지를 냈고, 서로 대등한 연기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영화가 흥행하고 있는 건 맞았다.
그러니 영화의 주연으로서 영화의 흥행과 영광을 같이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것이다.
다만 문제는 자신의 만족감이었다.
민수는 지금 자신이 보여준 연기보다 더 과하게 극찬받는 이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촬영할 때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연기가 영화를 보고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씩 부족한 부분이 보였다.
만약 다음에 이런 기회가 있다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지금 이런 생각을 해 봤자 앞으로는 이런 기회가 없었다.
두 선생님은 이제 은퇴를 해버렸으니까.
민수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자 흥행과 성공에 대한 기쁨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결국 그런 기쁨이 다 사그라진 것이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그러니 민수가 미지근해 보이는 건 당연했다.
엄청난 인기와 요청에도 스케줄 소화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처박혀서 요리 연습이나 하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사실 별로 감흥도 들지 않고 내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하….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나 진성 선생님께 우리가 업혀 간 게 맞아.
연기할 때는 잘 몰랐어.
그때는 내 것 연기하기에도 벅찼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상영 초반에도 몰랐어.
사람들이 윤태준의 연기가 윤강철에 버금간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기분이 좋을 뿐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알겠더라고, 사람들이 비슷하다고 평가했던 내 연기와 아버지나 선생님의 연기가 얼마나 다른지 말이야.
그러니 결국 내가 일궈낸 관객이 아니라는 생각만 들고, 그런 생각이 드니 2천만 관객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조금 마음이 뒤숭숭해.”
태준의 마음도 민수와 같았다.
그 당시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 연기가 지금 생각해보니 부족함이 느껴지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태준의 문제도 만족감이었다.
그 역시 자신의 연기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고 흥행에 무감각해진 것이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역시 만족이 안 된다고 해야 할까요.
많이 아쉬워서 흥행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도 그렇게 마음에 와닿지 않아요.”
태준과 민수의 말을 들은 설아는 그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니 솔직히 조금 어이가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자신의 오빠는 원래 그런 종자이긴 했다.
스스로 만족하는 완벽한 연기를 못하면 잠을 자지 못하는 그런 부류.
그렇게 보면 참 아버지랑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아가 기억하기로 아버지도 자신이 출연한 작품을 보며 마음에 안 든다고 어머니에게 하소연하고 심지어는 한숨을 푹푹 쉬는 그런 모습을 종종 보이시곤 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들고 안 들고에 기준은 철저히 자신이었고 영화나 드라마에 흥행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오빠는 원래 그런 인간이라고 쳐도 민수까지 그런 종자였다니.
흥행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연기가 마음에 들어야 하는 그런 사람.
연습할 때부터 연기를 대하는 민수의 태도가 워낙 진지했기 때문에 설마 했었는데 그게 이런 방식으로 드러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연기를 대하는 이런 태도가 저들이 지금 나이대를 뛰어넘는 연기력을 가지게 된 이유였으니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그들의 향상심이 조금 존경스럽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저런 모습을 보이는 둘이 얄밉기만 했지만 말이다.
“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흥행과는 상관없이 그냥 자신의 연기가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네요.
그래서 기분이 별로라는 건데…..
이걸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건방지다고 해야 할까요?”
설아의 말에 수연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 정확한 표현이네. 건방지다는 말이…..”
젊은 배우 중 가장 늦게 들어와서 둘의 성향을 잘 몰랐던 소희는 두 배우의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로서는 이 상황에서 저런 생각을 하는 둘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말이에요.
만족스럽지 않아서 흥행에 무감각하다는 말이요.
지금도 많은 배우가 기회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텐데 그건 너무 오만한 말 같아요.
그리고 그분들은 그야말로 연기에 온 인생을 투자하신 분들이잖아요.
아직 그분들의 수준을 논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적어도 그분들만큼 경력을 쌓은 후에, 그때나 생각할 수 있는 문제 같아요.”
소희의 말은 민수의 마음속을 그대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이제 겨우 드라마 한편과 영화 한 편을 출연한 신인일 뿐이었다.
민수가 생각하기에 지금 자신은 자신의 위치를 잊은 것 같았다.
주변에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 즐비하고 그들이 자신을 연기를 인정해 주니 그야말로 건방이 든 것이다.
자신은 태준과는 또 달랐다.
태준은 나이가 어리지만 이미 정점에 오른 배우였지만 자신은 전혀 아니었다.
그녀의 말대로 아직 그런 것을 논할 위치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초심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조연조차 맡지 못해서 빌빌거리던 주제에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자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 했던 것들이 너무나도 웃겼다.
소희의 말대로 전생의 자신처럼 기회를 잡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배우들은 지금도 세고 셌다.
자신은 운 좋게 그 기회를 잡은 것뿐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더 나아갈 때였다.
순간 모든 미망이 사라지며 영화가 흥행하고 찬사를 받을수록 찝찝했던 그 마음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민수의 표정이 변하자 수연의 얼굴이 밝아 졌다.
“캬~ 우리 소희.
내가 못 해준 말을 아주 정확하게 해주는구나.
이래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우릴 봐줄 사람이 필요하다니까.
역시 이럴 때는 그냥 돌직구를 날려야 정신을 차리나 봐.
둘 다 소희한테 얻어맞고 정신을 좀 차린 거 같네.
나도 태준이한테 그렇게 말할 걸 그랬나.
네가 지금 선생님의 연기를 논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
건방 떨지 말고 더 정진해.
그리고 사람들이 좋아해 주면 감사해할 줄 알아라.
건방진 놈아!
사람들이 원하지 않으면 넌 그냥 잘생긴 바보 청년 A에 불과해!
이런 식으로 말이야.”
수연의 말에 설아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냥 좀 잘생긴 바보 청년 A라는 말이 너무나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러지 그랬어요. 언니. 저 바보 오빠가 그래도 주제는 알아야 하잖아요.”
설아의 말에 수연은 한숨을 푹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나까지 그럴 순 없지.
저 인간이 연기를 생각하는 마음이 어떤지 어려서부터 봐와서 잘 알거든.
그리고 선생님이랑 연기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잘 알고.
선생님이 완전히 은퇴한다는 말이 실감 나서 더 저러는 건데 내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어?
그래서 오냐오냐했더니 저게 계속 정신을 못 차리잖아.
그러니 이제 정신 좀 차려요. 이 사람아.”
배우들의 말에 태준은 입맛을 다시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수연의 말처럼 아버지가 은퇴하는 작품에 자신이 너무 모자란 모습을 보여준 거 같아 조금 마음이 흔들린 것 같긴 했다.
배우들의 말이 맞았다.
아직 그런 걸 논하기는 너무 일렀다.
자신이 아버지만큼 연기 인생을 보내고 나서 그때 생각해 봐야 하리라.
“그래. 내가 너무 건방지긴 했네.
그냥 마음이 그랬어.
아버지가 은퇴하는 작품에서 내가 부족했으니까.
이제 정신 차릴 테니 그만해.
대체 무슨 돌직구가 그렇게 무거워? 오승환 님이신 줄 알았네.”
마음을 다잡은 태준은 오늘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민수와 태준이 정신을 좀 차리고 분위기가 다시 좋아지자 이제 대화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근데 이거 대체 뭐야? 아니 정 배우는 왜 움직이면 이렇게 별별 기사가 다 나와?
[경쟁작을 직관하는 패기!]
이거 무슨 기사 머리말이 이따위야?”
“댓글은 더 가관이지.
사람들의 머릿속에 민수는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긴 하네.”
“그런데 “유적 탐색자” 보러 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확인하러 왔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같은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던 소희는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음… 더 뒤에 있는 글을 보면 대충 설명이 되지 않을까? 민수형이 하나둘씩 처단하러 간다. “유적 탐색자” 보는 사람들을 민수가 누군지 봐뒀다가 한 명씩 처단할 거라는 농담이지.”
“민수 선배님은 점잖으신 분인데 왜 이런 글이 달릴까요?”
“민수는 점잖은 녀석이 맞지만, 사람들 마음속에서 민수는 거침없는 싸움꾼이거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긴 한데…..
나중에는 민수가 사람을 패고 다녀도 그러려니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
“결국 민수 오빠는 방송에 좀 나가긴 해야 해요.
이런 이미지도 쌓이면 결국 좋지 않다고요.
지금 뭉그적거릴 때가 아니에요.”
설아의 투정에 민수도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이제 활동 시작하면 결국 예능도 나가야겠네요. 끙….”
“오 선남선녀. 이건 그래도 괜찮네. 어… 그런데…..”
“선남선녀. 잘 어울리는 남녀 과연 그들의 진짜 관계가 어떤지 궁금하다.
친한 선후배 사이라는 그들의 말은 사실일까.
뭐, 결국 스캔들 기사네.”
“사진은 잘 나왔네요. 그래도 대단하네요. 저건 또 언제 찍었을까요?
게다가 매니저가 옆에 있었는데도 전혀 사진에 안 잡히다니 이것도 능력이고 볼 수 있겠네요.”
설아는 스캔들 기사에 조금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기사 아래 사람들의 반응이 그럴 리가 없다는 말뿐이었기 때문이다.
“친한 선후배 맞아. 삼돌이들아 기사 좀 알고 써라.
아침에 적진 염탐하러 온 거라니까.
기자들 뚝배기 조심해라.
순 이런 말뿐이네. 민수 왠지 은근히 스캔들 청정구역 같은 느낌인데?
왜 아무도 의심을 안 하지?”
“솔직히 저렇게 대놓고 다니면 더 의심하기 힘들어.
게다가 심야도 아니고 아침이었잖아.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거지.
배우 커플이 아침에 대놓고 영화관에 데이트? 이거 대충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잖아.”
“정작 찾아야 할 건 안 찾고 엉뚱한 것만 찾고 있다니 역시 기자들 수준은…..”
설아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은 민수뿐이었다.
왠지 설아는 스캔들 기사에 심통이 단단히 난 것 같았다.
한동안 기사나 이것저것을 살펴보던 살아는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혼자 한동안 배를 잡고 웃어대던 설아는 한가지 글을 배우들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보세요. 와 진짜…..
아시아 프린스 윤태준 팬클럽 수준이 참…. 큭큭…”
“어? 이거 뭐야. 팬픽이네.
배우 팬 카페도 이런 게 돌아다니나?
그런데….. 어? 이게 뭐야 상대역이…. 민수네? 뭐 이런…..”
“이거 그거네요. BL팬픽. 원래 남자 아이돌 그룹 팬 카페에서나 돌아다니는 건데…..”
“그게 뭐예요?”
민수가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묻자 소희는 작게 웃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설명했다.
“아… 그 원래 남자 아이돌 그룹에서 그룹 멤버들 간에 연애를 가상으로 쓰는 팬픽이에요.
그… BL이란건 남자끼리 연애하는 그런 거라는 뜻이고요.”
남자와 남자가 연애하는 글이라니 민수는 그런 게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정말 세상이 넓네. 그런 것도 있었다니…..”
“풋…. 민수 오빠가 난폭 공에 태준 오빠가 앙탈 수라는데 이거 진짜 웃긴다…히힛…”
민수는 설아의 말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조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윤 배우 팬클럽 멤버 중에는 문란한 분들이 많군요.
참나 배우가 그래서 그런지…..”
태준은 민수의 말에 울컥해서 소리쳤다.
“야! 정 배우. 솔직히 너,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나보다 네놈이 더 문제야.
너 예전에 송포유 찍을 때도 “태양”에 너랑 리온 팬픽이 있었어.
그런데 나한테 책임을 미뤄?”
태준의 외침에 민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자신에게 이런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니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