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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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민수의 눈에 비친 것은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특실이었다.
처음에 들어왔을 때 사장님은 태준에게 특실에는 이미 사람이 있다고 미안해하셨다.
아마 저 방에 손님이 없었으면 민수와 일당들이 저 방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민수가 잠시 방문을 보고 있는데 문이 쓱 열리더니 방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당연히 처음 보는 남자였는데 남자는 이미 술에 많이 취한 듯 보였다.
민수와 눈이 마주치고 남자는 조금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화장실에 가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뒤로 방안의 모습이 민수의 눈에 살짝 들어왔다.
대충 방안에는 6명 정도의 남자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남자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면서 문이 닫혔다.
주변에 다른 손님들은 없었고 마땅히 다른 변수가 없는 만큼 자신이 불쾌한 이유는 저 남자들인 것 같은데 방에서 술을 마시는 남자들이랑 무슨 일이 있을까 싶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저 남자들이랑 시비가 붙는다는 것 정도였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남자들.
그리고 별로 꾸미지는 않았지만, 태생이 그냥 미녀인 여배우 둘과 술을 마시는 남자 배우 둘.
생각해보니 어쩌면 시비가 붙을 수도 있을 거 같았다.
남자란 놈들이 술을 먹으면 대부분 그런 쪽으로 개가 되곤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수연이나 설아 같은 미녀를 눈앞에 둔다면 더 그럴 가능성이 커진다.
민수가 고민하는 중에도 술자리는 계속되었다.
태준의 의도대로 설아와 수연은 조금 긴장이 풀린 듯했다.
특히 어차피 개봉되면 우리가 할 일도 없고 우린 그냥 기다릴 뿐이라는 말과 영화는 기가 막히게 뽑혔으니 이제 우리는 과실만 먹으면 된다는 말, 그리고 걱정할 사람은 선생님들이지 우리가 아니지 않냐는 말을 들으며 조금 마음이 편해진 듯 보였다.
민수도 태준의 말에 영화에 대한 걱정은 조금 내려놓게 되었으니 태준의 노력은 헛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민수는 가능하면 빨리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민수가 아무래도 걱정이 되니까 그냥 빨리 돌아가자고 말하려는 찰나에 남자들이 방문을 열고 나오더니 사장님을 불러 계산을 마쳤다.
그리고는 민수의 걱정이 무색하게 남자들은 민수를 한번 슬쩍 노려보고는 바로 밖으로 나갔다.
민수가 무슨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발생한 일이었다.
남자들이 다 나가자 민수 옆에 있던 설아는 기분이 나쁜 듯 입을 내밀고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왜 저렇게 보고 간대요? 우리가 너무 시끄러웠나? 그래도 저렇게 노려보는 건 예의가 아니죠.”
그런 설아의 표정이 귀여웠는지 수연은 머금고 설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민수는 자신이 나서기도 전에 상대가 나가버리자 조금 허탈함을 느꼈지만 그래도 다소 안심이 되었다.
다만 꺼림칙한 것은 저들이 나갔음에도 전혀 불쾌함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잠시 후 민수와 일행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많이 마실 생각도 아니었고 긴장만 풀러 온 것이니 길게 있을 생각도 없었다.
이제 돌아가 오늘은 푹 쉬고 내일은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했다.
푸근한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일행은 다음에 와서 마음 편하게 마시기로 다짐했다.
이 특별한 동동주가 앞으로도 계속 생각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웃으며 주점을 나선 일행들은 소속사로 돌아가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면서 조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민수는 자신의 뇌리를 자극하는 강한 경각심을 느끼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온몸을 무언가가 확 할퀴고 지나간 느낌이었고 자신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순간 일행의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며 남자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일행의 앞쪽에도 세 명의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남자들은 부러진 마대 자루 같은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제법 늦은 시간에 인적이 드문 골목.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 보였고 민수는 나타난 남자들이 아까 나갔던 그 남자들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저들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민수의 머릿속에는 오만 가지 생각이 떠다니고 있었다.
분명 술을 엄청나게 퍼 마시고 완전 취한 남자들이었다.
민수의 예리한 후각에는 그들의 술 냄새가 여기까지 풍겨왔다.
그냥 이대로 충돌한다면 자신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대로도 아니고 그리 넓지 않은 좁은 골목.
저런 몽둥이를 휘둘러 봤자 피하면 그만이고 술에 취해 몸을 완전히 가누지도 못하는 만큼 집중력도 떨어 질 것이 분명했고 휘두르는 중에 자기들까지 충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신중하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을 두드려 패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당장 내일모레가 시사회다.
자신이 정당방위든 아니든 간에 상관없이 언론은 분명 물어뜯을 테니 시사회는 당연히 엉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싸우면 옆에 수연과 설아는 어쩔 것인가.
혼자서 7명과 싸운다고 쳐도 자신이 손이 2개인 이상 결국 그녀들이 피해를 막을 순 없을 것이다.
시사회 전에 여배우의 몸에 상처가 난다니 정말 끔찍했다.
말로 저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분명 술을 먹고 극도로 흥분된 상태일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정신이라면 저런 정신 나간 짓을 하진 않겠지.
야간에 흉기를 든 남자 일곱 명이면 저건 무조건 특수폭행일 테니까 단순히 때리는 거랑은 차원이 달랐다.
이상하지만 저놈들의 살기가 거의 자신을 향하고 있는데 혹시 나만 때리고 다른 배우들을 풀어주라고 하면 말을 들을까?
한편으로 생각하면 저놈들한테 그냥 맞아주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남자들에게 맞고 시사회를 못 나가는 건 둘째치고 자신은 이제 영화에서 최고의 무사로 등장할 것인데 저런 놈팡이 일곱 명한테 맞았다는 게 알려지면 그것도 코미디 아니겠는가?
물론 기자들은 두 손을 들고 반기겠지만 바람직한 결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가장 무난한 결론은 역시 도망가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걱정되는 건 저놈들이 진짜 미쳐서 소속사 건물까지 따라오는 거지만 설마 그 정도로 미쳤을까 싶었다.
민수의 머릿속이 정리되는 데까지 찰나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민수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듯한 일행에게 빠르게 말했다.
“윤 배우. 상황이 이상하니까 수연 선배 업어. 그리고 무조건 소속사로 뛰어.
설아 씨도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뛰어요. 알았죠?”
별로 꾸미지는 않았지만, 수연은 설아의 큰 키를 의식한 것인지 조금 굽이 높은 신을 신고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술에 취했다지만 남자였고 수연 역시 술을 마셨기 때문에 자력으로 탈출하기는 무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냥 신을 버리고 맨발로 뛴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민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태준은 바로 수연을 업었고 수연도 떨면서 바로 태준에게 업혔다.
그리고 그 순간 민수는 바로 정면에 남자들에게 뛰어들었다.
머릿수를 믿고 의기양양하던 남자들은 갑자기 민수가 뛰어들자 이런 상황은 생각하지도 못한 듯 놀라며 허둥대며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날렵한 민수에게는 타격을 전혀 주지 못한 채 자신들의 진로만 방해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민수와 세 명의 남자들이 엉키는 틈을 타 세 명의 배우는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수연을 업고 있었지만 태준은 건장한 남성이었고, 키가 크지 않은 수연은 시사회를 앞둔 여배우답게 그리 무겁지는 않았다.
게다가 술도 기분이 살짝 올라올 정도만 마셨기 때문에 차라리 더 혈기왕성한 상태였다.
그리고 웬만한 남자보다 잘 달리는 데다가 운동화를 신은 설아는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뒤에 남자들도 재빠르게 남자들이 엉킨 곳으로 다가왔다.
민수는 남자들과 몸싸움을 벌였지만 그들을 때리거나 하진 않았다.
그리고 뒤에서 달려온 남자들이 민수를 둘러싸 포위하기 전에 서둘러 몸을 뺐다.
처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들은 민수가 자신들에게 달려들자 더욱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민수까지 몸을 빼고 달아나기 시작하자 악에 받쳐 민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민수는 앞에 달리고 있는 일행을 보면서 이대로 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수연을 업고 달리는 만큼 태준의 속도가 느렸다.
설아는 이미 저 앞으로 달리며 뒤쪽의 일행들을 힐끔힐끔 살피는 것을 보니 완전히 안전해 보였지만 이대로 그냥 달리면 태준은 저놈들한테 잡힐 것 같았다.
순간 민수는 저놈들의 분노가 자신에게 몰려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슬쩍 옆 골목으로 돌아 들어갔다.
목적지는 어차피 소속사지만 조금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게 정말 통할까 싶어 걱정스럽기도 했다.
저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혹시 자신을 버리고 태준에게 달려갈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저들은 뭐에 씌인 것처럼 자신만 미친 듯이 따라오고 있었다.
상황은 의아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무슨 감정이 있어서 저러나 싶기도 했다.
민수는 계속 달렸다.
민수는 달리면서 이 상황이 참 웃긴다는 생각도 들었고,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기도 했다.
일행들이 안전해진 상태여서 그런지 마음의 여유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문득 그래 이래야지 싶기도 했다.
자신이 이상하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번 촬영은 솔직히 너무 순조로웠다.
당연히 있을 것 같았던 진룡 쪽의 야료조차 없었고 언론마저 우호적이었으니 순풍을 단 듯 순조롭기만 했다.
민수는 우선 자기 일이 그리 순조롭게만 흘러갈 리가 없다는 생각과 하긴 내가 하는 일인데 어이없긴 해도 이 정도 문제는 있어야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한창 달리다 보니 머릿속도 조금 개운해 지는 거 같았다.
민수는 요리조리 시간을 끌면서 골목길을 질주했다.
하지만 남자들은 민수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질주하는 민수를 놓치지 않는 것을 보니 남자들도 평소에 운동깨나 한 것 같았다.
아니면 술을 먹은 상태에서 자신의 힘 이상을 뿜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민수는 지금 자신이 최고 속도를 낸다면 저들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저들을 떨쳐놓는 것이 옳은 판단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저들의 정체와 의도를 모른다는 거였다.
이게 일회용 이벤트가 아니라면 앞으로도 곤란해진다.
자신은 제쳐두고라도 혹시 저 녀석들이 설아나 수연에게 이런 식으로 달려든다면 그건 정말 난감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문득 처음에 아리 재단 건물에 들어섰을 때 박춘섭 어르신이 한 말이 생각났다.
무슨 일이 생기면 이 건물로 뛰어오면 다 해결해 준다는 말.
분명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알고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왠지 상황이랑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민수는 어르신의 말을 상기하며 우선 저들을 차라리 아리 재단 건물까지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민수는 속도를 살짝 늦췄다.
그리고 상대가 약오를 만큼 아슬아슬하게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성이 있는 상황이라면 좀 이상하다고 느낄 만 하지만 저들은 지금 그렇지 않으니 어쩌면 통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저들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잡아서 족치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윽고 소속사 건물이 민수의 시야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미 질주하는 남자 여덟 명은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끌었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골목이라도 여덟 명이나 뛰고 있었고 저 남자들은 화를 내면 간간이 소리까지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다른 배우들을 위하여 경로를 이탈해 달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런 사태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민수는 또 신문 일 면에 날 것 같은 이 어이없는 상황에 입안 가득 씁쓸함을 느꼈다.
그리고 소속사에 도착하자 민수는 지체 없이 건물로 쏙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