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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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떠들썩하게 지내는 여성들과는 달리 민수는 한가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그나마 촬영 중에 자신을 발목을 잡았던 로맨스 연기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작품들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것이 유일한 일과였다.
쉬라고 시간을 주었음에도 연습실을 들락거리는 민수의 모습에 작게 혀를 찬 태준은 민수에게 쉴 때는 쉬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지만 민수는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후… 그래, 쉴 때는 쉬어야지.
그런데 윤 배우.
넌 여유시간이 생기면 뭘 하면서 지내?
난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말이야.”
결국 할 일이 없으니 무료해서 연습실로 들어가 연습이나 하고 있다는 민수의 말에 태준은 자신의 친구가 얼마나 각박한 녀석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음….. 나 같은 경우에는 그간 보지 못했던 영화나 드라마를 몰아 보거나, 아니면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거나 하는데 말이야.
정 배우, 혹시 예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은 없어?”
태준의 말에 민수는 작게 한숨을 지으며 생각에 잠겼다.
불행히도 전생의 취미가 영화나 드라마의 감상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것들은 이미 다 본 상황이었고, 전생과는 다르게 새로 제작된 영화나 드라마가 있으면 한번 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진룡에서 만들고 있는 유적 탐색자가 유일했다.
친구들은 자신이 야반도주하듯 서울로 넘어오면서 다들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으니, 만날만한 사람들이 있을 리가 없었고 그나마 있는 연예인 친구는 윤 엔터 식구들과 리온 정도였는데, 리온은 지금 막 중국 콘서트를 마치고 앞으로는 일본에서 콘서트를 열 계획이었으니 한창 바쁜 시기였다.
반면 태준은 예술 고등학교와 예술 전문대학을 다니며 이쪽 방면 친구가 많을 테니 만날만한 녀석들도 많을 것이다.
민수가 친구가 많아서 좋겠다고 이야기하자 태준은 고개를 저으면서 조소를 짓더니 별로 그렇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나도 그쪽 녀석들하고는 별로 잘 만나지는 않아.
다들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할까?
마음 터놓을만한 녀석들은 없어서 말이야.
가끔 예능에 나와서 나랑 동창이라고 하는 녀석 중에 진짜 나랑 친한 애는 없다고 볼 수 있겠지.
그나마 친한 애들은 연기 포기하고 다른 길 가고 있는 두세 명 정도뿐이니까.”
태준은 막상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기도 민수 못지않게 삭막하게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민수가 연예인으로 데뷔하기 전이였다면 어디 나들이라도 한번 다녀오라고 추천해 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무리 신인이라고 해도 일단은 연예인이었고, 은근히 이슈를 몰고 다니다 보니 인지도도 상당해져 아마 길거리를 다니다 가는 사람들에게 단박에 들키게 될 테니 그것도 무리였다.
태준 자신은 아마 민수보다 더 심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 편하게 다니려면 그나마 유럽이나 미국, 이런 식으로 아시아를 벗어나야 할 텐데 이제 얼마 후에는 영화를 개봉하는 상황이다 보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끙…. 결국 할 일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아, 그래.
정 배우, 혹시 낚시 좋아하나?”
태준과 충동적으로 떠나게 된 낚시 여행에는 예상치도 못했던 진성 선생님이 합류하셨다.
태준이 말하길 진성 선생님이 진정한 낚시인이었고,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장소도 많이 아시기 때문에 진성 선생님을 따라가면 다른 사람들의 방해 없이 호젓하게 낚시를 즐길 수 있다고 한다.
태준이 갑작스럽게 진성에게 연락한 셈이었지만 촬영도 마치고 조금 여유를 즐기고 있던 진성은 태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진성은 이때쯤에는 호수가 쪽 명당에는 사람들이 많으니 차라리 바다로 가는 게 한가하다고 말하며 태준과 민수를 동해 어딘가로 끌고 갔다.
젊은 졸병을 둘이나 대동한 것에 기분이 좋았던 진성은 웃으면서 오늘 어른의 위용을 톡톡히 보여주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바다에서 바로 잡아서 먹는 회라니, 민수도 살짝 기대감이 올라왔다.
서울에서도 충분히 회를 먹을 수 있었지만, 바닷가에서 바로 먹는 회는 그 차원이 달랐으니 식탐이 없던 민수도 식욕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낚싯대를 던지고 입질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세 남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부분 진성이 묻는 이야기하는 입장이었고 태준과 민수는 대답하고 듣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진성은 별다른 취미도 없어서 고민하다가 결국 낚시를 오게 되었다는 태준과 민수의 말에 조금 우려 섞인 충고를 건네었다.
“음….. 그건 좋지 않구나.
사람이기 때문에 충전이 필요한 것인데….
아무래도 휴식기에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무언가를 빨리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하다못해 낚시라도 좋고, 나이가 젊으니 차라리 연애도 괜찮을 거야.
이런 말을 하기에는 너무 성급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바로는 항상 연기만 생각하던 녀석들은 길게 가지 못했어.
사람이다 보니 결국 지쳐버린 거야.
물론 그 여유를 이상한 쪽에서 찾으려고 했던 놈들은 잠시 반짝하고 사라질 수밖에 없었지만, 너희들에게 그 정도 분별력은 있을 거 같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마.”
연애를 해도 걸리지만 않으면 장땡이라고 덧붙이는 진성의 말에 웃음 지으며, 민수는 그가 직접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이상한 쪽이란 게 도박이나 마약처럼 자극적인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연예인들이 나쁜 길로 빠지는 가장 흔한 경우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자 진성은 태준과 민수에게 연기를 하는 목적이나 목표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람들이 배우가 되고 연기를 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나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
사실 난 돈이 필요해서 연기를 시작한 경우였어.
우리 집은 많이 가난했고, 난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단다.
그나마 가진 건 잘생긴 얼굴뿐이었는데, 얼굴로 먹고살려니 연예계 쪽으로 발을 내밀 수밖에 없었던 거야.
뭐, 일이 잘 풀리지 않았으면 어쩌면 호스트나 사모님들을 등쳐먹는 제비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
그리고 자신이 그 당시에 호스트나 제비가 되었으면 아마 희대의 사기꾼이 되었을 것이라는 진성의 말에 민수와 태준은 호스트로 그 바닥을 평정하는 진성의 모습이 상상되는 바람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돈을 위해 배우가 되려고 한단다.
잘나가는 배우들이 드라마 한편에 수억을 벌고, CF를 찍으면서 돈을 긁어모으니 당연히 욕심이 나겠지.
난 그 사람들을 이해한다.
나도 그렇게 연기를 시작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오래 연기를 하면서 지켜보니 결국 연기로 얻는 부수적인 것들보다 그냥 연기 자체만 생각하던 녀석들이 오래 살아남더구나.
욕심이 심해지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시야가 좁아지면서 사람들을 놓치게 돼.
그러니 돈보다는 사람과 연기에 집중하는 배우가 되어라.
이게 일반적으로 젊은 배우들에게 내가 해주는 충고지만…..
사실 너희 둘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충고겠지.
왜냐하면 너희는 한 번도 돈 때문에 연기를 해본 적이 없고, 그건 앞으로도 그럴 거 니까 말이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진성은 태준을 바라보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준아, 내가 알기로는 네 녀석은 강철이 보다 더 대단한 배우가 되는 게 목표라고 했었지.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강철이를 봐왔고, 아버지인 강철이가 너의 롤모델일테니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야.
하지만 네가 강철이 보다 더 대단한 배우라는 걸 누가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겠니.
강철이 보다 더 많은 작품을 찍는 것? 아니면 강철이 보다 더 많은 수상을 하는 것?
혹은 강철이보다 더 많은 개런티를 받는 것?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중 무엇도 네가 강철이보다 위대한 배우라는 걸 증명해 주지는 못할 것 같구나.
만약 사람들이 너를 아버지보다 위대한 배우라고 칭송한다 한들 너 스스로 아버지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니?
태준아.
난 네가 정말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훗날 네가 더 굉장한 배우가 되었을 때도 강철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그게 걱정이구나.
그러니 넌 너대로 확실한 기준을 먼저 세워보는 것이 어떻겠니?
이 정도면 배우 윤태준이 윤강철을 뛰어넘었다고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그런 기준을 말이다.”
말을 마친 진성은 생각에 잠긴 태준을 보고 잠시 바라보다가 웃으면서 민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민수.
넌 정말 신기한 녀석이야.
사람들이 그러더구나.
대체 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이야.
신경 쓰는 것은 오직 연기뿐이고, 다른 것에는 일체 관심이 두지 않으니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거지.
내가 보기엔 넌 정말 연기를 즐기는 녀석이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걱정스럽구나.
연기가 언제까지 재미있기만 할지, 그리고 언제 흥미를 잃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난 네가 작은 목표들을 세우고 그것들을 이루면서 점점 더 큰 목표를 향해 나아 갔으면 좋겠구나
그 목표가 차라리 돈이어도 좋고, 아니면 어떤 상이어도 괜찮겠지.
그런 목표가 있다면 잠시 연기가 즐겁지 않을 때 그것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힘을 낼 수도 있지 않겠니?”
진성은 자신들만의 생각에 빠진 두 녀석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으며 낚싯대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성은 이 젊은 녀석들의 성품도 마음에 들고 연기는 더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오랫동안 배우로서 활약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후배였던 강철이 두 가지 시상식에서 대상을 휩쓴 후 목표를 상실한 채 방황하다 연기의 열정을 잃어버렸던 것을 못내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혹시 그때 자신이 나서서 다잡아 주었으면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이번에 강철이 다시 연기하는 것을 보면서 그 생각은 확신이 되었다.
만약 태준의 자신이 만든 아버지의 벽에 갇혀서, 그리고 민수가 갑자기 연기의 재미를 잃어서 이른 나이에 연기를 그만둔다고 한다면 예전에 강철이 연기를 그만하고 싶다고 했을 때보다 더 가슴 아플 것 같았다.
그리고 혹시 훗날 이들이 그런 문제에 부닥쳤을 때 자신이 한 말이 생각나 조금의 변화라도 생긴다면 자신은 그걸로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둘은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다시 낚싯대 앞으로 다가왔고,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동안에도 찌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허허, 아무리 세월을 낚으러 왔다지만 이건 너무 한대….”
후배들 앞에서 큰소리를 친 주제에 한 마리도 낚지 못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진성은 둘을 버려두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혼자 자리를 잡고 다시 찌를 던졌다.
그리고 잠시 후 흔들리는 찌를 보며 신나게 낚싯대를 당겼다.
“오호! 잡았다! 월척이다! 하하하”
진성이 제법 큰 고기를 잡자 민수와 태준도 크게 환호하며 진성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둘은 진성이 잡은 제법 큰 고기를 보며 기대를 하고 찌를 던졌지만, 아까처럼 한참이나 찌가 움직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진성은 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혼자서 처음에 자리를 잡은 곳으로 가서 찌를 던졌고, 그곳에서 어김없이 대어가 낚여 올라오자 이게 무슨 조화인지 더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태준을 불렀다.
태준도 이 상황이 이상해서 말없이 혼자서 진성의 곁으로 와 찌를 던졌고, 잠시 후 두 사람의 낚싯대에는 사이좋게 물고기가 달려 올라왔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그 시간에도 민수의 낚싯대는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그 후에 이렇게 저렇게 자리를 바꿔 보았지만 민수가 있는 곳에서는 어떠한 고기도 잡히지 않자 그들은 민수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하……”
“이유는 모르겠지만….. 민수에게는 낚시가 어울리지 않은가 보구나.”
민수는 진성의 말을 조용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진성과 태준이 여러 마리의 물고기를 낚는 동안 자신은 한 마리도 낚지 못했으니 말이다.
“앞으로 낚시를 오면 정 배우는 그냥 혼자 있어. 괜히 다른 사람 방해하지 말고.
아!
다른 사람이랑 내기 낚시할 때 너를 상대편 쪽에 앉혀 놓으면 되겠군.”
좋은 아이디어를 얻은 듯 기뻐하는 태준을 보면서 민수는 앞으로 낚시터에 오면 무조건 태준의 옆자리에만 앉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