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124화 (124/325)

#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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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연화에게 달려간 그 시간.

천은 궁을 정리하고 태자비 현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의 방에 들어서자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은 천이 자신의 앞에 앉자 차를 한잔 따라 주고는 가라앉은 눈으로 천을 바라보았다.

“할아버님이옵니까?”

현의 말에 천은 아무런 말 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천의 모습을 보면서 현은 조금 쓸쓸하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신 현은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천에게 아무 말 없이 절을 올렸다.

그런 현의 모습을 보는 천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들고 있었다.

한동안 둘은 그렇게 슬픈 눈으로 서로를 바라 보기만 했다.

“웁,….”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갑자기 현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천은 놀라서 현을 부축했다.

현을 태자비의 자리에서만 내리고 더는 죄를 묻지 않으려 했던 천은 그녀가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소?”

천의 말에 현은 그저 처연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예전에…. 전하는 참으로 귀여운 분이셨죠.

저에게 달려와 누나누나 하면서 방긋 웃던 그 모습을 소첩은 아직도 잊지 못한답니다….”

“누님….”

황태자 천과 황태자비 현은 현이 죽기 직전에야 비로소 예전에 사이좋던 오누이로 돌아갔다.

“그때, 전 반드시 전하를 지켜드리고 싶었습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전하를 지켜드리지 못했는데….

이렇게 마지막에라도 전하께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하지만….”

“전하, 역적의 혈육이옵니다.

전하께서 쳐 내시지 못하니…. 이렇게 제가 스스로 떠나는 수밖에요….”

“하….”

“천아…. 네 말대로 제국을 일으켜 세우거라….

이 누이는….. 하늘에서 천이를 응원하고 있을 테니….

그리고….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때는 좋은 오누이로 보자꾸나.…”

현의 고개가 꺾여 내려갔고 천은 한동안 현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현을 바라보던 천은 일어나서 내관을 불렀다.

“태자비.. 현의 장례는.. 황후의 예로 모시거라…”

말을 마친 천은 눈물을 감추고 현의 방을 나섰다.

현의 죽음까지 촬영이 끝나자 평의 반란을 일으키는 모든 장면의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촬영된 영상을 전체적으로 확인하던 배우들은 무사히 촬영이 마무리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민 단장과 찬진 만이 화면을 보면서 조금 인상을 쓰고 있었다.

“왜 그래? 김 감독? 무슨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나?”

강철은 인상을 쓰는 찬진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고 찬진은 작게 한숨을 쉬며 아쉬운 점을 이야기했다.

“너무 아까워. 스케일은 큰데, 느낌이 팍 오지가 않아.

내가 생각했던 그런 느낌이 아니야.

뭐가 문제일까….”

“엑스트라들 때문에 그럴 겁니다.

사람은 많은데 막상 쓸만한 사람들은 별로 없더군요.

일반적인 방법으로 촬영을 하게 되면 엑스트라들로 충분하지만 김 감독님 촬영 스타일을 보니 그냥 엑스트라를 써서는 원하는 느낌이 안 나올 겁니다.”

찬진의 말을 듣고 있던 민 단장은 천진이 생각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찬진이 아쉬움을 느끼는 있는 이유를 바로 설명할 수 있었다.

이는 민 단장도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는데, 결국 둘의 눈이 너무 높아져서 일반적인 엑스트라로는 자신이 생각한 느낌이 완전하게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늘 찍은 것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지막 전투는 오늘하고는 또 다를 텐데, 이래서는….”

“일정이 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인제 와서 액션 스턴트맨들을 더 구하는 건 어려울 겁니다.

급하게 구한다면…. 조금 더 구할 순 있을 텐데.

그 정도로는….”

배우들도 찬진의 말이 무엇인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일반 병사로 나오는 엑스트라들에게 스턴트맨 같은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전투 씬을 촬영하면 일부 스턴트맨들이 움직이는 것만 촬영하고 그 후에 조금 멀리서 구도를 잡는 방식으로 촬영하곤 했는데, 찬진은 그렇지 촬영하지 않고 엑스트라들이 움직이는 모습까지 더 세밀하게 촬영을 하기 때문에 더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는 반면에 그만큼 엑스트라들이 지는 부담도 커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 촬영은 일반 병이라는 설정 때문에 조금 어설프게 싸워도 이해가 되겠지만 아마 다음 장면은… “

“다음 전투는 최정예 대 정예니까요.”

민수도 상황을 이해하고는 조금 심각하게 표정이 되었다.

최정예인 암월당과 정예인 약탈자, 야만인들의 전투.

만약 찬진이 이 인원을 가지고 오늘 같은 방식으로 촬영한다면 아마 절대 좋은 장면이 나오지 않으리라.

민 단장이 서둘러 여러 곳에 연락해 보았지만 많은 수의 스턴트맨들을 모으지는 못하였다.

일행이 조금 침울해지자 찬진은 웃으면서 기지개를 크게 폈다.

“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고요.

그냥 내가 욕심을 너무 내서 그런 건데.

그럼 평범하게 가면 되니까요.”

잠시 생각하던 강철은 찬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김 감독 말대로 욕심이 나는 일이지.

난 김 감독의 촬영 스타일이 참 좋아.

화면이 엄청 멋지게 살아나니까 말이야.

그래서 가능하면 김 감독 스타일로 갔으면 좋겠는데…. 흠…

민 단장님. 그런데 꼭 스턴트맨이어야 합니까?

혹시 그냥 등치가 좋고 싸움을 좀 할 줄 아는 장정들은 안 될까요?”

강철의 말에 민 단장은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충분히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어려운 액션 연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적당히 자기들까지 치고받으면서 동작을 크게 크게 움직일 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다만, 문제는 어떤 무술이든 무술을 배운 사람들과 달리 일반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동작의 태가 예쁘게 나오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무술 경험은 꼭 필요합니다.

태만 잘 낼 수 있는 유단자면 가장 좋겠네요.

중요한 액션은 어차피 저와 액션 스쿨 스턴트맨들이 해줄 테니까요.”

민 단장의 말에 강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대충… 적어도 200명 정도는 충원할 수 있겠군요.

무술 유단자 200명 정도 추가하겠습니다.”

“오…..”

“200명이라…. 조금 부족한데…. 대충 다음 전투가 1000 vs 30000이라는 설정이잖아. 머릿수 자체는 CG로 처리하면 되겠지만….음……”

찬진이 고민이 계속되었고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저쪽에서 형우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민 단장 앞으로 다가간 형우는 민 단장에게 혹시 특공 무술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음? 특공 무술?”

“그 경호 업체 “붉은 범” 에서 100명 정도 지원해 주실 수 있다고 합니다.

군 전역자 출신들이고, 군에서 특공무술을 배운 인원들인데…. 괜찮을까요?”

찬진은 형우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반색했고 민 단장도 나쁘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민수는 그런 형우를 보며 혀를 차며 황당해했다.

“그.. 대신 그쪽에서 요구사항이 있는데요.”

“뭔데?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을 거야. 우리 지금 제작비 많이 남았거든.”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는 찬진의 말에 형우는 고개를 저으며 그쪽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아니, 돈은 필요 없고요. 그쪽 단장님이 영화 끝에 경호업체 “붉은 범”에서 촬영에 협조해 주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문구 하나만 넣어 달라고 하시네요.”

“아… 홍보로 쓰실 모양이구나.”

강철도 형우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민수가 생각하기에도 돈 몇 푼을 받는 것보다는 그쪽이 붉은 범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좋은 생각이시구나.

만약 인원을 지원해 주시면 그렇게 해드린다고 연락 드려라.

그리고 오신다고 하면 일정 알려드리고.”

그렇게 인원이 추가되고 찬진과 일행들은 다음 일정에 대한 계획을 확실히 세울 수 있었다.

“300명이면 가능해.

오늘보다 더 멋지게 찍을 수 있을 거야.”

찬진은 새로운 인원들이 보충된다는 생각에 한껏 고무된 표정이었다.

민수는 한쪽으로 나가서 붉은 범과 연락을 마친 형우에게 다가갔다.

“대단한 놈.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는 거였어?”

“그럼. 내가 일정이 빡빡해서 도망쳐 나왔지만 그래도 내 마음의 안식처 같은 곳 아니겠어?

다들 날 귀여워해 주시기도 했고 말이야.”

“그래 이번엔 네놈 넉 좀 봤다. 고맙다 조형우.”

“이게 어디 형 하나만의 일이야?

소속사 사활이 걸린 일이지.

그나저나 나도 그냥 찔러만 본 건데 바로 하시겠다고 해서 의외이긴 했어.

들리는 말로는 단장님이 요즘 홍보 때문에 고민이 많으시다고 하더라고.”

“하긴…. 요즘 경호 업체도 많이 생기고 있으니까.”

“응. 붉은 범이 업계에서 탑이긴 하지만 붉은 범은 덩치가 워낙 크잖아.

단장님이 단원 욕심이 너무 많아서 그렇긴 하지만 말이야.”

“그분이 전역자 중에 일 없는 사람들 다 업고 가려고 하시니 그런 거지.

그분도 참 대단한 분이야.”

“그건 그렇지. 멋진 남자니까.”

웃는 형우의 모습을 보니 왠지 다음 촬영도 잘 진행될 것 같아 민수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마지막 촬영 날이 다가왔다.

이른 새벽부터 촬영장에 근처에 수많은 버스가 모여들었다.

다행히 허허벌판에 관문 하나만 덩그러니 설치된 곳이 촬영장이라서 버스를 세워 놓을 곳은 충분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그들의 분장과 복장을 준비하는 사이에 배우들은 황궁에서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이제 평이 일으킨 반란이 평정되고 정국을 안정시키는 일만 남은 제국에는 또 다른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황제가 북방군을 불러들인 틈을 타 야만인들이 몰려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대소 신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천도 대책을 세우기에 바빴다.

문제는 야만인이 북방군이 없는 틈에 남하를 완료한다면 제국군이 북방으로 방어를 하러 가기도 전에 북부가 황폐해질 거라는 것이었다.

천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지금은 일분일초라도 급하게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천이 찾은 사람은 진이었다.

천은 진에게 소수 정예의 병력으로 북방의 관문인 절명 관을 지켜 달라고 청하게 된다.

천이 진에게 요구한 시간은 일주일.

야만인이 관문에 도착할 거라 예상되는 시간은 약 2주 후였다.

그리고 제국군을 추스르고 북방군의 선봉이 절명 관에 도착할 예상 시간이 약 3주 후.

진과 최정예 병력이 관문까지 쉬지 않고 달린다면 대충 1주 정도 걸릴 테니 그곳에서 제국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 달라는 것이었다.

목숨이 위험한 임무 임에도 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진은 임무를 떠나기 전에 가장 먼저 설을 찾았다.

항상 무심하게 자신을 보던 설은 원수를 갚은 이후에는 진을 애증에 찬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진은 문득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큰절을 올릴 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다 설의 거처를 나선 진은 다음으로 수월의 거처를 찾았다.

평을 처단하고 설가는 복권되어 다시 공신의 자리에 올랐다.

수월도 설가의 후계자로 이제는 설가를 지키고 있었다.

“내가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제 네가 설가를 지켜야 한다.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

진은 별다른 말 없이 수월에게 어머니를 부탁할 뿐이었다.

평이 죽은 지금도 흑월에서는 진을 좋게 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어쩌면 시국이 평안해진다면 바로 진에게 칼끝을 돌릴지도 몰랐다.

수월은 자신이 흑월의 차기 수장이었지만 그런 흑월의 이중성을 발견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그리고 그런 흑월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진을 조금 애잔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진은 마지막으로 연화를 찾았다.

진이 출정한다는 소식을 접한 연화는 울면서 진을 배웅했다.

“제발… 살아서 돌아오거라.

팔 하나가 없어도 좋다.

불구가 되어도 좋다.

전쟁에서 패하여도 좋다.

그러니…

제발 살아서만 돌아오거라…. “

연화도 알고 있었다. 이번 출정을 마치고 진이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진의 생사를 장담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위험한 전쟁이었다.

진은 오열하는 연화에게 살아 돌아오겠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다.

그저 잔잔하게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춰 줄 뿐이었다.

평소의 조금 장난기 넘치는 야생마 같은 진이 아니라 진중하고 신중한 모습으로 떠나는 진의 뒷모습에 연화는 그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진과 진의 수족 같은 암월단 천 명은 결사의 의지로 절명 관을 향하여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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