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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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민수와 설아의 촬영이 며칠간 이어졌고, 둘은 별 문제없이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놀랍게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처음에 둘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기대하던 수연도 전혀 변화가 없는 둘의 관계에 이제는 조금 김이 빠진듯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어차피 둘 다 그런 성격이었으니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막말로 아직 사귀거나 그런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날 설아가 그런 용기를 낸 것 자체가 대단할 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래도 조금의 변화가 있었다면 서로를 조금 따듯하게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무슨 변화를 느낀 것인지 강철은 가끔 자신의 딸을 의아하게 바라보곤 했다.
역시 딸바보 아버지의 감은 다른 것인지 그 미세한 차이를 느낀 강철이 놀랍기만 했다.
어쨌든 그렇게 설아와 같이 하는 씬을 다 촬영한 민수가 다음에 찍을 장면은 진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내적 갈등을 겪게 되는 장면이었고, 이 장면은 윤숙과 소희와 함께 하게 되었다.
진이 광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당신이 원하는 대로 복수를 해주겠다는 말을 남긴 채 설을 떠났고, 그 모습이 너무 처절하고 가슴 아려서 지켜보던 강철까지 감탄을 터트릴 정도였다.
“하여간 정 배우 정말, 저런 건 따라갈 수가 없다니까.”
지켜보던 태준 역시 민수의 광기 서린 연기에는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과 광기, 그리고 처절함을 민수가 표현할 때는 다른 배우와는 다른 임팩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잘한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진성은 “어두운 거리”와 관련된 스케줄을 모두 마치고 촬영장으로 돌아왔다.
한창 상영 중인 “어두운 거리”는 생각보다 반응이 좋지 못했다.
평론가들은 차라리 끝까지 처음의 분위기를 유지하며 완벽하게 한국형 느와르를 찍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평하고 있었고, 관객들도 조금 싱겁게 끝난 거 같다며 아쉬워하곤 했다.
거기다가 진성의 예상대로 결국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받았으니 투자자의 간섭이 결국 독으로 작용하게 된 셈이었다.
평론가들의 평가, 관객들의 반응까지 모두 진성의 생각과 맞아 들어가자 진성은 그냥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진성까지 돌아오자 “용의 울음”의 촬영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게 되었다.
천이 황제와 평의 사이에 끼어들면서 심화된 둘의 정쟁은 점점 파국을 향해가고 있었다.
점점 줄어드는 세력에 위기감을 느낀 평은 결국 반란을 생각하게 되고, 황제는 그런 평을 완벽하게 제거하기 위하여 북쪽 경계를 지키는 북방군을 수도로 불러들인다.
반란을 일으킨 후 내전까지 확장하려고 하는 평이나, 북쪽 변경을 지키는 북방군을 불러들인 황제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었고 천은 이제 상황이 자신의 손에서 떠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천 역시 힘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천은 평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평을 치기로 한다.
하지만 문제는 평의 판단이 조금 더 빨랐다는 거였다.
천이 평의 군사 거점에 암월단과 진을 보내는 사이에 평은 자신의 가택에 기거하는 사병들을 대동하여 황궁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평의 목표는 황제와 천의 죽음과 공주인 연화의 확보였다.
황족을 모두 죽이고 연화만 남긴 후 연화를 자신의 혈육과 혼인시켜 여 황제로 등극시킨 다음 자신이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거였다.
만약 성공하기만 한다면 훗날 평의 후손이 제국의 황제가 될 것이다.
평이 황궁을 점령하는 것이 빠를지, 아니면 진이 거점을 박살 내고 황궁으로 복귀하는 것이 빠를지 이제는 시간 싸움이었다.
오늘의 촬영과 이제 다음에 있을 전투 장면이 이 영화의 대미가 될 것이다.
우선 엑스트라들을 엄청나게 모았기 때문에 전투의 규모가 웅장했고, CG까지 아낌없이 추가해 화려한 전투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촬영되는 장면은 황궁 내에서 수많은 병사가 서로 싸우고 있는 장면과 대전에서 황제가 시해당하는 장면이었다.
천은 궁에 병사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제 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평의 세력에 역정보를 뿌리기 위하여 살려두고 있던 황제의 호위무사가 떠올라 서둘러 황제가 머무는 궁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천이 황제의 궁에서 본 첫 장면은 바로 호위무사가 황제를 공격하는 모습이었다.
황제는 자신이 믿고 있던 호위무사가 자신을 공격하자 놀란 눈으로 분노를 터트렸다.
“이놈….. 네놈이 배신자였더냐. 내가 너를 그리 아껴주었는데…. 나를 배신하다니….”
“배신자라고 하기는 좀 어렵사옵니다.
처음부터 최고 대신의 사람이었으니까요.”
비열하게 웃는 호위무사를 보며 황제는 평의 용의주도함에 한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호위무사 역시 무사하지는 못했다.
천을 따라 들어온 무사들이 호위무사를 제압하고 그의 목을 베었기 때문이다.
이미 숨이 거의 끊어져 가는 황제는 천을 보고 죽으면서도 환한 웃음을 터트린다.
“그래…. 천이가 왔느냐…..쿨럭,
저 놈이… 배신자였어…. 날 20년이나 모시고… 내가 가장 믿었는데 말이야………..
흐흐흐, 아무래도 내가…. 그놈보다 한 수 아래였던 모양이야….”
황제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이 평보다 한 수를 더 내다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네 녀석이… 여기를 가장 먼저 온 것을 보니… 넌 알고 있었구나… 저놈이 배신자라는 사실을…..
큭큭, 난 평보다 한 수 아래였는데, 네 녀석은 평보다 한 수 위로구나.
좋아…. 좋구나….”
황제는 죽어가면서도 천이 평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광기로 번들거리는 그의 눈도 이제 서서히 힘을 잃기 시작했다.
“천아….
강한… 황제가 되어라….
강해져야 한다….
제국은… 황가의 것이다.…”
황제는 죽으면서까지 권력에 집착하고 있었다.
천은 슬픈 표정으로 황제가 죽어서라도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를 기원했다.
황제의 죽음은 명백하게 자신의 실책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매달려 있을 시간이 없었다.
무조건 시간을 끌어야 한다.
적들의 다음 목표는 분명히 자신일 테니 말이다.
황제의 눈을 감겨드린 천은 일어나 태자비의 궁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이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황제의 죽음에 대한 촬영을 마치고 이제 진이 황궁으로 돌아와 궁을 평정하는 장면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평의 비밀기지를 소탕한 진은 그곳에서 평이 황궁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서둘러 황궁으로 귀환한다.
진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황궁은 아수라장이었다.
그리고 진은 이제 선택을 해야 했다.
황태자 천이냐 아니면 공주 연화냐.
진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평은 천을 죽이고 연화를 납치하려 하고 있다.
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결국 천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납치된 연화는 다시 구할 수 있었지만, 만약 천이 죽는다면 반란을 제압해도 결국 이 나라가 무너지고 전란에 휩싸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연화가 자신이 올 때까지 버텨주기만을 기도했다.
연화를 구하러 가지 못하는 자신을 저주하며 진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태자비의 궁은 평의 군사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천은 이를 악물고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어선이 무너지기 직전 평의 병사들 뒤로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나타나 병사들의 대열을 무너트렸다.
진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그의 검이 한번 번뜩일 때마다 한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광기가 서린 미소와 압도적인 살기, 병사들은 점점 뒷걸음질을 치며 진에게 도망가기 시작했다.
대열이 무너지고 결국 진은 천의 바로 앞까지 당도하게 되었다.
천을 구해내자 일사천리로 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궁의 방비가 어느 정도 완비가 된 직후 진은 서둘러 연화의 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진의 마음속이 연화에 대한 염려로 어지러워졌다.
계속되는 전투로 진은 지쳐갔지만, 서두르는 그의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연화의 궁
연화의 궁에서 연화를 모시는 시비들은 전원 연화에게 무술을 배운 자들이었다.
덕분에 연화의 궁은 평에게 완전히 제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연화는 평의 호위무사인 태랑과 검을 겨루고 있었다.
태랑이 연화를 죽이려 했다면 벌써 승부가 났겠지만, 평의 목표가 우선 연화를 제압하는 것이다 보니 승부가 쉽게 갈리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 태랑과 함께 평이 있었다.
평은 매서운 눈으로 연화를 노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연화가 잘 버티며 시간을 끌게 되자 평의 눈은 고민에 휩싸였다.
평은 자신의 옆에 있던 무사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이대로 연화를 제압하는 것은 시간 낭비 밖에 되지 않으니 화살로 연화를 제압하겠다는 거였다.
그리고 무사가 활을 들고 연화의 다리를 조준했다.
화살이 연화를 향해 날아가고 연화가 화살에 맞기 직전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와 연화의 앞을 가로막았다.
순간 모든 사람이 놀라는 가운데 화살은 진의 오른쪽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연화도 진이 화살에 맞자 놀라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진은 피식 웃으며 연화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검은 옷이 이미 피로 물들었고, 검붉은 그의 옷에서 떨어지는 핏물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보며 눈물 흘리는 연화를 보며 진은 그녀가 아직 안전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연화의 안전을 확인한 진은 뒤로 돌아 태랑을 바라보았다.
“덩어리, 우리 구면이지?
약한 여자는 그만 괴롭히고 이제 나랑 노는 게 어때?”
진의 말에 태랑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흥, 다리에 화살을 맞은 주제에 나에게 대적하겠다는 거냐?
네놈의 그 잘난 몸놀림도 이젠 네놈을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예전에 승부에서 자존심의 상처를 입은 태랑은 진을 죽이기 위해 빠르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쪽 자리에 화살을 맞은 진은 태랑의 검을 겨우겨우 피하고 있었고, 그의 몸에는 작은 상처가 한두 개씩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의 몸놀림이 조금 둔해졌다 싶을 때 태랑의 동작이 조금 커졌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진의 검이 태랑의 가슴을 베고 지나갔다.
마지막 진의 몸놀림이 예전보다 더 빨라 보이자 태랑의 눈은 경악으로 물 들어갔다.
“네..네놈….”
“왜, 화살 한 대 맞았다고 내가 다리를 못 쓸 거로 생각한 거야?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이 정도는 부상이라고 부르지도 않아.”
그렇게 태랑을 물리친 진은 천천히 평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자신이 믿고 있던 태랑이 무너지자 놀란 평은 이내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궁을 둘러싼 암월단의 존재 때문에 도망갈 곳을 잃고 말았다.
“네놈…..”
평은 자신의 계획이 진 하나 때문에 분쇄되자 진에게 격한 분노를 느꼈다.
분노에 찬 평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진은 이네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평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기억하느냐? 천추 설가의 식솔들이 네놈의 알량한 욕심 때문에 도륙되었다는 사실을?”
진의 말에 잠시 인상을 쓰던 평은 이내 어떤 사실이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뜨고 진을 다시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설마…. 그때 그 년이….”
“그때 살아남은 한 소녀가 낳은 아이가 이렇게 네놈 앞에 섰구나.”
“그렇다면… 네놈은….”
평이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진의 검이 평의 몸을 꿰뚫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평은 진을 올려다보며 광소를 터트렸다.
“큭큭큭… 그렇구나. 그렇게 된 거였어.
어리석은 녀석… 네놈도 결국 불나방에 불과하구나….
잊지 말아라, 네놈은 결국 그놈들에게 버려지게 될 테니까 말이다…
큭큭… 네놈이 지옥에 떨어질 날을 즐겁게 기다리고 있으마….”
진은 평의 죽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진의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게 평의 반란은 결국 천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