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121화 (121/325)

#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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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2월이 다 가고 3월이 다가왔다.

다행히 모두가 최선을 다하여 빠르게 움직여 준 덕분에 진성의 촬영분을 대부분 끝마칠 수 있었다.

이제 진성에게 남은 것은 후반부 대전투와 자잘한 장면 몇 개뿐이었고 이 부분들은 개인 스케줄이 끝나면 촬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제 내일부터는 제대로 다시 촬영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마음이 가벼워진 민수 앞으로 다가온 찬진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페이지가 많지 않은 얇은 대본 하나를 내밀었다.

뜬금없이 이게 뭔가 싶은 민수는 우선 받아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거…. 저랑 설아 씨가 같이 연기하는 장면이네요.

그런데….”

“그래. 조금 바뀌었지? 내용은 바뀐 게 없고, 작가랑 협의해서 감정 상태만 조금 조정했어.

대사도 별로 바뀐 게 없으니까 어렵진 않을 거야.”

“흠….”

찬진의 말대로 대사가 조금 미묘하게 바뀐 것뿐이었고 장면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별문제는 아니라고 하지만 영화 촬영 중에 갑자기 시나리오가 바뀌다니 민수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거 감독님 말대로 별로 바뀐 것도 없는데 굳이 대본을 수정한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래. 적어도 설명은 해줘야겠지.

지금 영화의 촬영상태를 보니까 이대로 촬영을 마치게 되면 영화가 엄청 빡빡해져.

이게 무슨 말이냐면 시작부터 모략과 전투, 암살 이런 것들 것이 끝까지 이어진단 말이야.

영화가 긴박하게 진행되고 텐션이 높은 건 장점이라지만, 관객들이 쉴 틈도 없이 계속 몰아치는 건 별로 좋은 건 아니지.

자극도 계속 주게 되면 결국에는 무뎌지기 마련이라 관객들의 긴장감을 때때로 낮춰줄 필요성이 있는데, 지금 우리 영화에는 그런 장면이 없어.”

“그러니까 결국 진이랑 연화를 이용해서 조금 부드러운 장면을 만들겠다는 거네요.

그래서 장면들이….”

며칠 전에 수연이 민수를 놀리긴 했지만 민수는 사실 별걱정을 하고 있지 않았다.

진과 연화의 씬들은 수연의 말처럼 그렇게 말랑말랑한 장면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복수귀인 진 에게 로맨스라니, 그거야말로 진정한 설정파괴 아니겠는가.

그냥 연화가 진 에게 조금 애틋한 감정이 가지게 되는 정도로 마무리되기 때문에 민수 입장에서는 특별히 생각할 게 없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바뀐 대본은 조금 달랐다.

가슴속에 복수만을 품고 살던 진이 연화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게 된다.

진이 연화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절대 연정이 아니었는데 지금 대본에는 진이 조금씩 연화에게 연정까지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장면이 지날수록 민수의 연기도 조금씩 다 달라져야 했다.

“음….”

갑자기 난이도가 올라가 버려 조금 난감해하는 민수를 보며 찬진은 솔직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야, 솔직히 미안해.

나도 인정한다.

갑자기 난이도 올라갔지?

게다가 드라마도 아니고 웬 쪽 대본인가 싶을 테고?

그런데 어쩔 수 없었어.

시나리오를 검수할 때는 배우들이 연기를 어떻게 할지 정확히 알 수 없잖아.

그걸 알면 그건 감독이 아니라 그냥 신이겠지.

배우들이 쟁쟁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지만 씬들이 그런 식으로 터져 나올지 내가 무슨 수로 알겠냐.

초반 부분 몇 개의 씬을 별다른 편집 없이 쭉 붙이기만 했는데 박진감이 장난 아니야.

이제 거기다가 편집에 CG까지 박을 건데, 그러면 더 긴장감이 넘칠 거라고.”

초반부 장면들이 너무 잘 뽑혀서 그렇다는 찬진의 말에 민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 민수는 조금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러면 조금 빨리라도 주시지. 아 그리고, 저 말고도 있잖아요.

천이랑 수월도 그런 역할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차라리 그쪽이 더 말랑말랑하지 않겠어요?”

민수의 말에 찬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민수에게 달래듯 설명을 시작했다.

“늦은 건 정말 미안한데.

진의 캐릭터 성을 훼손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수정하다 보니 조정하는 데 시간이 걸린 거야.

캐릭터를 해치지 않으면서 훗날 연화의 행동에 확실한 근거도 제시하고 분위기도 환기할 수 있게 대본을 수정하는 건 데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지.

수정은 준수 씨가 한 거니까 나한테 뭐라고 하진 말고.

그리고 네 말대로 천과 수월이 한다면 그건 말랑말랑이 아니라 끈적끈적 아니겠냐?

또 웃기는 소리이긴 하지만 어쨌든 천은 유부남이거든.

유부남한테 불륜을 강요하다니 이거 못된 친구일세.

마지막으로 나한테 따지지 마!

이거 원로 배우 세 분 모두 동의하신 일이니까.

내가 감독이라 총대 멘 거지, 전적으로 내 의견은 아니다?

그리고 캐릭터를 해친 것도 아니니까 정민수 배우님이 잘 해주실 거라고 믿고 그럼 전 가보겠어요.

불만 사항이 있으면 강철이한테 따지도록.”

민수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한 뒤 대본 하나만 남기고 사라진 찬진의 뒷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특히 그 시대에 황태자가 여자 하나 만난다고 불륜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찬진의 말이 틀린 건 없었다.

수월의 성향상 아마 둘이 그런 연기를 한다면 분명 조금 끈적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만약 일반적인 연기였으면 민수가 이렇게 토를 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필이면 로맨스 쪽 연기라니.

민수가 가장 자신 없어 하는 분야가 아니던가.

분노, 증오, 슬픔, 연민

이런 감정들을 연기하는 것에는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민수였지만 애정이나 사랑은 아직도 민수에게 조금 어려운 연기였다.

아무래도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감정이다 보니 그게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윤 대표에게 연기를 배울 때도 로맨스 쪽은 전혀 발전이 없었다.

윤 대표조차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으며 정말 사랑을 경험해 보기 전에는 감을 잡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생각했던 것이 다른 사람들의 연기를 베끼는 것이었다.

그래서 송포유를 촬영할 때도 태준의 연기를 베끼느라 그 애틋한 눈빛과 표정을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었는데….

원래대로라면 자신을 조금 애틋하게 바라보는 연화를 무덤덤하게 대하는 것으로 마무리될 연기가 이제는 연화와 감정을 교류하고 서로 미묘한 애틋함을 가진 것으로 표현해 줘야 했다.

그것도 하루 만에.

깊게 한숨을 쉰 민수는 다시 대본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완전한 로맨스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진의 캐릭터 성을 지키려다 보니 갑자기 진이 친절해지거나, 로맨티스트로 변하지는 않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언제까지 로맨스를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에 그런다면 그야말로 반쪽짜리 배우밖에 되지 않을 테니 그것은 민수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해야 했으니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어디서 보고 베껴라도 올 텐데.”

시간이 없었지만,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 여러 남자 배우들이 어떤 식으로 연기를 하나 몇 개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역시 자신이 적당하다고 할만한 연기를 찾기는 힘들었다.

로맨스의 천국이라는 한국 드라마답게 로맨스가 빠지진 않았지만, 막상 참고할 만한 것은 없었다.

끝까지 조금 애틋하면서 아련하고 미묘한 진 과 연화의 사이 같은 남주와 여주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드라마 초반에 주인공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에는 조금 그런 분위기가 있는 작품들이 몇 개 있었다.

민수는 그거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집중하여 시청했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는 못하였다.

“망했군…. 하긴 끝까지 남주와 여주가 서로 애틋하게 바라만 보는 드라마가 있을 리가 없지.

그런 드라마가 있으면 아마 시청자들이 속 터진다고 미친 듯이 항의할 테니 말이야.

게다가 드라마를 찾는다 쳐도 그걸 베끼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니 어차피 꽝인가.”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영화까지 뒤져서라도 찾아낼 수는 있겠지만 연기는 당장 내일이었다.

밤늦은 시간까지 찾아보던 민수는 결국 못 찾는다는 결론과 함께 될 대로 되라는 조금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잠을 청하였다.

내일 해보고 정 안되면 결국 일정이 미뤄질 수밖에 없을 거 같았다.

그나마 초반 촬영이 잘되어서 일정이 여유가 있으니 다행이었다.

민수는 평소처럼 아침에 촬영장을 찾았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였지만 오늘은 자신의 연기를 하려고 온 것이니 기분은 조금 달랐다.

촬영장에는 이미 경장으로 무장한 설아와 촬영을 대부분 종결한 수연 그리고 며칠간의 강행군으로 고생했던 태준이 기대 가득한 얼굴로 민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 민수 오늘 촬영에 대본이 조금 바뀌었다고 하던데. 준비는 괜찮으신가?”

평상시와 다름없이 가벼운 말투의 수연이었지만 오늘은 민수의 마음이 조금 무거워서 그런지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음….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해봐야죠.”

“난 바뀐 대본이 더 잘 나온 거 같아.

아무래도 영화를 너무 강하게만 끌고 가려고 하면 보는 사람이 조금 질려 버릴 수도 있거든.

강약조절이 그래서 필요한 거고.

그러니 대본이 갑자기 바뀐 거에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말라고.

영화가 더 잘되라고 바꾼 거니까 말이야.”

수연은 아무래도 민수가 갑자기 바뀐 대본에 마음이 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마 수연의 마음속에도 갑작스럽게 대본이 변한 건 조금 너무했다고 생각하고 있나 보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에 민수에게 윤 대표가 찾아 왔었다.

윤 대표는 어쨌든 이렇게 갑자기 대본이 변하는 건 제작팀 쪽 잘못이라고 볼 수 있으니 한번 해보고 정 안 되겠으면 일정을 조금 미뤄도 된다고 민수를 달래주고 가셨다.

그래도 윤 대표가 그렇게 말해주니 민수도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긴 했다.

하지만 사실 언제까지 로맨스 연기를 두려워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민수는 어쨌든 이 기회에 로맨스에 대한 감을 좀 잡고 싶기도 했다.

오늘 촬영할 장면은 평소에 몰래 잠행으로 황성 밖으로 빠져나가던 연화가 우연히 풍문으로 떠도는 흑월의 존재를 알게 되고, 혹시 흑월이면 황태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흑월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장면이었다.

혼자 있을 때는 자기 마음대로 다니다가 이제 호위무사가 생기는 바람에 호위무사 몰래 나가야 하는 연화는 진을 따돌릴 자신이 없어서 차라리 진과 동행하기를 청한다.

흑월을 앞에 두고 흑월을 찾고 싶다고 말하는 연화를 조금 귀엽게 생각한 진은 그런 연화의 장단에 맞춰서 같이 도성을 돌아다니며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민수와 설아가 연기를 시작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지켜보는 수연과 태준의 입에서는 신음만 새 나오고 있었다.

“흠….. 어색하네….”

“어색해…. 게다가 음…”

연화를 연기하는 설아는 정말 잘해 주고 있었다.

이미 연회를 통하여 연화가 진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그녀가 아닌 척 진을 슬쩍슬쩍 바라보는 연기부터, 진에게 잠행을 청할 때 진이 거절할까 가슴 졸이는 심정을 촉촉한 눈빛으로 표현한 것까지 너무 훌륭해서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민수가 연기하는 진은 조금 달랐다.

연화가 진에게 흑월을 찾아야겠다고 말할 때는 조금 당황한듯한 모습을 보여야 했고, 잠행을 청하면서 연화가 조마조마할 때는 조금 귀엽다는 듯 바라봐야 했지만, 그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것이 문제였다.

“분명 귀엽다는 듯 보고 있긴 한데…. 저건 여자를 보는 눈이 아니라 강아지를 보는 눈 같다고 할까?”

“이 장면은 훗날 진이 연화에게 호감을 조금씩 가지게 되는 시작점이나 다름없어.

그 귀엽다는 눈빛 안에는 애정이 반드시 들어가 있어야 할 거야.”

아니나 다를까 수연과 태준이 지적한 대로 감독은 바로 NG를 날리고는 민수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덧붙이기 시작했다.

“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태준은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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