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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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그렇게 태준과 강철, 그리고 진성의 씬들이 계속 촬영되었다.
그리고 수연과 설아는 진성, 강철과 함께 하는 장면 몇 개를 소화하게 되었다.
특히 태준의 경우, 천이 평과 황제의 세력 중 위치가 낮은 인물들을 위주로 하나씩 포섭하는 장면들을 무리 없이 소화해 내고 있었는데 이 장면들을 촬영할 때는 소희가 태준의 촬영에 함께하고 있었다.
소희가 맡은 수월은 흑월에서 정보를 다루는 명월단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천에게 믿을 만한 사람들이 누군지 추천하고 그들의 정보를 넘겨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내들이 모이는 곳에는 술이 있었고 당연히 여자가 따르기 마련이었으니 기녀들과 주점의 일꾼들로부터 정보를 취득하고 있는 수월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수월은 도성 내 가장 큰 기루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그 면모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천과 접촉하기 쉬웠고, 그렇게 수월이 건네주는 정보로 천은 자신을 따를 옥석을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민수는 별다른 특별한 촬영이 없었음에도 그냥 꾸준히 촬영장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화려한 궁장을 입은 설아가 함께하고 있었다.
연화는 본격적으로 촬영을 할 때는 주고 가벼운 차림인 경장을, 그리고 다른 배우들의 옆에서 보조할 때는 화려한 궁장을 입었는데 요즘은 거의 궁장을 입고 있었다.
한창 촬영에 집중하던 김찬진 감독은 저쪽에서 촬영장면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민수와 설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저 녀석들은 왜 계속 저기 있는 거야? 오늘 특별한 촬영도 없잖아?”
자신의 촬영분을 확인하던 강철과 진성은 찬진의 말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민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의 민수를 확인하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보는 것만으로 도움이 되긴 해.
가끔은 현장에서 배우들이 집중해서 하는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 실력이 늘기도 하니까.”
“이거 나 때문에 이렇게 일정이 잡혀 버려서 조금 미안한걸.
저렇게 며칠 동안이나 연기를 하지 않게 되면 감도 조금 떨어질 텐데 말이야.
차라리 스턴트맨들처럼 한동안 나오지 말라고 하면 좋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화면에 나와야 하니 그것도 안 되고 말이야.”
진성이 민수에게 조금 미안함을 느끼는 듯 하자 강철은 웃으면서 미안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물렁물렁한 녀석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 지금도 집중력을 잃고 있지 않을 겁니다.
정 그러시면 나중에 연기에 대한 조언이나 좀 해주시고요.”
“조언이라…. 저 녀석 연기하는 걸 보니 자기 나름대로 틀이 확고해서 딱히 충고해 줄 게 없던데.
저런 애들은 솔직히 기본만 잡아주면 알아서 크는 스타일이라서 말이야.
차라리 그냥 자기가 궁금한 게 생겨 물어볼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게 가장 나을 거야.”
“음…. 역시 그런가요.”
그렇게 배우들이 연기하는 동안 민수는 자신의 연기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고 설아는 그런 민수 옆에서 조용히 인터넷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설아는 인터넷에서 어떤 기사를 발견하고는 민수의 옆구리를 꾹 하고 찔렀다.
“오빠. 이거 보세요.”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었던 민수는 설아의 손가락이 자신을 찔러대자 깜짝 놀라 설 아를 바라보았고 설아는 그런 민수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카루스 콘서트가 중국에서 크게 열리고 있으며 사람들의 반응이 폭발적이라는 기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오호….”
민수도 관심이 생기는 주제라 기사를 천천히 읽어 보았다.
민수가 촬영에 들어가고 리온도 중국에 가서 콘서트를 하는 상황이라 민수는 한동안 리온과 연락을 나누지 못했었다.
그런데 기사를 보니 지금 이카루스가 중국에서 매우 인기가 있는 거 같았다.
민수는 콘서트가 연일 매진이라는 기사 내용을 보며 역시 이카루스는 이카루스구나 싶었다.
민수가 예상했던 대로 이카루스의 이번 타이틀곡은 발매한 지 석 달이 넘었지만 아직도 스트리밍 차트 상단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어떤 아이돌이 신곡을 내면 잠시 내려오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올라가는 위용에 사람들도 많이 놀라는 중이었다.
“이카루스는 확실히 대단한 거 같아요.
이번에 중국에서 부르는 모든 노래를 중국어로 준비해 갔다네요.
중국어로 연기하는 것도 힘든데, 아마 한국 곡을 중국어로 부르는 것도 엄청 힘들겠죠?”
기사를 보며 설아가 이야기를 꺼내자 민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카루스가 엄청 힘들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아이돌 가수가 중국이나 일본에 진출해서 활동할 때는 대부분 차트에 올릴 타이틀곡 정도만 그 나라 언어로 편곡하거나 디지털 싱글로 발매하는 곡들만 따로 편곡하곤 했는데, 콘서트에서 부를 모든 곡을 편곡해서 연습한 아카루스는 조금 특별한 경우였다.
게다가 콘서트를 여는 지역마다 사람들의 선호도에 따라 곡들을 바꾸고 있었으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까지 나온 모든 곡을 그렇게 준비한 것 같았다.
그러니 딱 봐도 하루 이틀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날개 엔터가 중국진출에 얼마나 사활을 걸었는지 이카루스가 준비한 것만 봐도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중국어 노래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민수는 문득 어쩌면 우리도 중국에 가서 홍보해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 중국에서 잠시 활동한다면 어떤 활동을 해야 임팩트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순간 민수는 전생에 세라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일들이 떠올랐다.
“설아 씨, 혹시 중국 노래 중에 아는 거 있어요?”
민수의 질문이 조금 뜬금없었는지 설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민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민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흠… 역시 그런가요.”
“왜요? 오빠.
제가 혹시 중국 노래를 부를 일이 있나요?”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설아에게 민수는 그냥 지나가듯이 우리 영화가 중국에서 스크린을 많이 잡게 되면 우리도 홍보차 중국에 가야 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이야기했는데 설아는 그런 민수의 말에 너무 설레발이라며 웃으면서 타박할 뿐이었다.
“음…. 그러면 좋은 일이긴 하겠지만요.
아, 오빠는 그럼 제가 홍보할 때 가능하면 장기자랑 같은 거로 중국노래를 불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하여간 오빠는 제 노래를 너무 좋아하신다니까요.”
설아의 노래를 좋아했지만 이런 식으로 해석되는 건 별로 달갑지 않았던 민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애써 부정했지만 설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난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들을 거라는 듯 헤실거리면서 고개를 젓기만 하는 설아에게 할 말이 없어진 민수는 이내 포기하고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설아는 민수의 말이 인상 깊었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민수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만 약에요. 제가 중국에서 만약 노래하게 되면 무슨 노래가 좋을까요?”
설아의 말에 민수는 전생에서 세라가 중국에서 불러서 중국인들의 탄성을 불러낸 노래들을 생각해 보았다.
좋은 노래가 너무 많아서 바로 추천하기는 힘들었지만 결국 개인적으로 민수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곡 하나를 설아에게 추천해 주었다.
이건 솔직히 그냥 민수의 개인적인 욕심이었다.
이번 생에서도 그 설아가 부르는 그 노래를 들어 보고 싶다는 그런 욕심 말이다.
“음…. 제 개인적으로는 등려군이 불렀던 첨밀밀이나…. 월량대표아적심이 좋을 거 같긴 한데요.
아직도 중국인들에게 큰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가수니까요.
영화 첨밀밀의 OST이기도 하니 배우인 설아 씨가 부르기에 적당한 것 같기도 하니까요.
다만…..”
“다만?”
“중국인들의 등려군 사랑이 생각보다 커서 제대로 못 부른다면 아마 안 부르는 것만 못하긴 할거에요.”
민수의 말에 설아는 조금 고민하는 듯 보였다.
설아는 사실 두 곡의 노래를 다 알고 있었다.
어머니인 민 여사가 두 노래를 매우 좋아하다 보니 어려서부터 자주 들었고, 그래서 너무 익숙한 곡이었기 때문이다.
“음… 만약 둘 중에 한 곡을 고른다면 무슨 노래가 더 좋으세요.”
설아의 말에 민수의 눈이 조금 아련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이내 피식 웃으며 설아를 바라보았다.
“음 역시 하나를 고르자면 역시 월량대표아적심이겠네요.”
월량대표아적심은 예전에 세라가 불렀던 노래 중에 민수가 가장 좋아했던 곡이었다.
세라는 이 노래를 중국에서도 불렀는데 등려군이 불렀던 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로 불렀음에도 중국인들의 엄청난 찬사를 받았었다.
민수는 이 노래를 권하면서도 설아가 자신이 아는 그 노래처럼 부를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세라가 부른 월량대표아적심은 그녀의 나이가 이십 대 후반이 되었을 때 불렀던 것이고, 등려군의 원곡과는 다르게 미치도록 애절한 곡이었기 때문이다.
곡 자체는 그대로 두고 목소리로만 슬픔을 표현했던 세라의 노래에는 애절한 세라의 감성이 그대로 묻어있었고 그 당시 민수는 이 곡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때부터 민수가 세라의 노래를 모두 찾아 듣게 되었으니 민수에게는 조금 특별한 곡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지금 아직 20대 초반이면서 남부러울 거 없는 입장인 설아가 이 노래를 그렇게 부를 리가 없었으니 그 노래는 이제 민수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추억일 뿐이었다.
“오호. 오빠는 그런 노래를 좋아하셨군요. 저도 참고할게요.”
웃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설아를 보면서 민수는 조금 마음이 답답해졌다.
전생에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요즘에 생각해보니 민수가 세라를 많이 동경했었던 거 같다.
처음에 윤 엔터에서 설아를 봤을 때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그런 감정을 가졌는지도 몰랐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도피성 몰입 증후군은 서서히 나아갔고, 자연스럽게 자신에 대하여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보니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짙은 슬픔이 묻어 있던 그녀의 노래, 그리고 묘하게 퇴폐적이던 그녀의 외모, 그리고 항상 어떤 아픔을 품은 것 같은 눈빛까지.
잘 생각해보니 민수의 이상형에 가장 가까웠던 여자가 세라였던 것이다.
예전에 설아가 이상형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었을 때 비로소 깨달은 것이었는데, 자신의 머릿속에 하나씩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합쳐보니 결국 세라가 나오는 바람에 민수는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제는 없는 사람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 들어 민수가 설아를 볼 때마다 묘하게 세라랑 겹쳐지는 느낌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민수는 이것이 설아에 대한 호감인지, 아니면 전생에 세라를 설아와 겹쳐보는 것인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이렇게 노래를 흥얼거릴 때는 그런 느낌이 더 심해졌으니, 정말 수연의 말대로 민수가 설아의 노래에 완전히 넘어 갔다고 생각해도 틀린 소리가 아닐 것이다.
민수는 그래도 이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세라를 생각해서 설아를 받아 들인다면 그건 설아에게 너무 실례였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설아를 무작정 밀어내지도 못하겠으니 곤란하기만 했다.
그래서 결국 민수는 그냥 우선은 감정이 흐르는 데로 두고 보기로 했다.
아직 자신도 설아도 젊으니 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설아도 자신과 꼭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거 같진 않으니 이대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정말 설아에게 마음이 많이 기울어 버리면 그건 그거대로 좋은 일이었고, 그게 아니라면 지금처럼 좋은 동료로 지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설아와의 관계를 정의한 민수는 이카루스가 중국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이 이번 영화에 도움이 될지 생각해 보았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던 민수는 저 이카루스가 어쩌면 우리 영화를 더 높은 곳으로 올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나중에 리온에게 밥이라도 한 끼 사야겠다고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민수는 다시 촬영장 쪽으로 눈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