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119화 (119/325)

#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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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숙이 촬영에 합류한 이후에도 촬영은 거의 진성의 씬을 찍는 것 위주로 진행되었다.

이제 며칠 후면 3월이 되고, 그러면 진성이 “어두운 거리”의 개봉 일정에 따라 개인 스케줄을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진성, 강철과 거의 한 몸처럼 움직이는 태준 역시 계속 촬영을 해야 했다.

오늘 촬영할 장면도 전면에 나선 천이 황제와 평 사이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그런 장면이었다.

천은 황제에게는 믿음직한 아들이 되어야 했고, 평에게는 너무 멀어서 적이라는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되는 것은 물론 너무 접근해서 의심을 살 필요도 없었다.

특히 천이 평을 대할 때는 너무 현명해 보여서도, 그렇다고 너무 미련하게 보여서도 안 되었기 때문에 태준은 진성과 연기를 할 때마다 조금씩 피가 말리는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이군. 상반되는 두 가지를 표현한다는 거 말이야.

수연 선배가 투덜거릴 만하네 이건.”

자신을 조금씩 의심하는 듯한 평에게 불려가 한껏 능청을 떠는 연기를 마치고 나온 태준은 민수가 지켜보고 있는 곳으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민수는 조금 지친 듯한 태준에게 따듯한 물 한잔을 건네고는 예전에는 이런 연기를 한 경험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뭐… 있다고 하면 있긴 한데…. 그건 배역의 내면을 은밀하게 표현해 주는 정도였지 이렇게 대놓고는 아니었어.

아까도 봤잖아.

선생님이 입으로만 웃으시면서 소리 장도 날리시는 거.

거기다 대고 못 들은 척 의뭉을 떨어야 하니 역시 쉽진 않더라고.

그렇다고 너무 천진하게 굴면 캐릭터가 깨져 버리니 적어도 관객들이 보기에 저놈이 지금 못 들은 척 한다는 걸 느낄 수는 있게 해줘야 하잖아.”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한 것 같은데.”

맡은 배역의 연기가 쉽지 않아 고민하는 태준을 바라보며 민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보니 배역이 이렇게 되어서 민수는 자신이 존경하던 배우들과 같은 영화를 찍으면서도 직접 같이 연기하지는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물론 같이 등장하는 장면들이 적진 않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연화가 둘을 만날 때 옆에서 병풍 역할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 장면에서 진이 거기 있다는 것은 진이 직접 그 둘을 보고 그들의 심리를 짐작할 기회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 내적으로는 의미가 있었지만, 그걸 연기라고 하기는 조금 힘들었기 때문에 민수로서는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요즘 태준이 진성, 강철과 미묘하게 심리전을 전개하는 정면을 찍을 때마다 조금 부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문득 자신이 너무 배가 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배우인 이상 그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되지 않겠냐고 합리화했다.

“하…. 내가 차라리 천을 해야 했는데….”

민수가 자신도 모르게 아쉬움에 섞인 속마음이 튀어 나와버려서 당황하고 있는데 태준은 그 말을 듣고는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무래도 이 역할이 배우로서는 조금 탐낼 만한 자리이긴 하지.

아마 젊은 남자 배우라면 조진성, 윤강철과 호흡 맞추는 것을 감히 거절할 배우가 드물긴 할 거야.

그러고 보니 내가 확실히 운이 좋긴 하네.

확실히 정 배우가 이 배역을 탐내는 건 역시 충분히 이해가 갈만한 일이야.”

다행히도 태준은 민수의 별다른 오해 없이 정확하게 간파했다.

만약 태준이 민수의 뜻을 곡해했으면 민수가 태준 자신보다 더 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들려 기분이 상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민수의 말을 받은 태준은 웃으면서 민수의 어깨를 한번 두드렸다.

“그런데 이번 배역은 정말 어쩔 수 없으니까.

정 배우는 우리 아버지랑 너무 안 닮아서 말이야.

게다가 은근히 진성 선생님하고는 느낌이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런데 아버지 젊은 적이랑 분위기가 빼다 박은 내가 진성 선생님과 혈연이고, 선생님하고 은근히 닮은 정 배우가 아버지의 아들이면 왠지 조금 이상할 거 같아.”

배우들의 외모를 가지고 설명하는 태준의 말에 민수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끄덕여졌다.

이 영화가 가진 강점 중 하나는 혈연으로 나오는 배우들이 은근히 닮았다는 거였다.

실제 가족인 강철과 태준, 그리고 설아는 말할 필요도 없었고 진성과 민수조차 미묘하게 느낌이 비슷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 태준은 평소의 그 조금 익살스러운 얼굴로 돌아와 민수에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정 배우처럼 그런 환상적인 액션을 연기할 수가 없다는 거야.

음… 나도 배우이다 보니 액션을 전혀 못 하는 건 아닌데, 너처럼 그렇게 화려하게는 못한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겠지?

킥킥, 진보다 잘 싸우는 천이라니. 그건 그거대로 웃기려나.

하지만 그러면 우리 영화가 주는 맛 한가지가 사라져 버리니 어쩔 수 없지 않겠어?”

그렇게 민수를 달래준 태준은 다시 웃으며 다음 촬영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이 배역은 나에게 맡겨 주시라. 이 윤태준이가 싸움은 못 해도 입으로는 잘 싸우니까 말이야.”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도 아는데…..

그냥 난 선생님들이랑 같이 연기할 기회가 지금이 마지막이니만큼 좀 아쉬워서 그런 거뿐이야.”

“이거, 정 배우가 탐내지 못하게 내가 더 기운을 내야 겠구만.

제대로 못 하면 나중에 두고두고 안줏거리 생기겠어.”

민수의 아쉬움을 잘 이해하고 있는 태준은 민수에게 손을 흔들어 준 다음 다시 촬영장으로 이동했다.

민수는 그런 태준의 뒷모습을 보면서 입맛을 조금 다실 뿐이었다.

촬영장에서는 태준과 강철의 촬영이 한창이었다.

요즘 천과 평의 여러 번 회동을 한 사실을 알고 있는 황제는 혹시 황태자가 평의 꼬임에 넘어간 것이 아닌지 우려하고 있었다.

오늘 천은 그런 황제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자신이 황제와 황실의 편임을 각인시키고 있었다.

민수는 태준이 강철과 연기하는 것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저 또한 황실의 일원이며 심지어 전 다음 보위에 오를 황태자이옵니다.

그래서 황실에 힘이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온데 어찌하여 제가 황실을 좀먹는 무리인 평과 연수하겠나이까”

황제가 슬쩍 의심쩍다는 듯이 천을 떠봤지만 천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리고 사리에 맞는 천의 말에 황제는 천에 대한 의심을 조금 접어 두었다.

“폐하, 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모인 이합집산에 불과하옵니다.

그런데 저들이 지금 왜 한뜻으로 움직이고 있겠나이까.

그건 폐하의 힘이 저들의 생각보다 강하기 때문이옵니다.

만약, 저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힘이 폐하를 압도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면 저들은 다시 자신들의 권력을 위하여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그들을 일소할 완벽한 기회가 될 것이옵니다.”

황제는 지금 평에게 계속 불의의 일격을 맞고 세력이 줄어드는 중이었다.

그것은 천의 수작이기도 했지만 천이 평의 세력을 줄이기 위해 공작을 벌일 때도 황제의 세력이 줄어드니 천으로서도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고할 순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천은 가능하면 황제가 기분 좋아할 만한 이야기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다만 천은 지금의 사태 뒤에는 간자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천은 황제에게 이점을 확실히 알려 주고 싶었다.

만약 간자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가는 천이 손써 보기도 전에 평에게 쓸려나가고 말리라.

적어도 자신의 힘을 더 키우기 전까지는 황제가 굳건히 버티고 있어야 했다.

“폐하, 지금 폐하를 모시는 자들을 얼마나 믿으실 수 있사옵니까?

그들 중 자신이 또 다른 평이 되어 황실을 능멸할 역신이 될 자들이 분명히 존재하옵니다.

그러니 옥석을 골라내고 불충한 자의 힘은 이 기회에 깎아 나려야 할 것이옵니다.”

은근히 황제 진영에 황제를 완전히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음을 돌려서 말한 천은 황제에게 하나의 계략을 제안했다.

“소자에게 한가지 계책이 있사옵니다.

이번에 폐하를 따르는 자들에게 동성 상단을 치는 척하라고 명하십시오.

그리고 폐하의 신하 중 가장 충성스러운 자를 불러 몰래 동성 상단을 정말로 치라고 명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상대의 경계가 삼엄하다면 그냥 물러나라고 하십시오.

폐하의 진영에 간자가 있다면 아마 동성 상단의 경계가 느슨할 것이옵니다.”

천의 제안에 황제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만약 간자가 있다면 평의 세력인 동성 상단을 분쇄함과 동시에 간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동성 상단의 경계가 삼엄하다면 그건 자신의 진영에 간자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 천의 계책은 확실히 한번 해볼 만한 것이었다.

황태자 천은 시종일관 당당한 모습으로 황제와의 독대를 마쳤다.

천의 계획은 기본적으로 무조건 평부터 제거하는 것이었다.

평을 제거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평의 세력을 최대한 줄여 놓는 것.

그것이 천의 첫 번째 목표였다.

황제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황실에 충성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들 중에서도 훗날 지금의 평처럼 제국을 좌지우지할 욕심을 가진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중에 천이 포섭 해야 하는 옥석이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평의 세력들은 말 그대로 포섭할 수 없는 적에 불과했다.

강한 제국을 위해서는 그들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했다.

황제가 천의 계책을 따르면서 국면이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한다.

계속 득세하던 평의 세력이 잠시 주춤하게 되고 황제의 세력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태준은 연기를 마치고 다시 민수와 이야기를 나누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이번 장면은 태준에게 수월한 편이었다.

속마음을 감추기보다 포부를 들어내는 천의 모습이 더욱 연기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아흐…. 앞으로도 이런 장면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수고했어. 윤 배우.”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안도하는 태준을 보며 민수는 자신이 전에 찍은 장면들을 회상했다.

날아오는 화살을 쳐 냈던 그 장면에서 조금 고생을 했었기 때문에 민수의 기억 속에서도 오랫동안 남는 그런 씬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황제는 천의 말을 따르고 동성 상단을 공격한다.

천은 당연히 동성 상단의 방비가 허술할 것으로 생각하며 진을 보내 경과를 확인하고 오라고 명한다.

하지만 동성 상단은 방비는 물 샐 틈조차 없이 완벽했고, 이대로라면 황제가 간자가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게 될 상황이었다.

여기서 진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진은 황제의 공격이 있기 전에 동성 상단에 침입해 상대의 경비병을 하나둘씩 암살하기 시작했고, 결국 동성 상단의 경계를 강제로 허술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 뒤에 자연스럽게 황제가 공격을 시작하고, 황제는 동성 상당은 성공적으로 제거하게 된다.

그리고 천의 말대로 자신의 진영에 간자가 있음을 확신하고, 그에 대해 대비를 하게 된다.

다만 천의 머릿속은 복잡해 졌다.

분명 간자가 있는 것은 확실한데 상대가 동성 상단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는 사실이 천을 고민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황제 주변에 인물들을 하나씩 살펴본 후 천은 간자가 누군지 알아채게 된다.

황제의 호위무사.

황제가 어떤 일이 있어서 떨어지지 않고 20년간 황제를 지켜왔던 그가 바로 평의 간자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천은 이 사실을 이용해 평에게 피해를 줄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

그러는 한편 천은 혼자서 상단 하나를 괴멸시키다시피 한 진의 위력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아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검은 개를 기르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천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진을 써서 평의 세력을 깎아내리게 된다.

“이제 당분간은 계속 윤 배우나 대표님, 그리고 선생님의 촬영이 이어지겠네?”

“아무래도. 2월 중에 찍어 놓을 수 있는 걸 다 해놓으면 좋겠지.

그러면 3월 중에는 진의 촬영분을 정리하고 이제 마지막 씬만 찍으면 될 테니까 말이야.”

태준의 말에 민수는 조금 무료함을 느꼈다.

확실히 강철, 진성, 태준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는 느낌이긴 했지만,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것만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정이 그러니 어쩔 수가 없긴 했다.

다시 태준이 다음 장면을 연기하기 위하여 자리를 뜨자 민수는 자신을 달래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하며 태준이 연기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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