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118화 (118/325)

#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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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가 소희의 연기에 감탄하고 있는 와중에 옆에 있던 수연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와… 쟤는 저렇게 춤을 잘 추고…. 우리 설아는 노래를 그렇게 잘하고, 그에 비하면 난 진짜 할 줄 아는 게 없는거네.

정말 세상은 불공평한 거 같아.”

민수는 어이가 없어서 작게 투정 부리고 있는 수연에게 네 동안과 피부가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애써 참으면서 수연을 달래듯 입을 열었다.

“음…. 다들 잘하는 것 하나 정도는 있는 거죠. 선배는….음….. 그래.

선배는 대신 게임을 엄청나게 잘하시잖아요.

그러니 기운 내세요.”

민수의 말에 잠시 표정이 밝아 졌던 수연은 이내 다시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 내가 그건 정말 자신 있긴 한데 여배우가 게임을 잘하는 게 장점이 될 수 있을까?”

민수는 그나마 찾다 보니 그런 말을 하게 되었지만, 수연의 말에 정확히 어떤 장점이 될 수 있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장점이긴 하니까 나중에라도 쓸모가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었다.

그렇게 소희와 태준의 씬이 완료되었고, 이제 다음으로 흑월의 본거지로 안내된 천이 설과 만나는 장면을 촬영하게 되었다.

이 장면에서는 마지막 부분에 진 까지 천에게 소개되기 때문에 민수도 잠시 참여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세트장 한 곳에서는 이미 준비를 마친 정윤숙 선생님이 배역에 집중하고 계셨다.

민수는 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작은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정윤숙이 이번에 연기할 설은 복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얼음 같은 여인이었다.

복수가 인생의 목표인 설은 진을 바라보며 항상 애정과 증오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가끔은 진을 이용해 복수하는 것이 정말 정당한 것인지 회의감을 가지기도 했었는데, 이렇게 복잡한 역할이다 보니 연기 내공이 깊은 정윤숙이라도 쉽게 연기하기는 어려운 배역이었다.

게다가 배역의 난이도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촬영이 많지 않은 역할이었으니, 어떻게 생각해 보면 처음에 민수가 맡았던 윤 진 역할 하고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배역을 맡긴 주제에 중국어로 연기까지 부탁했으니 윤숙 입장에서는 참으로 어이가 없을 만한 상황이었다.

아니 어쩌면 차라리 출연이 많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만약 배정된 씬 까지 많았다면, 윤숙 입장에서는 정말 더 짜증이 몰려왔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준비가 끝나고 윤숙과 태준이 촬영을 시작하였다.

윤숙은 자신의 복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는 주제에 백성을 위하여 평과 황제를 몰아내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천에게 마음속 깊이 감복하는 척 옆에서 부추기는 설의 역할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이 눈치채지 못하게 번뜩이는 설의 눈빛에서 그녀가 조금 딴마음을 먹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입으로는 황태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자신이 딴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암시하는 그런 눈빛 연기를 하는 것.

그것이 이번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는데 윤숙은 그 부분을 아주 자연스럽게 잘 표현하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진이 등장할 차례가 되었다.

자신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며 앞으로 황태자가 이룰 대업을 뒷받침할 거라는 소개와 함께 진은 굳은 얼굴로 황태자 앞에 섰다.

아무런 말 없이 황태자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진.

이제 복수를 위해 사지가 될지도 모를 황궁으로 들어가게 되는 아들에게 설은 어떠한 감정도 내보이고 있지 않았다.

진과 그를 따르는 암월단에 대하여 소개를 받은 천은 흡족한 기분에 고개를 끄덕이며 설의 처소를 나선다.

그리고 진은 그런 천을 뒤따르고 있었다.

진이 설의 처소를 나서기 직전 마지막으로 설의 얼굴을 한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려서부터 세뇌를 당하다시피 복수를 주입 당한 진이 황궁에 들어가 반드시 평을 척결하겠다는 굳은 의지에 찬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설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아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한 줄기도 묻어나지 않은 그녀의 얼굴에 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갈 뿐이었다.

그렇게 진이 나가고 설의 거처 문이 닫히자 그때야 설의 얼굴에 여러 가지 표정들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러한 표정 변화는 설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명확하게 표현해 주고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마지막 윤숙의 표정 연기를 살펴보던 민수는 그녀의 풍부한 표현력에 작게 감탄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 수연이 이대로 연기 경력을 더 쌓는다면 저렇게 오묘한 표정 연기를 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느냐는 상상을 하며 민수는 역시 선생님의 연기 내공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어서 촬영된 중국어 연기에서도 선생님의 표현력은 나무랄 때가 없었다.

사실 윤숙의 연기에 민수가 토를 다는 것은 웃긴 일이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민수도 좀 더 신경 써서 윤숙을 관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민수는 만족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결국 중국어로 연기하는 장면은 총 네 개의 컷, 그리고 두 가지 구도로 촬영되는 동안 총 여섯 번의 NG를 기록하면서 무난하게 마무리 되었다..

촬영을 마치자 윤숙은 작게 한숨을 쉬며 자신이 NG를 낼 때마다 다가와 발음을 교정해준 소희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고, 예쁜이 고마워.

내가 네 녀석 덕분에 산다.”

그렇게 소희에게 활짝 웃어 보인 윤숙은 숨을 죽인 채 자신의 연기를 감상한 젊은 배우들 곁으로 다가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여기에 윤 엔터 새싹들이 다 모여있구나. 호호호.”

부드럽지만 친근한 인상, 그리고 어디에서인가 한 두 번 씩은 들어 봤을 법한 익숙한 목소리.

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개성이 강하지 못한 것이 배우 정윤숙의 약점이라고도 설명하지만, 민수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은 배우 정윤숙의 가장 두드러지는 강점이었다.

그런 그녀의 외모는 보통 때는 친근하고 다정한 배역을 수월하게 연기할 수 있게 해주었고, 때에 따라서는 이번처럼 몇 가지 화장과 의상을 통해 전혀 다른 성격의 배역까지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여러 배역을 폭넓게 소화할 수 있다는 것.

민수가 생각하는 정윤숙 선생님의 강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연기할 때는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윤숙은 연기를 마치자 마치 동내에서 볼 법한 아주머니처럼 푸근한 얼굴로 일행을 둘러 보았다.

배우 하나하나의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나누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민수는 조금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 그러네. 이모님하고 비슷한 느낌이야.’

지금까지 자주 접했던 민 여사님이나 조윤희 선생님은 기본적으로 아주 단아한 외모에 부드럽게 웃는 표정이지만 그 속에 묘한 카리스마를 간직한 분들이었다.

그래서인지 항상 사람을 살짝 긴장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정윤숙 선생님은 정말 친근한 이모님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서슴없이 다가와 두 손을 맞잡으며 웃는 모습에서 정말 정신적인 장막이 모두 해체되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을 잘 대하지 못하는 소희조차 선생님께 주저하지 않고 다가가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보니 선생님의 성향이 어떤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민수도 전생에 정윤숙에 대한 이야기 몇 가지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정윤숙이 연기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배우들의 기 싸움이 없다는 거였다.

저렇게 사람 좋은 정윤숙이지만 연기할 때 조화나 인화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촬영 분위기를 해칠 만 한 일을 하는 배우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한다.

보통 원로 연기자들이 어린 배우들이 투덕투덕하는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에 비하여 선생님은 그런 것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처음에 한 번 발각되면 기본적으로 조용히 불러 타이른 후에 경과를 살펴본다.

그리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 정말 혼이 나갈 정도로 호되게 야단을 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윤숙에게 혼이 났는데도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상황은 더욱 안 좋아진다.

그 뒤로 정윤숙한테까지 버릇없이 구는 녀석이라는 낙인이 찍혀 버려 중견 이상의 배우들이 그 배우와 연기하는 것을 꺼리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전도유망한 배우라도 수많은 중견 배우 대부분에게 견제를 받는다면 배우 생활이 고달파지기 마련이니, 정윤숙과 연기하는 배우들은 가능하면 서로서로 조심하면서 마찰 없이 연기한다는 이야기였다.

민수도 들은 이야기라 다소 과장이 끼어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이야기로 드러난 선생님의 성격과 성향은 아마 거짓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던 윤숙은 민수에게 다가와 푸근한 얼굴로 민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민수와 눈빛을 교환하던 정면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린 녀석이 눈빛이 좋더구나.

예전에 진성 오빠 보는 기분이었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민수라고 불러도 되지?”

“네 선생님. 그렇게 편하게 불러 주세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민수가 반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드리자 윤숙은 민수를 바라보며 더욱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성 오빠도 그렇고, 소희도 그렇고 너에 대하여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더구나.

앞으로 잘해보자.”

그렇게 민수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준 윤숙은 웃으며 촬영장에서 물러났다.

윤숙이 물러난 촬영장에는 이제 민수와 소희의 촬영만은 남겨 놓고 있었다.

이제 황궁으로 떠나는 진은 마지막으로 수월에게 흑월과 어머니를 부탁하게 된다.

수월은 평에게 모든 가족을 잃은 뒤 설에게 거두어진 아이였기 때문에 다른 흑월의 원로들과 마찬가지로 평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진에게 연정을 느끼고 있었던 수월은 우연찮은 기회에 진이 평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후부터는 진에게 큰 애증을 느끼게 된다.

진은 어렸을 때부터 수월을 귀여워했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다른 원로들이 자신을 대하는 것처럼 수월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하자 그때 이후로는 수월에게 거리감을 두고 있었다.

진은 수월의 태도가 변한 순간부터 자신에게 밝힐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하지만 그걸 굳이 따져 묻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말대로 원수를 갚는다면 그때부터 모든 일이 순리대로 풀릴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진이 떠나기 전,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흑월을 부탁하자 수월은 권태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둘의 시선이 서로를 바라보는 동안 수월의 눈동자가 잠시 연민으로 물들었다가 빠르게 다시 원래의 권태로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시선을 교환한 후 진은 미련 없이 흑월을 떠나 궁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런 진의 뒤에는 흑월에서도 꺼리는 암월단이 뒤따르고 있었다.

수월은 그런 진을 뒤에서 지켜본다.

“불나방…. 진 오라버니는 그저 불나방이구나.

저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복수만을 위해 살아가게 만든 어머니나 흑월을 진정 오라버니의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알면서도 사실을 밝히지 않은 나 역시도….

어쩌면 진정한 죄인은…. 진 오라버니가 아니라 우리 모두일지도….”

처연하게 중얼거리는 수월의 목소리가 단호한 표정으로 황궁에 들어가고 있는 진의 모습과 대비되어 더욱 극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둘이 서로의 안부를 무덤덤하게 묻고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장면, 그리고 진이 궁으로 드는 장면, 그 모습을 보는 수월의 독백장면까지.

촬영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민수는 소희가 중국어로 연기하는 장면에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소희에게 강습을 받을 때도 느꼈지만, 소희의 중국어 연기는 한국어로 하는 연기보다 더 뛰어난 무언가가 있었다.

방금 독백도 한국어로 할 때는 처연한 느낌만 들고 있었는데 그걸 중국어로 옮기자 확실히 처연한 느낌에 애증까지 더해진 기분이었다.

“정말 소희는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대단한 배우일지도…..”

민수는 자신이 중국어로 연기할 때 한국어로 할 때 보다 미세하게 감정전달이 미숙한 것처럼 지금 소희가 한국어로 연기하는 것은 자기 본 실력을 완벽하게 발휘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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