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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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동안 짧은 휴식을 마치고 다시 촬영이 재개되는 오늘, 촬영장에는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정윤숙이 배우진에 합류했다.
처음에 알려진 계획은 3월 초였지만 생각보다 대본 숙지가 빨리 끝나는 바람에 조금 서둘러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거기에는 소희의 노력이 큰 몫을 하였는데, 배우들은 자신의 연기에 정신이 팔려 소희가 없어졌는지도 몰랐지만 소희는 배우들이 연기하는 시간 동안 윤숙에게 가 그녀의 대본연습을 도와주고 있었던 것이다.
강철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촬영장에 등장한 윤숙을 웃으며 환영해 주었고, 윤숙은 자신의 합류가 너무 늦었음에도 웃으며 환영해 주는 강철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미안, 좀 늦었지? 그래도 그만큼 준비는 확실했으니 이 누님을 믿어봐”
윤숙은 애써 미안한 표정을 감추며 덤덤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강철은 지금까지 윤숙을 오래 봐온 만큼 그녀가 지금 많이 미안해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미안한 건 강철 자신이었다.
지금 윤숙이 이렇게 늦게 합류할 수 밖에 없었던 건 결국 자신이 그녀에게 중국어로 연기해 주기를 요청했기 때문이니 말이다.
자신의 욕심으로 인하여 안 해도 될 수고를 하는 윤숙.
하지만 그녀는 프로답게 자신의 몫을 충분히 준비해 온 것으로 보였다.
강철은 자신만만한 윤숙의 태도에 그녀의 준비가 완벽하고, 이제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어림잡아도 일주일은 빠르게 윤숙이 합류한 만큼 영화의 제작도 그만큼 빠르게 진행될 테니 이 또한 큰 호재임이 틀림없었다.
“소희에게 신세를 많이 졌지 뭐니. 그 녀석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싶어.
그리고 그 아이, 진짜 괜찮더라.
그러고 보면 강철이 네가 요즘에 배우 운이 좀 터지는 거 같아.
태준이는 여전히 잘나가고, 수연이도 돌아온 데다가.
그 왜 민수인가, 그 녀석도 장난 아니라면서? 진성 오빠가 젊은 녀석 칭찬하는 거 진짜 오랜만에 들어 보는 거 같은데….
거기다 설아도 이제 다 커서 한 몫을 단단히 해주는데, 소희 같은 애는 또 어디서 튀어 나왔다니?
네 녀석이 5년 동안 정신 수양하면서 공덕을 쌓더니 결국 그게 이렇게 터져 나오는가 싶더라."
윤숙의 마지막 말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대부분 틀리지 않은 소리였기 때문에 강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미소 지은 강철은 윤숙과 함께 찬진을 찾아갔다.
윤숙이 왔으니 촬영 순서를 수정하는 것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윤숙이 강철을 만나고 있을 시간 민수는 촬영장을 슬쩍 둘러보면서 정말 형우의 말처럼 매니저들이 움직이고 있나 살펴보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집중해서 살펴보니, 정말 매니저들이 조금 어색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이없었던 건 그 와중에 형우의 움직임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뭐든지 해본 놈이 잘한다고 이미 몰래 찍는 것에 달인이 되어버린 형우는 사람들에게 전혀 티가 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해 버린 것이다.
“정말 대단하다면 대단한 녀석인데….”
그렇게 형우를 잠시 보던 민수는 우연히 고개를 돌리다 윤 대표 근처에 홍보팀 직원이 서성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매니저가 따로 없는 윤 대표이니만큼 결국 홍보팀 직원이 중책을 맡았나 본데, 저렇게 어색하게 있으면 바로 걸릴 거 같았다.
그리고 민수가 생각하기에 윤 대표에게 걸린다면 아무래도 별로 좋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진짜 대표님한테 형우 같은 애를 붙여야 할 텐데….”
하지만 형우는 죽어도 설아 곁에서 설아를 찍다가 죽겠다고 했다니, 그야말로 대단한 열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렇게 홍보전략이 정해진 만큼 그들도 성공적인 홍보를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그리고 젊은 배우들이 촬영에 앞서 모여있는 장소에 오늘은 소희가 추가로 합류했다.
항상 모이던 4명의 배우는 저쪽에서 소희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한 번에 딱 알 수 있었다.
지금 소희에게 스위치가 완벽하게 들어가 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평소에 조금 소극적인 걸음걸이, 약간 주눅이 든 듯 주위를 살피면서 걷던 소희가 지금은 허리를 쭉 펴고 미묘하게 엉덩이를 흔들면서 매혹적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거기다 저 표정.
일행을 발견하고 웃으며 걸어오는 그녀의 표정은 살짝 도도하게 눈을 치켜뜨고 있어 평소 그녀의 얼굴이 가진 세련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여기들 계시네요.
촬영장에서 뵙는 건 처음이라 많이 떨리네요.
이제 저도 앞으로 촬영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잘 부탁드릴게요.”
많이 떨린다는 소희는 말과는 다르게 전혀 떠는 것 같지가 않았다.
말을 하면서도 순간순간 고혹적인 눈웃음을 던지고, 말을 마치고는 배부른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짓는 소희.
민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왜 그녀가 전생에 “메소드의 귀재”라고 불렸는지 직접 체감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이 바로 오늘부터 그녀가 연기할 흑월의 차기 수장이자, 기생인 “수월”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소희 씨?”
너무 배역에 집중한 것이 아닌지 걱정스러웠던 민수는 소희에게 지금 상태에 관하여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나 몰입이 너무 심하다면 어떻게든 배역에 함몰되는 것은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 괜찮아요. 민수 오라버니.
그냥 조금 연기하기 편하게 설정을 잡은 거뿐이에요.
이 정도면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니고요.
원래 예전 같았으면 지금 상황에서 태준 씨에게 교태를 엄청나게 부리고 있었을 거예요.
이 정도면 뭐…. 적절하죠.”
극 중 배역인 수월은 천과 외부 접선을 하는 역할이었고, 매혹적인 미소로 천과 미묘한 감정교류를 하는 역할이었다.
물론 그들이 외도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정숙한 현과는 다른 매력으로 다가간 수월은 천에게 큰 감흥을 주고 이 모습은 에필로그에 나오는 장면들에 대한 복선이 되어준다.
각설하고, 소희의 말은 연기 중에 항상 천을 향하여 매혹적인 눈웃음을 보내야 하는 만큼 예전처럼 배역에 완전히 매몰되어있다면 지금도 계속 태준에게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지 않겠냐는 소리였다.
소희의 말은 일견 타당했지만, 평소처럼 민수 씨가 아니라 배역처럼 오라버니라고 부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민수는 쉽게 염려를 놓을 수가 없었다.
민수가 걱정하는 동안에도 소희는 배우들과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연기하는 동안에 소희가 나서서 정윤숙 선생님의 연습을 도왔다는 말에 모두 소희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눈 소희는 웃으면서 이제 선생님을 뵙고, 오늘 찍을 장면들을 이야기를 나누러 가 봐야겠다고 말한 후 윤숙을 찾아 일행을 떠나갔다.
평소의 소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태도에 일행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와….. 저런 거였구나. 저게 많이 좋아진 거라면 진짜 아빠가 걱정할 만했네….”
“그래도 차라리 보기 좋은 거 같은데. 평소에도 저러면 얼마나 좋을까?”
수연은 걸즈토크를 나눌 때도 수줍어하며 말을 별로 하지 않던 소희의 모습을 생각하며, 평소에도 이 정도만 사교성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행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지와는 무관하게 소희는 지금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어머님을 여의고 아버지와는 사정이 생겨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인 소희의 연습생 생활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역시 가장 시급한 문제는 금전적인 것이었는데 연습생으로 있던 2년의 세월 동안 모아놓았던 모든 돈을 다 써버린 소희는 더는 연습생 생활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었다.
그리고 그런 소희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게 박 실장이었다.
소희에게서 연기자의 재능을 깨달은 박 실장은 끼가 없다는 이유로 아이돌 팀의 눈 밖에 난 소희를 배우의 길로 이끌어 주었다.
박 실장의 도움으로 다시 배우 연습생이 된 소희는 기본적인 연기를 배우며 다시 꿈을 키워가게 되었다.
하지만 박 실장이 RD에서 물러나게 되자 다시 소희는 기댈 곳이 없어졌다.
박 실장이 나가고 자신이 따라 나갈 때까지 불과 며칠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소희가 겪은 마음고생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배우팀 실장은 전 실장이 키우고 있던 소희에게 인간적인 배려를 전혀 하지 않았고, 강압적인 분위기에 소희는 결국 RD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박 실장을 따라 들어 오게 된 윤 엔터.
소희는 윤 엔터에 들어오면서 이곳에서 마저 안 된다면 이제 다시는 연예계를 꿈꾸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렇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들어오게 된 이곳에서 소희는 정말 많은 것을 받았다.
민 여사님이 마련해 주신 집에서 마음 편하게 쉴 수 있었다.
그리고 식사는 모두 소속사 식당에서 해결 할 수 있어 식비조차 들지 않았다.
그리고 민 여사님이 다달이 주시는 용돈으로 나머지 소소한 지출도 다 커버가 가능했다.
이렇게 생활적인 면이 해결되자 이제 연기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집중할 수 있었다.
윤 대표님과 강환 선생님. 그리고 소속사에 속한 선배님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스승이었고, 소희는 이곳에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연기의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성공만을 위해서 선택한 연기였지만 지금은 연기가 주는 재미에 푹 빠져버린 소희에게는 정말 하루하루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특히 윤 엔터는 RD랑은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RD에서는 자신에 외모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나누어 본 후에는 그냥 예쁘기만 할 뿐 스타의 자질이 없다는 이유로 다들 애물단지로 취급했다.
그들은 자신을 이해할 생각조차 가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윤 엔터는 아니였다.
모두 자신에게 신경을 써 주었고, 그 누구도 자신에게 가능성이 없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자신을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 지내다 보니 어느새 자신도 멋진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희가 윤 엔터에서 느끼고 있는 감정은 소속감이었다.
좋지 못한 가정환경 때문에 본의 아니게 한 번도 소속감을 느껴본 적 없던 소희에게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다.
그래서였다.
굳이 출연하지 않아도 될 영화에 억지를 써서 출연하고, 다른 배우들을 위하여 중국어 교정을 자청하고,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자신이 먼저 나서서 정윤숙 선생님과 연기 연습을 한 이유는.
소희는 진심으로 이곳이 좋았고, 이곳에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것 그 이상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 오늘 이 자리에서 소희는 윤 엔터의 배우로서 영화에 데뷔하게 될 것이다.
소희가 처음 연기하게 될 장면은 황태자 천이 흑월을 찾아 헤매다 어떤 화려한 기루에 도착하게 되고, 그곳에서 수월을 만나게 된다.
매혹적인 기생 수월, 그녀는 설의 명을 받고 황태자와 접촉해 천을 흑월로 안내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바로 수월과 천이 처음 만나는 장면.
그것이 오늘 촬영할 첫 장면이었다.
민수는 한쪽에서 소희의 연기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혹시 배역 몰입이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지 관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민수와는 다른 곳에서 형우는 소희와 태준을 보고 있는 민수를 몰래 찍고 있었다.
감독의 신호에 맞춰 술상 앞에 앉은 천의 정면에서 문이 양쪽으로 열리며, 얼굴을 붉은 면사로 가린 여성이 두 개의 부채를 들고 있었다.
수월은 두 눈만 선명하게 보이는 모습으로 천을 바라보며 한바탕 춤사위를 펼치고 있었다.
아이돌 연습생으로서 춤에 익숙한 소희.
그녀는 수월이 되어 소희였을 때에는 RD의 월말평가에서조차 한 번도 모여주지 못했던 고혹적이고 치명적인 몸놀림으로 천을 유혹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선을 내포한 부드러운 움직임, 몸놀림 하나하나가 묘하게 여성성을 강조하고 있었고, 동작 사이사이에 수월의 매력적인 눈매가 천을 몽롱하게 바라본다.
의상조차 완벽해서 기본적으로 노출은 거의 없었지만, 수월의 움직임에 따라 수월의 뽀얀 살결이 아주 조금씩 드러나곤 했다.
대놓고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녀의 춤은 그래서 더 야릇한 상상력을 부추기고 있었다.
수월의 춤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어떤 강철 같은 심지를 가진 남자라도 그녀의 춤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천은 그런 그녀의 몸놀림은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둘의 연기에 민수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튀어나왔다.
“와….. 저게 저렇게 되네….. 대본에 수월이 춤추는 것을 본 천은 한번에 수월에게 호감을 느낀다고 서술해 놓아서 조금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저러면 말이 되지.”
민수가 감탄을 내뱉을 정도로 소희의 춤은 너무나도 완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