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115화 (115/325)

#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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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이 별 무리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윤 엔터 식구들은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인 설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영화의 촬영 일정이 빡빡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면 명절을 지내는 호사를 누릴 수 없었겠지만, 다행히도 촬영은 순항을 기록하고 있었고, 덕분에 설날 연휴 중 2일을 쉬기로 하였다.

당연히 촬영이 속행될 거로 생각했던 민수는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생겨버린 휴가에 당황했고, 그래도 이왕 얻은 휴가이니만큼 조금 더 의미 있게 사용하기 위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수연은 당연히 자신의 본가로 내려가 시간을 보낸다고 했고, 소희도 오랜만에 RD의 연습생이 되기 전, 자신이 자랐던 부산으로 내려가서 친구를 만난다고 했다.

태준과 설아는 특별히 교류하는 친척들이 없어서 자신들끼리 보낸다고 했으니, 만약 민수가 그냥 그대로 집에 머문다면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만, 이왕에 쉬는 김에 조금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민수는 평소처럼 자신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민수는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부모님이 계신 곳이었다.

저번에 근교로 장소를 옮겨 놓은 덕분에 조금 편하게 인사드리러 올 수 있었다.

오늘도 동행인은 형우였다.

민수는 당연히 형우도 집에서 쉴 거로 생각하고 혼자 올 생각이었는데, 형우는 자연스럽게 민수를 따라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야. 넌 집에 안 가? 설인데 집에서 가족들이랑 보내야지.”

민수의 말에 형우의 얼굴이 급격하게 썩어들어갔다.

그리고 출발 전에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은 형우는 민수에게 하소연하듯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금 집에 아무도 없어.

아버지랑 어머니는 지금쯤 어디 보자…. 베네치아에 계시겠네. 2주 계획으로 이탈리아 여행 중이시고, 형님 내외는 어제 자로 영국으로 가셨어. 그쪽도 2주 계획이야.

그리고 큰누나는 업무차…. 라는 핑계로 지금 한 달 째 매형이랑 같이 파리에 머물고 계시고, 그나마 있어야 하는 게 작은 누나인데….

이 인간이 가족들이 다 집을 비운 틈에 애인이랑 같이 일본으로 도망가 버렸어.

제 딴에는 부모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돌아와 완전 범죄를 꿈꾸고 있나 본데….

이미 내가 짐 싸 들고 나가는 걸 찍어서 아버지한테 보내놨지.

아마 아버지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와 누나를 응징하실 거야.

그 인간 재수 없으면 머리채가 다 뽑혀 나갈지도 몰라.”

앞으로 응징당할 누나를 생각하며 기분이 조금 풀리는지 인상이 조금 편해지는 형우를 보면서 민수는 형우의 가족이 참 재미있게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막내아들만 버려두고 다들 자기 갈 길 가 버렸다니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 가족들이 여행을 참 좋아하시는구나.”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처량하게 앉아 있는 형우에게 민수가 해줄 만한 이야기는 그것뿐이었다.

“아씨. 이게 말이 되냐고?”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말도 안 된다고 외치며, 형우는 자신의 가족들을 강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형우가 씩씩거리면서 그 사람들이 자신에게 일자리를 잡으라고 종용한 것은 분명 이런 식으로 자기를 버리고 자신들의 삶을 살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열변을 토했지만 민수는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렸다.

민수가 형우와 지금까지 제법 긴 시간을 보내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형우가 흥분했을 땐 먹이를 주지 말고 그냥 버려두면 된다는 것이었다.

민수의 예상대로 형우는 그렇게 몇 분을 혼자 떠들더니 조금 진정이 된 듯 운전대를 잡고 민수를 안전하게 목적지로 인도해 주었다.

민수는 마음을 진정시킨 형우를 보면서, 역시 흥분한 개에게 먹이를 주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자신의 현명한 행동을 칭찬했다.

“아, 역시 칙칙하네. 저번처럼 설아 씨랑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형우의 말에 민수는 그냥 피식 웃기만 했다.

어제 오늘의 일정을 묻는 설아에게 민수는 부모님의 봉안당으로 간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랬더니 설아는 웃으며 자신도 동행하고 싶다고 민수를 졸랐지만 민수는 당연히 설아의 제안을 거절했다.

보통 때라면 몰라도 설날이기 때문에 설아도 당연히 가족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 민수가 계속 거절하자 설아도 민수의 거절을 거절하겠다는 기세로 계속 억지를 부렸다.

그렇게 한참을 억지를 부리던 설아는 우연히 옆을 지나가시던 윤 대표님께 제압을 당하고 끌려가게 되었는데, 사정을 알게 된 윤 대표님은 설아를 끌고 가면서 묘하게 날카로운 눈으로 민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수는 지금까지 윤 엔터에서 제법 긴 시간을 보냈지만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는 윤 대표는 처음이었다.

하긴 딸내미가 설날에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보낸다고 고집을 피웠으니 윤 대표 입장에서는 꽤 서운한 일이었을 것이다.

민수가 잠시 잊고 있었지만, 윤 대표는 자신의 딸을 위하여 헬스장과 녹음실까지 소속사 건물에 설치한 나름 딸바보가 아니었던가.

만약에 설아가 예전처럼 몰래 따라붙을 생각이었다 하더라도 오늘은 서슬 퍼런 눈으로 지켜보는 윤 대표를 피해서 나오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봉안당에서 부모님께 새해 인사를 드린 민수는 다음 목적지를 자신이 전생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원룸으로 정하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민수는 올해가 시작되면서 오랫동안 지내온 방을 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연예인이 되었고, 나름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만큼 이제 그곳에서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기 때문이다.

만약 민수가 지금 사는 옥상 방에서 나온다 해도 아마 앞으로는 조금 치안이 더 좋은 곳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처럼 계속 그 방의 계약을 연장하고 싶었지만 이번처럼 촬영이 이어진다면 결국 자신은 그 방을 전혀 관리할 수 없고, 그러면 그건 결국 이모님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남을 수밖에 없었으니 민수로서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해 드린 것이 없었던 주인집 이모님께 민수는 처음으로 최고급 한우 세트를 선물해 드렸다.

역시 명절에는 한우였고, 이모님은 민수와 한우를 환하게 웃으며 반겨 주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이모님은 민수에게 자신의 친구들에게 나누어줄 사인을 부탁했다.

민수는 사인을 한 후에 친구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론하며 그분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메시지를 추가했다.

그리고 사인을 한 종이를 이모님께 돌려드리면서 아직 자신의 사인이 가치가 별로 없으니 자신이 좀 더 유명해진 다음에 드리면 더 효과적일 거라고 충고해 드렸다.

민수의 말을 농담으로 들으신 이모님은 호호하고 웃으시며, 이제 농담까지 하는 걸 보니 참 보기 좋다고 다정하고 따듯한 얼굴로 기뻐하셨다.

정말 솔직하게 진심 100%였던 민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오던 민수는 가만히 뒤로 돌아 원룸 건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신세만 지고, 아무것도 갚지 못했던 민수는 작은 것이라도 이모님께 무엇을 드렸다는 것 자체로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그리고 민수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조윤희 선생님의 거처였다.

지금까지 어쩌면 가장 신세를 많이 졌다고도 볼 수 있는 조윤희 선생님은 민수처럼 완전히 혈혈단신이었다.

부모님들은 돌아가신 지 오래였고, 친척들은 이미 남보다 못한 사이로 연락조차 안 하고 그렇게 지내시니 당연히 오늘도 혼자 보내고 계실 것이다.

그런 인생을 30년 동안 살아왔던 민수는 그 나이 때의 어르신이 명절을 혼자 보내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지 잘 알고 있었다.

한 가지만을 몰두하며 미쳐 살던 전생의 민수 조차 설날만은 혼자라는 사실에 외로움을 느끼곤 했었다.

그리고 말년에 죽기 한두 해 전에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게 되어 종종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는데 그때는 그야말로 쓰리도록 괴로웠다.

그리고 민수가 짐작하기로 지금 선생님도 그런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계실 가능성이 컸다.

예상치 못한 민수의 방문에 윤희는 당황하면서도 반가움에 환한 웃음을 보였다.

민수의 예상대로 윤희의 집은 조금 적막함이 흐르고 있었다.

고급 가구와 고급 기기들이 가득한 호화로운 집이었지만, 그것들이 윤희의 외로움을 달래주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민수의 생각에는 그랬다.

“어머…. 정말 반갑긴 한데, 어쩔 일이에요. 이렇게 직접 찾아오시다니.”

“하하하. 선생님도 참. 제가 명절에 갈 데가 어디 있겠어요.

부모님 잠깐 뵙고,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보니…..

막상 갈 데가 없더라고요.

그러다가 문득 선생님 생각이 나서요.

그래서 이렇게 찾아 왔어요.

제가 실례를 범한 것은 아니겠지요?”

민수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 윤희는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젊은 사람들은 혼자라는 것에 외로움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그때는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많은 친구가 있고, 할 것도 많으며 하고 싶은 것도 많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윤희는 한창 젊은 민수가 갈 곳이 없어 이곳을 찾았다는 말이 하얀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혼자 외롭게 보내고 있을 자신을 위하여 친히 온 것이리라.

“그래요. 잘 왔어요. 우선 앉아요. 차라도 한잔 내올 테니.”

혼자서 적막하게 보내던 집안에 은은한 훈기가 돌기 시작하면서 윤희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그렇게 차를 내온 윤희는 민수와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번번이 감사해요. 선생님.

이번 의상도 선생님이 디자인 해주셨다면서요?”

“호호호. 심심한 늙은이가 소일거리로 한 거예요.

나도 재미있었어요.

배우들이 마음에 들어 하던가요?

날씨가 날씨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따듯한 재질로 디자인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조금 무거울 거예요.”

윤희의 말대로 이번 궁중 의상은 디자인이 참 예쁘게 나왔지만, 추운 날씨에 입어야 하는 만큼 조금 두꺼웠고 그래서 다소 무거웠다.

“그건 그런데, 그래도 여름보다는 조금 두꺼운 옷을 입고하는 게 낫죠.

아무리 얇게 제작해도 여름이었으면 더 괴로웠을 거예요.”

“호호. 그건 그래요.

확실히 여름이었다고 생각해 보니 정말 끔찍하네요.

남자 배우들도 여배우들의 고초를 이해해 줘야 해요.

특히 궁중 의상은 옷 입는 것 하나도 얼마나 복잡한지.”

그렇게 한참 의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가 넘어갔다.

“솔직히, 촬영장에 가보고 나서 아주 부러웠어요.

윤강철 님은 그렇게 예쁜 자녀들이랑 같이 영화를 찍고 있더라고요.

아들도 너무 멋있게 컸고, 딸은 정말 천사 같이 예뻤어요.

저게 정말 사람 사는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민수는 조금 처연하게 말하는 윤희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만 했다.

지금 윤희에게 어떠한 말로 위로한다고 해도 아무 의미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그냥 옆에서 들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만약 내가 보통사람처럼 그렇게 살았으면…. 나도 평범하게 아들, 딸, 손자의 인사를 받으면서 그렇게 따듯한 설날을 보내고 있었겠죠.

그런 생각이 드니까 참 가슴이 아려왔어요.

참, 젊은 사람을 붙잡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민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윤희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윤희는 자신의 손을 감싸는 따듯한 온기를 느끼며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애써 참아 냈다.

“그래도 민수 씨는 아직 젊어서 다행이에요.

앞으로 민수 씨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겠죠.

그 사람들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생각해 줘요.

그래서 행복해지세요.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신 부모님이 흐뭇하게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말이에요.”

민수에게 그렇게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넨 윤희는 그래도 요즘은 자신도 많이 좋아졌다고 이야기했다.

민수의 팬클럽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처럼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사람들하고 친분을 나누며 마음이 많이 편해지셨다고 말이다.

그리고 유니 스튜디오에서 자신에게 디자인을 배우는 많은 제자를 보면서 한국에 온 것이 정말 좋은 선택이라고 이야기해 주시기도 했다.

“그거 알아요? 제 제자 중에……”

제자들 이야기에 다시 분위기가 조금 밝아 졌다.

여러 아이를 가르치면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꺼진 줄 알았던 열정도 조금씩 다시 커지고 있다는 조윤희 선생님.

민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생님이 한국에서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바랐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어쩌면 조금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민수와 윤희의 이야기는 밤 깊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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