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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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수연 선배도 감이 확 올라왔네.
송포유 찍을 때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하던 그 이수연이 아니야.
하긴 원래 저 정도는 해주는 배우이긴 했지.
태준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연의 연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진성 선생님이랑 정면에서 대립하는 장면이라 살짝 걱정했는데,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
칼만 안 들었다뿐이지 웬만한 결투보다 더 피가 튀는데?”
진성의 기세에 눌려 실수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장면이 한 번에 마무리되자 민수도 수연의 연기에 감탄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성기의 수연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인지, 겨우 이 정도에 감탄 내뱉는 민수를 보며 태준은 한마디를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에이~ 정 배우. 수연 선배를 너무 가볍게 보는 거 아니야?
아버지가 감탄하고 바로 소속사를 만들 정도의 배우였다고.
이제 겨우 다시 제자리를 잡아가는 거고 뿐인데 이 정도로 감탄하면 곤란하지.”
수연 앞에서는 항상 자기가 제일 무시했던 주제에 수연을 가볍게 보지 말라는 태준에 말에 민수는 그냥 입을 다물고 태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수연이 저 정도는 아니지…. 겨우 저 정도는 아니고말고.”
태준은 잠시 아련한 눈빛으로 수연이 연기하는 장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민수는 그런 태준의 모습에서 수연과 태준이 서로에게 품은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종잡을 수가 없어졌다.
같이 있을 땐 항상 아옹다옹하는 주제에 멀리서는 언제나 서로를 저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는 사이 촬영을 미친 수연은 자신의 무거운 옷을 끌고 바로 자신의 트레일러로 빠르게 이동한 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민수와 태준 앞에 나타났다.
수연이 다가오자 태준은 얼굴은 평소와 같은 얼굴로 수연에게 조금 놀리듯 이야기를 꺼냈다.
“하, 이수연. 아직 멀었어. 쯧쯧.”
태준의 핀잔에 수연은 잔뜩 부은 얼굴로 태준에게 달려들어 태준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찌르면서 분노를 터트렸다.
“나도 알아 이것아. 가뜩이나 짜증 나 죽겠는데, 자꾸 긁을래?
아우 진짜 왜 이렇게 복잡해?
천을 볼 때마다 미묘한 연정과 자신도 모르는 모성애를 내포한 따듯한 눈으로 보라고 하고, 평을 대할 때는 가슴속 깊숙한 혐오감과 권력에 힘에 함몰되어 버린 조부에 대한 연민이 공존하는 눈으로 보라니.
이게 말이야 방귀야?
이제 생각해 보니 송포유에서 준성이 이중적인 눈으로 미주를 보는 게 얼마나 거지 같은 거였는지 새삼 알겠네.
심지어 지금 난 한 가지도 아니라 그런 거지 같은 조건이 두 가지나 돼.
게다가 그걸 하면서 중국어로 어떻게 연기하라는 거야?
진짜 짜증 나 죽겠네, 후~.”
기다렸다는 듯이 불만 사항을 퍼붓는 수연 선배를 보니 요즘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쌓였다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저렇게 태준을 패다 보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민수는 수연을 전혀 말리지 않았다.
자신이 말을 꺼낸 거니 태준도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잘하고 있어요. 윤 배우도 수연 선배 보면서 잘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오호 그랬어? 우리 태준이가 웬일로 그렇게 말해 줬단 말이지?”
민수의 말에 한껏 기분이 나아진 수연은 화풀이하던 태준에게 떨어져 황제와 연화가 대화하는 오늘의 마지막 촬영 쪽으로 눈을 돌렸다.
평이 현을 이용하여 황태자를 끌어올 계획을 세운 것처럼, 황제는 연화를 이용해서 진을 직접 끌어들일 계략을 세운다.
오늘 연화를 버릴 생각까지 했던 황제는 뻔뻔하게도 연화에게 진을 유혹하여 자신을 위하여 힘쓰게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
조금 전 자신에게 한 짓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내키는 데로 명령을 내리는 황제의 모습에 고개를 숙이고 명을 받은 연화의 표정이 참담하고 비참하게 일그러졌고, 아래쪽의 카메라가 그런 설아의 표정 연기를 자세히 촬영하고 있었다.
“하…. 참 우리 설아도 이래저래 손해 볼 스타일이라니까.
사람들이 쟤가 나오면 얼굴이랑 몸매부터 훑어보기 바쁘지, 쟤의 연기에 대하여 제대로 생각해 보기나 할까?
예전에 진성 선생님이 그랬다지? 우리 설아도 딱 그 짝이 될 거 같아서 마음이 아프네.”
민수는 수연의 말에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사실 이카루스 뮤비에서도 설아의 연기는 출중했다. 다섯 가지 각기 다른 컨셉으로 다섯 명의 여성을 연기하는 일.
얼핏 생각해봐도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설아에게 쏠린 것은 외모에 대한 찬사가 대부분이었고, 연기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비록 그 이유가 마지막에 나온 바텐더가 지나치게 관능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선 사람들의 눈이 외모로 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그 평가를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했다.
“예뻐서 그런 건데 어쩔 수 없죠.
설아 씨도 선생님처럼 금방 연기로도 인정받을 수 있을 거예요.
설아 씨는 정말 좋은 배우니까요.”
“하긴 그렇겠지? 지금 선생님도 분명 인정을 받고 계시니까.
어? 그렇게 생각하니까 설아가 조금 비겁한데.
난 연기력이라는 무기밖에 없는데, 우리 설아는 연기에다가 외모까지 무기를 두 개나 들고 이도류를 휘두르는 거잖아.”
민수는 자신에게 연기력밖에 없다는 수연의 뻔뻔함에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뭐라고 지적하기는 힘들어 그냥 웃기만 했다.
잠시 그렇게 뻔뻔함을 드러낸 수연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다가,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확 돌리더니 슬쩍 다가와 민수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궁금한 것이 있다는 눈망울로 민수를 쳐다보았다.
민수는 이 선배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의아함을 느끼면서 궁금한 게 있어 보이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수연은 자신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민수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설아가 그렇게 노래를 잘해?
너 설아 노래 듣고 완전히 뻑 갔다면서? 아시아에서 최고의 여신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던데?
그 말 진짜야?”
“음….”
민수는 예전에 자신이 놀리듯이 설아에게 했던 말이 뭔가 조금 묘하게 와전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설아의 노래에서 항상 큰 감동을 받아왔고(전생에) 설아가 노래를 한다면 아시아의 여신이 될 거라고(전생에서) 말한 것은 사실이라 수연의 말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반박을 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수연의 표현이 워낙 요상해서 저 말을 그냥 인정하면 자신의 설아의 노래에 빠져서 그녀에게 완전히 반해 있는 것처럼 흘러가는 분위기라 그냥 그렇다고 하기도 좀 곤란했고, 어쨌든 조금 난감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은 거예요?”
민수가 생각할 시간도 벌고 궁금증도 풀 겸 수연에게 반문하자, 수연은 환하게 웃으면서 걸즈토크 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수연은 설아에게 직접 들은 말이니 발뺌할 생각은 말라고 민수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걸즈 토크라니, 저 철없는 동네 형 같은 선배는 대체 그 나이 먹고 걸즈 토크라면서 동생들이랑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사뭇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민수가 적절한 단어 선택을 위하여 신중을 기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던 태준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설아가 그랬다고? 하긴…. 그랬으니 그렇게 바로 설아의 대사 문제를 파박 해결할 수 있었던 거였겠지? 그렇게 평소에도 관심이 있었던 거였어.
오호… 이거 조금 느낌이 오는데…”
옆에서 집중력을 흐리는 헛소리가 들려오고 민수는 그냥 설아의 노래에 대해서 최대한 담백하게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만약 더 시간을 끌다가는 저 장난기 넘치는 태준이 또 이상한 말들을 덧붙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선, 목소리가 좋아요.
게다가 어려서부터 연기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표현력이 너무 좋죠.
그런 데다가 이상하게 음감까지 좋은 거 같아서 아마 노래를 부른다면 연기를 하는 것보다 더 성공할지도 모르겠어요.”
자신의 사감을 빼고 그냥 최대한 사실적으로 말하다 보니 민수의 설명은 자신의 의도대로 다소 무미건조한 느낌을 주었다.
트집을 잡을 만한 이야기가 있을까 잔뜩 기대하고 듣던 수연과 태준은 민수의 이야기가 끝나자 다소 실망한 표정이었다.
“칫, 자식. 애써 돌려 말하지 않아도 돼.”
자신은 다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민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수연의 모습에 민수는 한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요즘 민수는 차라리 예전에 도도한 척했던 수연 선배가 더 나았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친해진 것은 좋지만 저리 기회만 있으면 놀려 먹을 생각부터 하니 참 기가 막혔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건 왜 물으세요?”
민수의 말에 수연은 조금 음흉한 얼굴로 한 손에 대본을 들고 다른 손으로 대본을 가리키면서 입을 열었다.
“흐흐, 이제 당분간 진이랑 연화는 묘한 분위기의 연기를 계속해야 하잖아.
그래서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
그런 경험이 있으면 조금 수월할까 해서 말이야.
아, 물론 우리 민수가 모태솔로라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야.
그래도 경험이 있어야 연기가 수월하잖아.
그러니까 그런 비슷한 경험이라도 있으면 그걸 잘 이용해 보라는 선배의 깊은 뜻이지.
아, 그래도 설아가 상대역이니 그럭저럭 잘할 수 있으려나.”
저 말을 잘 해석해 보면 결국
“모태솔로 주제에 그런 연기를 잘할 수 있겠어?
만약 네가 연기를 잘하면 설아랑 엮어서 놀릴 거고, 연기를 못하면 모태솔로라서 못한 거라고 놀릴 거야.
난 이 기회에 널 놀려먹으면서 지금까지 쌓인 스트레스나 풀어야겠다”
이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민수는 순간 얄미운 표정으로 자신을 놀리겠다고 선언한 저 가증스러운 선배에게 신의 철퇴가 내리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세상에 신은 분명히 존재하니까, 저 얄미운 동네 형 같은 선배는 분명 응징을 당할 거라 믿었다.
수연의 말이 끝나자 이야기를 가만이 듣고 있던 태준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진짜 연기에 몰두하다 보면 자신이 상대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기도 한다더라고.
상대역에게 평소에 관심이 없다가도 같이 로맨스를 찍다 보면 호감이 생긴다는 말도 있고.
사실 배우들이 가장 많이 스캔들이 나는 것도 로맨스 연기를 한 이후잖아?
그러니 확실히 그 말이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겠지.”
“근데 그렇게 시작한 커플 중에 결과가 좋은 커플이 조금 드물긴 한데….”
“아무래도, 배우는 배역이 아니니까. 연기하다가 생긴 감정은 연기가 끝나면 조금씩 식어 버리거든.
사귀다 보면 결국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지.
자신이 좋아했던 건 상대가 아니라 상대가 연기했던 어떤 배역일 뿐이란 걸 말이야.”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설아까지 연기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대열에 합류했다.
연기를 무사히 마친 설아는 밝은 미소로 일행이 대화를 나누는 곳으로 다가오더니 뒤에서 수연을 폭하고 감싸 안았다.
여성의 평균 신장보다 약간 작은(160) 데다가 편한 운동화를 신은 수연은 딱 보기에도 여성치고는 조금 큰 키(168)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굽이 높은 힐을 신고 있는 설아에게 완전히 안겨 있는 모양이 되고 말았다.
“언니~”
자신보다 한참 동생인 데다가 예전에는 자신을 올려다보던 설아에게 (비록 그 기간이 매우 짧아 2년 만에 자신의 키를 역전했지만) 폭하고 안긴 수연은 이상하게 굴욕적인 기분이 들어 바둥거리며 설아를 밀어내려 했지만, 이미 완력으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설아를 자력으로 떨어뜨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혼자 한참 바둥거리다가 기운이 다 빠져 버린 수연은 오늘 자신의 연기가 너무 격하고 힘들어서 자신이 기운이 없는 거라고 애써 자위한 후 주위에 태준과 민수에게 조금 애타는 눈으로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민수는 그런 수연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민수는 오늘 자신의 신이 설아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속으로 설아를 격하게 응원했다.
저 선배에게 더 큰 굴욕감을 주라고 말이다.
“역시 정의가 살아 있었어요. 수연 선배.
오늘 촬영은 끝났으니, 전 먼저 들어가서 좀 쉬겠습니다. 그럼 내일 봐요?”
민수는 그렇게 수연의 곤란함에 통쾌함을 느끼면서 손을 쓱쓱 흔들어 보이고는 자신의 차로 서둘러 이동했다.
수연이 아마 설아에게 풀려난다면 바로 자신에게 달려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촬영은 정말 힘들었다.
민수는 다음 촬영을 위하여 빠르게 휴식에 들어갔다.
내일은 또 다른 촬영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