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112화 (112/325)

# 112

3

오후 늦은 시간, 민수가 다음에 촬영할 씬은 황태자와 밀담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진은 첫 만남부터 황태자 “천”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진의 눈에 천은 그저 부모 잘 만나 애송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냥 황족 자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진은 황실이 그들의 비선이었던 흑월을 보호해 주지 못해 많은 가족이 죽고 다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참으로 무능한 자들이 아닌가. 자신의 수족조차도 보호해 주지 못하는 주군이라니.

그리고 심지어 이제 조금 자리를 잡자 다시 찾아와 손을 내밀다니, 대체 그건 무슨 염치란 말인가.

진이 공주 연화를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연화가 공주라는 지체 높은 자리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연마하여 높은 수준의 무예를 갈고 닦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첫 만남이었음에도 자신보다 더 황태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받드는 설의 모습에 진은 흑월에 대한 작은 환멸이 생겨날 정도였다.

각설하고, 그런 진의 불만은 진의 태도와 어투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진은 자신보다 어린 황태자에게 항상 조금 아니 사실 많이 건방진 어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진의 태도에 분노하던 황태자도 진이 몇 번의 작전을 성공시키는 과정을 통하여 진의 필요성을 정확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고 있었다.

사실 한편으로는 처음 접하고, 황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직설적이고 거짓이 없는 진의 태도에 생소한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황태자는 자신의 부름에 몰래 자신의 방으로 침입한 진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 어쩌자고 그렇게 나선 게냐? 아직 우리의 정체를 밝힐 때가 아니거늘….”

황태자는 지금 걱정과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황태자에게는 별다른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황태자가 하고 있는 일은 황제와 평의 세력을 갉아먹는 작업일 뿐이었다.

황태자가 진에게 지금까지 내린 두 번의 지령으로 황제와 평의 세력은 서로 상대에게 선제공격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태자의 뜻대로 서로 암중에서 서로를 향하여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세력이 깎여 나간다고 황태자의 세력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진은 걱정과 고민을 가득 품은 황태자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네 녀석의 여동생이 그렇게 덩치만 큰 덩어리한테 끌려가듯 시집가는 걸 내버려 두라고? 그렇게 끌려가서 죽을 때까지 인질로 고통받을 게 불 보듯 뻔한데?”

진의 말에 천은 괴로움에 찬 신음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천도 평의 생각을 바로 간파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진이 드러나면, 사람들은 진과 자신이 한편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진을 연화에게 추천한 게 자신이니 아마 그들이 알아내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진을 연화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추천한 것은 연화가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기도 했고, 자신이 명한 것이 아니라면 연화가 진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도 영원히 진이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을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그 시기가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은 아직 가진 것이 너무 없었다.

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한 진은 인상을 잔뜩 구기며 혀를 차면서 천에게 물었다.

“황태자 나리, 나리는 대체 어떤 황제가 되고 싶은 거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게냐?”

“지금 황태자 나리가 공주를 포기하려고 한 것과 황제가 최고 대신에게 공주를 버린 말로 사용하는 것이 무엇이 다른지 난 도통 모르겠어.

그래서 그렇게 황제가 되면 나리가 지금 황제보다 더 좋은 황제가 될 수 있을까?”

말을 하는 진의 말투는 황태자를 꾸짖는 것 같기도 했고, 정말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듯도 했고, 한편으로는 황태자를 연민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진의 말에 황태자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순간 천은 정말 진의 말대로인가, 지금 나도 목적을 위하여 다른 이들의 가치를 무시하고 있지 않은가, 여러 가지 상념들이 천을 스쳐 갔고, 천의 마음속에는 진의 말이 계속 메아리치듯이 울려나 가고 있었다.

진은 그런 천을 보면서 제 생각을 덧붙여 설명하였다.

설명하는 진의 눈빛은 서리가 이는 듯 냉혹했지만, 입가가 묘하게 올라가 즐거운 일을 앞둔 개구쟁이 같았다.

그런 부조화가 섬뜩하고 삐뚤어진 진의 단면을 더욱 잘 표현해 주고 있었다.

“이봐 나리. 대체 언제까지 숨어만 있을 생각이지? 그렇게 몸을 숨기고만 있는데 어떤 얼 띤 놈이 나리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겠어?

동네의 개들도 꼬리를 만 개를 대장으로 모시지는 않아.

차라리 이번 기회를 차라리 잘 이용해봐.

검은 들개들을 황실로 들여왔으니, 이제 개를 풀어서 난장판을 만들어야지.

검은 들개의 이빨은 승냥이들을 물어뜯기에 충분히 날카로우니 말이야.”

진의 말을 들은 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다는 것을 양쪽 모두 알았으니 이제 그들이 자신을 포섭하기 위하여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고, 자신은 이제 그 경쟁에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이 기회를 잘 이용한다면, 어느 정도 세력을 일궈내는 것과 양쪽에 피해를 주는 것 두 가지를 다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안위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안전했던 것은 자신에게 별다른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만약 자신의 의도가 들통난다면, 자신은 분명히 이 알량한 황태자의 자리까지 빼앗기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번뜩이는 눈으로 수 계산을 하는 천을 보면서 진은 예의 그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는 달래듯이 속삭였다.

“큭큭, 나리가 지금 하려고 하는 건 제국을 통째로 먹어 치우는 일이야.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안 그래? 황태자 나리.”

속삭이는 진의 음성이 마치 악마의 꼬드김 같았다.

천은 이를 악물고 결심을 다졌다.

이제 자신도 전면에 나서 그들과 싸우겠다고 말이다.

결의에 찬 천의 눈빛으로 진은 천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진은 천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올 때처럼 소리 없이 천의 방을 나섰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내가 원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겠어?”

진에게 황태자의 안위는 관심 밖이었다. 자신은 평을 죽여야 한다.

단 한 번의 기회만 있으면 족했다.

그날이 평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하~”

오늘 자신의 촬영분을 마친 태준과 민수는 한숨을 푹 쉬면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어렵네, 진짜. 이런 걸 어떻게 계속했어?”

극단적인 진의 표정 연기를 하면서 중국판의 촬영까지 마친 민수는 온몸에 진이 다 빠진 기분이었다.

솔직히 자신이 지금까지 몸으로 해왔던 연기가 훨씬 수월한 것이었다.

몸을 움직이면서 대사를 할 때는 그냥 별다른 특별한 표정 연기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처럼 진의 면모를 직접 보여주는 연기를 할 때는 표정과 대사 억양에 더욱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중국어 발음과 표정, 두 가지를 모두 잡으려니 연기에 집중력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고 결국 몇 번의 NG를 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태준까지 두 번의 NG를 추가했으니, 촬영이 더 길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정말 훌륭했어. 그럼 그럼.”

태준은 그런 민수를 보면서 웃으며 자찬하고 있었다.

민수도 그런 자신만만한 태준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 그냥 옆에서 같이 웃고 말았다.

요즘 태준은 민수랑 연기하는 것이 매우 재미있었다.

강철과 연기 할 때 느꼈던 이해하기 힘든 압박감과 자신이 제어하지 못하고 들끓었던 감정이 민수랑 연기할 때는 잠잠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강철과 민수의 연기 수준이 달라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그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민수랑 연기할 때도 어느새 몰입도와 집중도가 쭉 올라가 자신의 배역인 천과 자신이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같은 인물이 된 듯한 착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악마처럼 조용히 속삭이는 진의 제안에 자신도 모르게 홀리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할 때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는 건 가족 중에 어머니와 자신만이 가진 습관 같은 것이었다.

결국 연기 중에 자신이 정말 천이된 양,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랑 연기 중에 자신의 자아를 잃은 것처럼 불쾌함을 느꼈던 것과는 달리 민수랑 연기 중에 그런 변화가 일어나면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왜 그럴까 하고 가만히 생각을 해봐도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민수랑 연기할 때는 이상하게 마음이 더 편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민수가 연기하는 진에 대하여 강하게 공감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렇게 상대 배역의 감정이 확실하게 새겨져 버리니, 연기 자체가 확실히 수월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처음 민수를 만났을 때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민수가 연기하던 윤 진의 강한 절망과 허무함이 그대로 느껴지던 그런 경험이.

그때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후에 그런 일이 없다가 다시 같이 호흡을 맞출 때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을 보니 자신의 착각만이 아니었나 보다.

아마 자신 정도로 예민하고 섬세한 연기자가 아니라면 그 차이조차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

태준은 나중에 설아나 수연과 이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하고 오늘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하여간 이상한 놈….”

처음 볼 때는 그냥 좋은 배우라고만 생각했던 민수는 날이 갈수록 점점 유별난 면모를 자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면을 하나 둘씩 더 보여 줄수록 태준은 민수가 더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 근거 없이 가지게 된 호감이 점점 근거를 찾아가게 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태준은 눈앞에 민수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수연과 진성의 연기를 관찰하는 것을 보고 살며시 실소를 머금었다.

확실히 연기에 대한 열정은 자기 못지않은 친구였다.

이 친구는 대체 왜 그렇게 연기에 목을 매는 걸까.

태준은 이런 것도 차차 알게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며 민수가 바라보고 있는 수연과 진성 쪽으로 눈을 돌렸다.

수연과 진성이 찍고 있는 장면은 연회를 마치고 진이 황태자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평이 태자비인 현을 압박하는 장면이었다.

평은 황태자를 포섭해 황제를 무너트릴 무기로 사용하려 했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황태자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반면 현은 황태자가 평의 야욕 때문에 자신의 친부를 해하고 평생 죄책감에 사로잡혀 사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직 천이 황제와 평을 모두 몰아낼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현은 무조건 황태자가 한발 물러서 있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평의 제안을 자신의 손으로 끊어낼 생각이었다.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협박과 회유를 반복하는 평에 말에 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태자비 자리를 폐할 수도 있다는 평의 말에 그냥 이를 악물고 평을 노려볼 뿐이었다.

민수도 마지막의 수연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독기에 정신이 번쩍 들 지경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