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108화 (108/325)

#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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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랭크인에 들어간 후 며칠 동안 촬영은 정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배우들은 촬영 내내 집중력을 잃지 않았고, 스탭들도 모두 합심하여 빠르게 움직여 주었다.

특히 한동안 열악한 환경에서만 영화를 촬영해 오던 찬진과 그의 스탭들은 모두 진정한 달인들처럼 움직였는데 컷과 컷 사이에 어떻게 하면 촬영이 빠르게 진행되는지 어떻게 하면 빠르게 씬을 따낼 수 있는지만 생각하고 살아온 사람들 같았다.

덕분에 촬영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민수는 가끔씩 그들을 보면서 와 정말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라고 생각할 때도 종종 있었다.

“거지 같은 환경에서 몇 년 동안 독립영화만 찍다 보면 다들 저렇게 되는 거지. 저렇게라도 안 하면 영화가 완성되지 못할 수도 있거든. 그래 잘하고 있어.”

그렇게 한치의 동선 낭비 없이 움직이는 스탭들을 보면서 흐뭇해하는 찬진을 보면 민수는 대체 어떤 환경에서 찬진이 영화를 찍고 있는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했다.

물론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중국어 촬영이었는데, 아무리 연습을 하고 중국어에 능통하다고 해도 미묘한 감정 연기를 타국의 언어로 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민수는 그나마 지금까지는 액션 연기가 대부분이라 몇 번의 재촬영을 반복하진 않았지만, 감정연기가 대부분인 수연과 태준, 그리고 강철은 수없이 재촬영의 지옥에 빠져들곤 했다.

지금까지 촬영 시간을 봐도 한국판이 1이라고 한다면 중국판을 촬영하는데 3의 시간을 보냈으니 이것만 봐도 배우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민수도 마음이 마냥 편하진 않았는데 이제 앞으로 진이 연화랑 연정을 나누는 장면을 촬영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수도 한숨을 쉬면서 이건 어차피 익숙해질 때까지 NG를 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며칠 동안 연기하면서 조금 익숙해졌는지 오늘은 평소보다 짧게 중국판의 촬영을 마무리한 배우들을 보니 앞으로는 더 나은 진행을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민수도 하다 보면 늘긴 느는구나 싶어 조금 안심을 하게 되었다.

민 여사님이 잡아 준 숙소는 생각보다 더 편하고 안락했다.

촬영 기간에는 배우팀이 팬션 전체를 사용할 수 있게 계약을 하였기 때문에 타인은 전혀 없었고, 윤 엔터 직원들과 배우들만 지내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 눈을 생각할 필요가 없이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사실 윤 엔터의 배우들은 그런 외부적인 조건에 조금 무관심한 사람들뿐이라 그냥 적당히 잠만 잘 수 있는 곳이라도 별문제가 없을 거 같긴 했다.

만약 여러 곳에서 여러 배우가 모여서 영화를 촬영했으면 숙소 배정 하나부터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제로 배우들이 단체로 해외로케를 떠나면 그런 우습지도 않은 일들이 종종 벌려지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 식구라는 의식을 가진 배우들이 모여서 영화를 촬영하기 때문에 그런 사소한 내부적 갈등이 없이 더욱 영화에 집중할 수 있으니 참 긍정적인 선순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여배우 삼인방은 자기들끼리 무슨 걸스토크인지 뭔지를 설아의 방에서 벌리고 있었다.

민수는 28살 수연 선배가 “걸스” 에 속하는 건 조금 무리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야차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수연에게 차마 그 말을 전하지는 못하고 마음속으로 삼킬 뿐이었다.

덕분에 민수는 오래간만에 태준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요즘 며칠 동안 촬영을 하면서 태준의 표정은 조금 좋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의 연기가 조금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듯한데, 저런 것은 솔직히 뭐라고 충고해줄 수도 없고, 위로해 줄 수도 없어서 민수로서는 조금 답답한 상황이었다.

오늘 태준이 촬영한 씬은 격해지는 황제와 평의 싸움 때문에 황도 내에 백성들이 죽고 다치는 것을 참지 못한 천이 황제를 찾아가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었는데, 민수가 보기에도 태준과 강철의 대립은 팔에 닭살이 돋아올 정도였다.

평소처럼 맥주를 한 모금 삼킨 태준은 오늘 있었던 자신의 연기에 대하여 하소연하듯이 민수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거기서 대체 황제 폐하는 누구의 어버이입니까? 저 민초들은 이제 폐하의 자식들이 아닌 겁니까? 하고 대사를 쳤잖아?

그런데 그때 아버지가….”

“어리석은 놈, 황제가 있어야 백성이 있고, 황실이 살아야 제국이 산다.

아직도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모르고 있었단 말이냐. 이 내가 대체 왜 그러고 있는지. 이 제국이 왜 이 모양인지.

정녕 네가 모른단 말이더냐! 라고 소리치셨지.”

“그래, 그랬지.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때 딱 기분이 확 다운되면서, 완전히 가라앉아 버리더라고.

그래서 그다음 대사 때 내가 생각한 느낌대로 나오지 못했어.

내가 생각한 건 그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흠…”

오늘 태준이 강철과 연기한 장면은 제법 중요한 장면이었다.

논쟁을 통하여 황제의 태도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황태자가 제국을 위하여 황제와 평 모두가 사라져야 한다고 마음을 굳히게 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격하게 서로 논쟁하다 결국 황태자가 황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장면, 민수는 태준이 조금 전에 했던 것처럼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날카롭게 황제를 응시했던 연기가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연기라고 생각했다.

논쟁에서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는 황제에게 밀리는 거야 대본 내용조차 그러했으니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고, 민수도 태준의 마지막 눈빛에서 황태자가 이제 완전히 마음을 먹었다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됐을까. 딱 대사를 듣는 순간 환멸과 절망이 느껴졌어.

그러니까 바로 힘이 빠져 버리더라고.”

“그냥 너무 배역에 몰입해서 그런 거 아닐까?

만약 황태자가 정말 황제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면 난 윤 배우 말대로 절망과 환멸부터 느꼈을 거 같은데.

그럴 때는 그냥 흐르는 데로 내버려 두는 게 좋을 거 같아.

아까 연기 끝났을 때 대표님도 윤 배우한테 잘했다고 했었잖아.”

민수의 말에도 좁아진 태준의 미간은 좀처럼 다시 펴지지 않았다.

“역시 그건가, 하.

난 매소드로 연기하는 거 정말 취미에 없는데, 내가 통제 못 하는 감정을 어떻게 내 감정이라고 할 수 있겠어?

그러면 결국 내가 생각한 데로 연기가 안 나온다는 거잖아.”

민수는 태준이 강철과 연기를 하면서 집중력이 너무 높아진 나머지 자연스럽게 극에 몰입하게 된 것으로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민수는 그렇게 흘러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태준은 자신이 상황에 매몰되듯이 연기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나 보다.

‘하여간…. 이 녀석도 완벽주의자라니까.’

배우는 대부분 기본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연기의 방향이 있다.

민수는 연기를 할 때 어떻게 해서라도 상황에 맞게 연기가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줄 수만 있으면 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어떤 변수가 들어가더라도 결과가 좋게 나오기만 하면 좋은 연기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태준은 조금 생각이 달랐다.

태준은 연기를 할 때 모든 부분이 자신이 생각하는 데로 진행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쪽이었다.

자신이 생각한 구도로 자신이 계획했던 표정과 감정표현, 그래서 자신이 생각한 대로 결과가 나야 그때야 자신의 연기에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태준이 오늘은 연기 중에 자신의 계획에 없던 감정이 튀어나와 버리는 바람에 의도와는 상관없는 연기를 하게 되었으니 속이 좀 쓰린 것도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민수가 보기에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강철 정도의 배우랑 같이 연기하는데 그의 연기에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을 테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집중력이 올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높아진 집중력은 자연스럽게 배역에 몰입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게 몰입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감정이 끓어 올라 이성적으로 연기하는 것을 방해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태준이 감정에 함몰되어 결국 자신이 생각한 대로 연기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태준이 그저 그런 배우라면 상대의 연기에 자극을 받지 않겠지만, 태준 자체도 거의 완성된 배우이니 이 흐름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태준이 이 상황에서 연기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극에 몰입하게 되는 것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그 상황조차 제어할 수 있을 정도로 장악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는데, 강철을 앞에 두고 그런 장악력을 보여 줄 수 있을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조금씩 조절해 봐.

만약 정말 그게 싫다면 어쩔 수 없이 연기 도중에 감정을 제어하는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대표님을 앞에 두고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태준은 민수의 말을 듣고 태준은 천천히 맥주를 들이켜면서 한숨을 쉴 뿐이었다.

민수는 고민하는 태준을 보면서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발전할 배우는 태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수가 보기에, 저렇게 모든 연기를 이성적으로 제어하다 보니 연기가 너무 자연스럽고 매끄럽다는 게 태준의 단점 아닌 단점이었는데, 만약 태준이 몰입과 제어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으면 정말 완성된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막상 자신은 윤 대표와 촬영하는 씬이 거의 없어서 보기만 하는데 저 녀석은 지금 발전하고 있구나 싶어서 민수는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태준의 고민은 계속되었고, 고민하는 태준의 모습을 보면서 민수는 조금 분위기를 환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지금 저렇게 고민해 봤자 전혀 해결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현장에서 깨닫는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순조롭게 촬영이 진행되니 기분이 이상하네, 첫 드라마에서 온갖 사건이 다 터져서 그런 건가? 하하”

민수가 웃으면서 화제를 돌리자 태준도 자연스럽게 웃으며 민수의 말을 받아 주었다.

“그런가, 하긴….. 그 때는 진짜 별일 다 있었지. 마지막에 성추행사건까지 아주 가지가지였어. 그런데 아마 이번 촬영은 정말 별탈 없이 잘 끝날걸.

우리를 방해할 놈들이 진룡뿐인데, 지금 진룡이 이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거든.”

태준이 조금 짓궂은 표정으로 의외의 이야기를 꺼내자 민수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태준의 말에 경청했다.

“큭큭, 지금 진룡애들 영화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이번에 날개에서 이카루스 중국 콘서트를 하는데 진룡 말고 천루 쪽 산하인 티어즈 뮤직이랑 같이 움직이고 있다더라고.

그뿐만 아니라 날개랑 사이가 좋은 몇 개의 소속사가 이번에 티어즈랑 같이 손을 잡기로 했어. 그런데 거기 이름값이 만만치 않다고 하네.

난 아이돌은 잘 몰라서 첨 듣는 애들인데 다들 그래도 중국에서도 제법 인기가 있는 팀들이 가봐.

그래서 지금 진룡은 그거 수습하고 대책 회의하느라 정신이 없을걸”

진룡의 입장에서 영화판은 전진 기지 같은 거라면, 가요 판은 완전 본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이카루스가 자신들과 연계를 하지 않는다면 조금 심각하게 생각할 만했다.

중국 영화가 자국 내에서 그래도 자신의 자리를 잘 잡고 있는 데 비해 중국 가수들은 확실히 한국 가수들보다 한 단계 아래라고 평가받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영화를 중국으로 끌어가는 것보다 아직은 가수를 중국으로 끌어가는 게 이익이 더 크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민수가 보기에도 진룡이 영화판에까지 신경 쓰기는 확실히 어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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