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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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긴장한 표정인 설아는 민수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살짝 웃으면서 애써 긴장감을 억누르고 있었다.
“설아 씨.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이거 몇 번이나 연습했던 거잖아요.”
민수의 말대로 설아는 액션 스쿨에서 이 장면을 몇 번이나 연습했었다.
영화의 초반부, 황제와 평, 그리고 천의 모략이 이어져서 조금 지루하게 흘러갈 수 있는 지점에 들어가는 이 장면은 관객들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을 수 있게 다소 화려하게 연출 될 계획이었다.
따라서 무술 감독인 민 단장도 이 장면에 많은 신경을 썼고, 당연히 연습도 몇 번을 거쳐 설아에게도 다소 익숙한 씬 이었다.
“하…. 그건 그렇지만….”
민수는 설아의 뒤로 다가가 그녀의 굳은 어깨를 살짝 주물러 주었다.
아직 추운 날씨에 조금 움츠러든 어깨에 민수의 따듯한 손길이 닿자 그 포근함에 설아의 허리가 절로 펴지고, 어깨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하던 대로 하면 돼요. 자 파이팅.”
마지막으로 설아에게 격려의 말을 던진 민수는 촬영을 위하여 자신이 연기를 시작할 그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설아도 그런 민수를 보면서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각오를 다졌다.
공주 연화의 후원.
하얀 경장 차림의 연화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공주임에도 무를 숭상하고 협을 사랑하는 연화.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황태자 천의 검으로서 훗날 천의 치세를 조력할 거라 믿고 있었다.
황실 무장의 안내로 연화의 후원까지 동행한 진.
진은 연화가 혼자서 감을 휘두르는 것을 천천히 지켜보고 있다.
흐드러진 후원의 꽃잎 사이에서 종횡무진 검을 휘두르는 연화.
부드럽고 화려하게 이어지는 연화의 검로에, 진은 연화가 검을 폼으로 배운 것이 아님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정도면…. 암월에서도 중수 정도는 되겠군. 귀한 황제의 금지옥엽이 저 정도의 기량이라니….”
진과 황실 무장은 그렇게 잠시 연화가 검무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검무를 마친 연화는 자신을 찾아온 이방인 두 명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잠시 찌푸려진 아미, 인상을 써도 너무나도 고운 자태에 진은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그런 진의 무례에 황실 무장의 인상이 험악해 졌지만, 진에게 간섭하지 말라는 황태자의 명 때문에 애써 참으면서 연화에게 진을 소개한다.
“연화 공주님을 뵙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한쪽 무릎을 꿇는 황실 무장을 보고 진도 엉거주춤 같은 동작을 취했다.
“무슨 일이냐?”
“태자 전하의 명이십니다. 무장 진을 공주마마의 호위 무장으로 임명한다는 명이 있으셨습니다.”
연화는 무장의 말을 듣고 더욱 표정을 구기면서 턱짓으로 엉거주춤 무릎을 꿇은 진을 가리킨 후 차가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저 덜떨어진 놈 말이냐? 저놈이 나를 지킨다고.?”
연화의 차가운 목소리에 무장의 표정은 곤란함으로 살짝 물들었고, 약간의 불쾌감을 느낀 진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진의 조금 불쾌한듯한 목소리가 침묵을 뚫고 연화에게 이르렀다.
“검을 고를 때 날카로운 날을 보고 고르는 것이지, 화려한 검집을 보고 고르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연화는 진의 말을 듣고 조금 흥미가 생겼다는 듯 진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살짝 고개를 저으면서 김이 샜다는 표정으로 진에게 말하였다.
“자네야 말로 진짜 검집이 화려한 사내인 것 같다만…. 그 젓가락 같은 몸으로 검을 휘두를 수나 있겠는가?”
“그 말씀은 공주님이 하실 만한 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공주님도 그 유려한 몸으로 검을 그렇게 잘 다루시지 않습니까?”
공주의 말에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진의 모습에 무장의 얼굴은 당황으로 물들었고, 연화도 기가 막힌 지 잠시 말문을 멈추고 진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공주의 시선에 이제는 몸을 완전히 일으킨 진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연화에게 한가지 내기를 제안했다.
“역시 문제는 실력이겠지요. 만약 제 실력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제가 태자 전하께 호위직을 거두어 달라 청하겠나이다.”
“호… 좋다. 네놈이 나를 제압한다면 군말 없이 네놈에게 호위직을 허락하겠다.”
불이 붙어 자신들끼리 내기를 진행하는 두 남녀를 보며 무장은 이제 그냥 무념무상의 상태에 이르렀다.
연화가 건네는 검을 받아 든 진은 검을 두어 번 휘둘러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연화 앞에 섰다. 가만히 서 있는 자세로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모습에 연화는 조금 인상을 쓰면서 소리를 질렀다.
“자세를 잡아라. 이놈. 감히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연화의 재촉에도 별다른 자세를 잡지 않은 진은 그냥 조용히 웃으면서 연화를 바라볼 뿐이었다.
“건방진 놈….”
연화는 그런 진을 향하여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휘두르고 피하고 다시 휘두르는 동작이 이어지고 결국 진이 연화를 제압하면서 이 장면의 촬영이 종료되었다.
촬영된 영상을 확인하러 온 민수는 영상을 보면서 왠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하얀 경장 차림의 설아와 황족의 호위무사를 의미하는 검은색과 붉은색이 섞인 무복을 입은 민수가 검을 어울리는 모습은 제법 멋들어지긴 했지만 생각하는 것만큼 임팩트가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합 때문이었는데, 약속된 순서대로 동작을 이어나가기에는 설아가 아직 액션에 그렇게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래도 다음 동작을 기억하면서 움직이다 보니 움직임이 조금 자연스럽지 못하고 미묘하게 어색함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어때요? 단장님?”
촬영된 장면을 살펴보던 민 단장은 작게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처음 부분에 설아가 혼자 독무 하는 게 더 우아하게 찍힌 거 같은데.
아무래도 합은 좀 흠….”
체육관에서 연습할 때는 그나마 나았는데, 아무래도 현장에서 체육복보다는 조금 불편한 경장을 입고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건 역시 조금 다른가 보다.
설아도 자신이 연기한 장면을 보고 조금 심각하게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수는 이 장면을 이렇게 넘기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CG로 꽃잎들도 휘리리릭 날리게 연출을 할 테고, 하얀 옷의 설아와 검붉은 옷의 자신의 움직임이 조화를 이루기만 한다면 정말 멋들어진 장면이 연출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던 민수는 피식 웃으면서 설아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러지 말고 좀 자연스럽게 가보죠.
설아 씨, 합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저를 공격한다고 생각하면서 최대한 화려하게 움직여 주시겠어요?
그럼 제가 그냥 거기에 한 번 맞춰 볼게요.”
민수의 말에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아는 민 단장의 얼굴은 황당함으로 가득 물들었다.
“자네… 그게 지금 무슨…..”
“그냥 이대로는 아쉬우니까 한번 해 보자고요. 단장님도 아시잖아요. 제가 얼마나 잘 피하는지 적어도 다치진 않을 테니 저를 한 번만 믿어 주세요.”
다른 사람이 한 말이면 바로 무시하겠지만 연습 첫날 자신이 즉흥적으로 휘두른 검마저도 수월하게 피한 민수였기에, 민 단장은 잠시 머릿속으로 성공의 가능성을 계산해 보았다.
말도 안 된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그렇지 객관적으로 민수의 능력을 생각해 봤을 때 불가능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 성공 가능성이 제법 높았다.
“하지만…. 다칠 수도 있잖아요.”
영 내켜 하지 않는 설아에게, 민수는 웃으면서 자신의 옷 안에 겹쳐 입은 얇은 보호의를 보여 주었다.
“이거 보세요. 이렇게 보호의도 입어서 안 다칠 거에요.”
그 말이 사실인지 파악하기 위해 보호의를 살펴본 설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고민했지만, 민수가 괜찮다고 여러 번 말하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설아가 다시 촬영을 위해 자리로 이동하자 민 단장은 헛웃음을 지으며 민수에게 물어보았다.
“아니 그 소용도 없는 걸 대체 왜 입고 있는 거야?”
“쉿. 설아 씨 듣겠어요. 그럼 우선 촬영부터 해보죠.”
민수가 웃으면서 다시 촬영장소로 이동하자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 감독이 민 단장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다시 찍는 건 나도 동의하지만, 저거 저래서 괜찮겠어요? 합 없이 그냥 간다는 건 나도 처음 듣는 소린데. 혹시 다치기라도 한다면….”
“다치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도 괜찮을 거고요. 아마 잘만 나온다면 정말 좋은 장면이 나올 수도 있긴 할 겁니다.
한번 보세요. 어떤 게 나오나.”
민 단장도 어떤 장면이 나올지 기대에 찬 눈으로 설아와 민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촬영이 시작되자 검을 앞으로 세운 연화가 기합 소리를 터트리면서 진을 향하여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날카롭게 진을 향하여 날아드는 검날, 진은 한발을 슬쩍 옆으로 돌리며 바로 검을 피하였다.
연화의 검이 진의 옆구리를 스치듯 지나가고 진과 가까워진 연화는 바로 몸을 돌리며 진의 하체를 향하여 다리를 휘둘렀다.
몸을 띄워 연화의 발차기를 피한 진은 아까와 같은 자세로 연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의 여유 있는 모습에 노기가 치민 연화는 다시 진에게 달려들어 사정없이 검을 휘둘러 댔다.
합을 맞추지 않아 발생하게 되는 가장 큰 문제는 민수가 설아를 공격할 수 없다는 거였다.
민수는 설아의 공격을 피할 수 있지만 설아는 민수의 공격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인데, 민수가 설아를 무시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설아가 민수를 계속 무지막지하게 몰아치면서 차라리 이 장면이 설득력을 더 가지게 되었다.
민수는 온 신경을 집중하고 설아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하얀색 경장에 조금 긴 소매가 아름답게 펄럭였고, 하얀 설아에게 최대한 접근하여 화려하게 움직이는 설아의 검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검 붉은 민수의 모습이 한데 어우러져 묘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설아의 검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계속 스치는 민수의 모습은 사람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그렇게 수십 합이 지나고, 이 장면을 끝낼 때가 된 민수는 검을 옆으로 세워 검면으로 설아의 검면을 가격해 검을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정말 운이 좋았는지 설아의 검은 공중위로 튕겨 올라 옆쪽에서 촬영하던 카메라 앞으로 돌면서 날아가더니 그 카메라 정면에 딱하니 꽂혀 들어갔다.
그리고 진짜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레진 설아의 모습도 덤이었다.
“이 정도면… 화려한 검집만큼이나 쓸만한 검이 아닌지요.”
숨을 몰아쉬는 연화에게 진이 조금 건방진 말을 던지는 것으로 이번 촬영은 마무리가 되었다.
컷 사인이 나자 숨을 참고 있던 스텝들은 일제히 한숨을 몰아쉬었다.
“와…. 미친….”
카메라를 보며 마음을 졸이던 찬진도 입에서 튀어나오는 욕지기를 자제하지 못하였다.
찬진의 눈에 비친 화면은 예술 그 자체였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설아의 모든 공격을 민수가 몸에 스치듯이 피해냈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 장면을 편집과정에서 자신의 특기대로 씬의 속도를 느렸다 줄였다 하면서 마음먹고 연출한다면 정말 희대의 명장면이 나올 것이 확실했다.
찬진의 머릿속에는 지금 이 장면을 더 아름답게 꾸밀 수십 가지 생각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설아와 민수도 이번에 찍힌 장면들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설아 씨 수고했어요.”
아직도 숨을 완전히 고르지 못한 설아는 그런 민수를 보며 환한 미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조금 숨을 헐떡이면서 자신의 감상을 민수에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말…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정말 민수 오빠랑 한 몸으로 움직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제 움직임 하나하나에 오빠가 다 반응하고 같이 움직이니까, 그냥 한 몸 같다고 해야 하나, 정말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어요.”
두 뺨을 붉게 물들이고 숨을 헐떡이면서 말하는 설아의 모습에 민수는 조금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살짝 돌리고 말았다.
지금 상황을 설명하기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조금 흐트러지고 흥분한 듯한 설아의 얼굴이 민수의 묘한 상상력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민수의 연기를 다시 떠올린 민 단장은 정말 한 번만 저 녀석이랑 같이 합을 맞춰보고 싶다는 강한 욕심이 떠올랐다.
어쨌든 그렇게 민수의 첫 장면은 훌륭하게 잘 촬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