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106화 (106/325)

#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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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랭크인에 들어간다는 사실만 언론에 알린 채 윤 엔터는 더는 언론과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는 진룡이 영화 홍보를 위하여 꾸준히 언론과 연계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사실 우리가 언론플레이에 익숙한 것도 아니고, 작품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언플부터 하는 건 솔직히 그냥 개소리에 불과해.”

진성 선생님이나 윤 대표님이나 영화 촬영 시에는 영화 촬영이 종료할 때까지 언론을 극도로 피하는 성향을 가지고 계셨다.

촬영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시작할 때 영화를 찍는다고 말한 거로 우린 할 바를 다했지. 그다음은 영화의 제대로 찍는 일만 남은 거지.”

태준까지 저런 식으로 나오니 윤 엔터에서도 우선 홍보 작업에 손을 떼게 되었다. .

못내 아쉬워하는 홍보팀장은 할 수 없이 지금 떠돌아다니는 두 영화의 기사들을 모아서 분석하며 다음 홍보 전략을 수립하는 데 최선을 다 할 뿐이었다.

드디어 첫 촬영 날이 다가왔다.

윤 엔터 배우팀과 김찬진 감독이 데려온 제작팀들은 우선 촬영지 근처 펜션 몇 군데에 장기투숙을 예약하고 아예 그곳에서 기거하기로 했다.

그리고 매니저팀과 제작팀의 보조 인원이 서울과 촬영지를 오가며 부족한 물자나 기타 필요한 소품들을 따로 조달하거나, 운반하게 될 것이다.

촬영의 중심지가 될 황궁은 벽의 여러 부분에 CG 작업을 위한 처리가 완료된 상황이었다. 이제 촬영을 마치면 저 부분에 한국판과 중국판에 다른 형태의 CG로 각 국가의 색을 추가할 계획이었다.

“저렇게 파란 딱지를 사방에 붙여 놓으니까 왠지 연기할 맛 안 나는데….”

그렇게 투정 부리던 수연은 태준이 옆집 바보를 바라보는 눈으로 측은하게 바라보자 울컥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한 후 황급히 자신에게 배정된 트레일러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 영화에서 황궁의 인물들은 두 가지 의상으로 촬영을 진행해야 하는 만큼 여성인 설아와 수연은 크게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옷 자체도 불편한데, 의상을 교체하는 건 더 지옥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 여사가 따로 트레일러 두 대를 여배우의 의상을 보관하고 의상을 교체할 수 있는 장소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자신의 트레일러에서 의상까지 착용한 수연은 작게 심호흡을 하고 첫 촬영이 진행되는 장소로 이동했다.

첫 촬영이 시작되는 장소에는 스텝들뿐만 아니라 배우들까지 잔뜩 모여있었다. 다름 아니라 첫 촬영을 끊어줄 배우가 윤강철과 조진성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촬영을 알릴 첫 장면은 이제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황제 “성”과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는 “평”이 자신의 의중을 숨긴 채 서로를 떠보는 그런 장면이었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각, 대전에서 정무를 살펴야 할 황제는 자신의 처소에서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술잔을 걸치면서 키득거리는 황제의 눈빛은 기묘한 광기와 고통 그리고 열망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잠시 후, 처소의 문이 열리고 최고 대신 평이 자리에 들어 황제 앞에 가만히 부복한다.

“폐하. 대전에 드셔야 할 시간이옵니다.”

“호~ 최고 대신인가…. 정신 사납게 정무는 무슨 정무란 말인가. 그래, 그대도 한잔 받겠는가?”

“폐하. 아직 이른 시간이옵니다. 술잔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끌끌…. 재미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귀찮은 정무는 그냥 최고 대신이 알아서 처리하면 될 일이 아니더냐. 지금까지 항상 그랬듯이 말이야.”

“폐하, 어이하여 그런 참담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폐하께서 이 제국의 황제이십니다.”

“킥킥, 술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어서 물러가라.”

황제의 축객령에 살짝 고개를 든 평, 정중한 어투와는 다르게 평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공경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평의 얼굴을 보며 황제는 킥킥대며 웃을 뿐이었다.

광증이 도진듯한 광기 어린 웃음, 황제는 평이 들어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런 광소를 멈추지 않았다.

어젯밤, 수도 서쪽 방면에서 화재가 발생해 평의 휘하가 관리하던 곡창 하나가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평은 그 사건으로 재산상의 손해와 충실한 수하 하나를 처리해야 하는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

오늘 대전에서는 그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야 하는데 평이 회의를 주관한다면, 평으로써도 별다른 손해 없이 어제의 사고를 무마할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황제를 바라보던 평은 무표정한 얼굴로 황제에게 아뢰었다.

“작일, 황도 서쪽 방면에서 큰 소요가 일어, 곡창 하나가 전소되었다고 하옵니다.”

“끌끌…. 서쪽 방면이라… 서문 수비대장이 역심을 품은 것이 아니고서야 어찌하여 황도 내에서 소요가 일어날 수 있단 말이더냐….

그러면 수비대장이 역심을 품은 것이 분명하니 당장 그놈을 잡아다가 물고를 내리면 될 일이지 않은가. 아니 그런가? 최고 대신.”

자신이 벌인 소요임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평의 사람인 서문 수비대장을 물고 늘어지는 황제의 태도에 평의 얼굴에 약간의 노기가 깃들며, 눈썹 한쪽이 살짝 떨려온다.

“서문 수비대장은 따로 조사를 명 하였사옵니다. 하오나…. 황도 내에 어심을 어지럽히는 무리가 활보하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그 무리부터 서둘러 토벌함이 마땅하다 사료되옵니다. 폐하.”

“어심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이라….. 좋지, 좋아. 대신이 알아서 처리하라. 그게 원래 대신이 하던 일이 아니더냐.”

황제의 말에 평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물러난다.

광기의 찬 눈으로 술잔을 기울이던 황제는 평이 완전히 물러나자 완전히 딴 사람처럼 차분하고 가라앉은 눈으로 술잔을 내려놓았다.

“교활한 너구리 같으니라고, 벌써 알아챘단 말이냐.

저놈이 저렇게 말을 한 이상 이미 그쪽은 토벌이 완료된 상황이겠구나.

나와의 연결고리는 모두 제거해 놓은 지 오래지만 아깝구나, 아까워.

적어도 한두 번은 더 써먹을 수 있는 패들이었는데….”

감독의 사인이 나고 두 배우는 웃으면서 촬영된 장면을 확인하기 위하여 카메라 앞으로 모여들었다.

“흠…. 조금 임팩트가 약한데. 표정 전환은 좋았는데, 너무 차분하잖아? 자신의 손발이 하나 잘려나가는 상황에서 저렇게 차분할 수 있을까?”

“그건 그렇겠죠. 흠… 이거 뒷부분은 다시 가야겠군요. 이렇게 시작되면 “성”의 캐릭터가 완전히 달라져 버리겠어요.”

두 배우의 감상을 들은 김찬진 감독은 다시 한번 화면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다.

“대본대로라면 너무 난해하잖아? 처음에 광소를 퍼부으면서 광증을 연기하다, 두 번째는 차분한 듯하면서도 눈빛으로는 광기와 열기를 가져야 할 텐데. 이게 되겠어?

난 차라리 이것도 괜찮은 거 같은데.”

찬진의 말에 강철은 고개를 저으면서 설명했다.

“그러면 후반에 “성”의 광기 어린 행동들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거야.

지금 이대로면 “성”은 그냥 황권을 찾아오기 위한 냉혹한 군주정 도로 밖에는 안보일 테니 말이야. 그러면 후반에 “성”이 하는 미친 짓거리를 보면서 관객들은 괴리감을 크게 느낄 수밖에 없어.”

“그건 강철이 말이 맞아. 이 부분은 무조건 대본대로 가야 해.”

진성까지 강철의 말에 동의하자 찬진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야. 네가 힘들지 내가 힘드냐? 그래 한번 다시 가봐.”

다시 촬영이 시작되고 강철은 세 번의 재촬영 끝에 생각하는 대로 연기를 마칠 수 있었다.

결국 자신의 수족을 잃고 평과의 첫 수 싸움에서 한 수 물러나게 된 “성”이 느끼게 된 치욕과 광기가 눈빛에 은은하게 물들어 나오는 모습을 연기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을 젊은 배우들은 지켜보고 있었다.

“미친…”

민수도 저 장면에 드러난 “성”의 감정을 따로 연기하라고 한다면 바로 그렇게 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감정이 전환되는 그 장면이었다.

처음에 광소를 머금은 연기와 눈빛으로 광기를 갈무리하는 연기.

이 두 가지 모습은 서로 미묘한 차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약간의 차이를 화면을 통하여 관객들이 바로 알아챌 수 있도록 연속적으로 표현해 주어야 했다.

과하면 캐릭터가 무너지고, 차이가 너무 작으면 관객들이 그 차이를 느낄 수 없게 된다.

강철은 그 절묘한 균형을 세 번의 연기로 바로 찾아낸 것이다.

민수는 자신이 저 장면을 연기한다면 저렇게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느 정도 연기에 자신이 붙은 민수는 그런 강철의 연기에 자연스럽게 탄성이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하… 아직 멀었군….멀었어.”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젓는 민수를 보면서 수연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민수를 타박했다.

“당연히 멀었지. 이것아! 선생님이 연기를 몇 년이나 하셨는데, 벌써 네 녀석이 넘보려고 하면 그건 그거대로 너무 웃긴 일인지 않겠니?”

“그러니 아직 시간이 있단 말씀이지.”

태준도 수연의 의견에 동의했다. 자신들은 아직 젊고, 많은 시간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태준도 강철의 연기를 보며 느껴지는 바가 많았다. 그리고 적어도 저 정도 연기를 해 보이겠다는 열망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제 자신의 촬영을 앞두고 차량에 오른 민수는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맡은 배역인 “진”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민수가 생각하기에 “진”은 이 영화에서 나오는 두 번째 미친놈이었다.

물론 첫 번째 미친놈은 당연히 황제였고 말이다.

진은 흑월의 무력단체인 암월을 이끌고 있었지만 흑월의 인원들에게 경원시 되는 인물이었다.

그것은 진의 출생 때문이었는데, 흑월의 수뇌부는 진이 평의 핏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원수의 핏줄.

그것이 흑월의 수뇌부가 생각하는 진이었다.

흑월 내에서 진을 진심으로 따르는 자들은 진이 직접 이끄는 암월 뿐이었고, 이 암월 역시 신분이 특히 비천하고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모인 단체였으니, 흑월 내에서 터부시되는 조직이었다.

즉, 진과 암월은 흑월 내에서 필요악이라고 인정하는 애물단지들이었다.

흑월 내에서 철저하게 무기로 키워진 진.

그렇기에 진은 어딘가 많이 비틀려있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이라 생각하고 흑월에 헌신하는 진, 하지만 정작 흑월에 인정을 받지 못하는 진.

진이 자신의 실체를 알아챌 때까지 그런 번민은 계속된다.

그리고 진은 기본적으로 자유분방하고 막 나가는 성격이었다.

인간쓰레기 집단인 암월을 지배하는 방편이었는데, 그런 행동이 오랫동안 유지되면서 이제는 습관으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결국 진은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분방하고 거칠지만, 속으로는 흑월을 사랑하는 따듯함을 가지고 계속되는 자기 번민과 싸우는 캐릭터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진의 모습이 연기로 다 묻어나야 하기 때문에 민수는 깊게 심호흡하고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진의 촬영은 연화와 진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었다.

천이 흑월과 손을 잡은 후, 진을 궁에 잠입시키게 되는데 천은 진에게 공주인 “연화”의 호위 장이 되라고 명하게 된다.

그것은 연화가 황제와 평 두 사람 모두에게 별 관심을 받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에, 아무도 연화의 궁에 신경을 쓰지 않아 운신이 자유롭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촬영에서 연화가 진을 소개받고, 우여곡절 끝에 진은 연화의 호위무사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민수는 시간에 맞춰서 촬영 장소로 이동하였다.

이번 씬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민수와 설아 그리고 황실 무장 한 명이었다.

촬영장소에는 첫 촬영에 잔뜩 긴장한 설아와 갑옷으로 무장한 남자 한 명이 촬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영화에 자잘한 단역들은 강환의 극단인 “뿌리”(민수는 아직 천지로 알고 있는)의 인원들이 수고를 해 주고 있었다.

민수가 오늘같이 촬영할 무장을 보니 예전에 천지에서 알고 지내던 선배여서 우선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천지에서 오신 선배님이시죠? 반갑습니다. 정민수입니다.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민수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자 상대는 살짝 당황한 듯하다가 마주 인사하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김필성입니다. 이제 천지가 아니라 뿌리입니다. 강환 형님이 이름을 갈아 버렸거든요.”

천지일보 때문에 이름을 바꾸었다는 필성의 설명에 민수는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그런 즉흥적인 면이 참 강환 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훗날 천지, 이젠 뿌리가 된 극단을 뒷받침하고, 훗날 부단장이 될 김필성은 기복 없는 연기가 장점인 배우였다.

그리고 진중한 생활 태도와 연기에 대한 진지한 열정에 모든 단원이 좋아하던 그런 진국 같은 사내였다.

자신의 연기밖에 생각하지 않던 민수조차 그런 그의 모습은 본받을 만하고, 존경받을 만 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좋은 연기 부탁드립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니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바로 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주연배우가 겸손하게 부탁하자 필성도 민수를 조금 다시 본 듯 웃으면서 겸양을 보였다.

그렇게 통성명을 하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 민수는 저쪽에서 긴장감에 몸이 굳은 설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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