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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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거나하게 마신 진성은 술자리를 마치고 차로 돌아와 뒷자리에 머리를 편하게 기대었다.
그리고 차가 출발하자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진 시네마의 박필두, 루인 투자회사의 최상조, 그리고 한성미디어의 정진영 이 세 놈이 너랑 오늘 안면을 텄으니, 아마 앞으로도 너를 주의 깊게 볼 거다.
내가 후배라고 소개했으니, 어쩌면 내 과거의 모습을 너에게서 찾으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어쨌든 안면을 터놓은 게 손해가 되진 않을 거야”
진성은 자신이 마음에 든 후배가 조금 꼬인 상황에서 연기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 못내 안타까웠고, 오늘의 만남으로 조금 수월하게 연기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랬다.
민수는 진성의 말에서 그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진성이 자신에게 제법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신인 배우로서 절대 만나기 힘든 사람들을 소개해 준 것은 자신의 앞날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서 일 것이다.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민수의 감사 인사에 진성은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기만 했다.
중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윤 대표는 자신이 없는 동안 촬영준비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부터 체크했다.
찬진은 오랜만에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여러 가지 일들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덕분에 윤 대표의 부담이 조금 줄어들었다.
다만 황실 의상은 두 가지 모양으로 디자인되었는데, 아무래도 한가지로 만든다면 이도 저도 아닌 의상이 만들어질 거라는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상의 디자인은 유니 스튜디오의 조윤희 선생님과 그 문하생들이 맡아 주었다.
이제 디자인으로 돈을 벌기보다는 취미생활로 즐기면서 하고 싶은 것만 하던 조윤희 선생님은 민수의 코디이자 민수의 팬 카페의 회장인 수정이 넌지시 운을 띄우자, 바로 승낙해서 그날로 디자인 작업에 착수하셨다고 한다.
덕분에 그 나라의 전통적인 모양에서 조금 더 세련된 의상이 디자인되었고 바로 제작이 시작된 상황이었다.
따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연락한 민수에게 조윤희 선생님은 그냥 재미있는 경험이었고, 문하생들도 새로운 작업에 즐거워했다고 대답해 주었다.
이제 대충 윤곽이 나와가는 가운데 배우들은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 정윤숙과 조진성, 그리고 강환은 윤 대표에게 연락해서 한껏 앓는 소리로 윤 대표를 강하게 비난 했다.
비록 장난 반 진담 반이었지만 어려움을 토로한 것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윤 대표는 아무렇지도 않게 당신을 믿고 있다고 꿋꿋하게 밀고 나갔고, 세 명의 배우는 두고 보자는 말과 영화가 성공하지 못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귀여운 협박을 날리곤 했다.
그러는 가운데 윤 대표를 찾은 사람이 있었으니, 지금은 조금 붕 뜬 상태에 놓인 소희였다.
소속사가 바쁘게 움직이는 과정에서 배제된 소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아직 자신의 수준이 다른 배우들만큼 높지 않아서 그렇다고 애써 위안을 가져 보기도 했고, 그 영화에 들어가고도 이름을 날리지 못한다면 정말 연기 생활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참아 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게 발을 빼고 있는 건 정말 아니었다.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던 소희는 무조건 자신도 회사에 도움이 되고 싶었고, 다른 배우들이랑 한 곳에서 연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 결심한 소희는 윤 대표를 찾아 왔다.
소희는 윤 대표를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윤 대표는 소희가 왜 자신을 찾아 왔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고, 어떻게 소희를 설득해야 하나 조금 고민이 되었다.
“대표님. 지금 소속사 배우들이 다 영화에 출연한다고 들었어요.”
소희는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표정으로 전혀 평소답지 않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연기 연습을 할 때 그녀를 많이 관찰해왔던 윤 대표는 소희의 표정에서 그녀가 지금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왔고, 절박한 심정에서 찾아 왔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윤 대표는 소희를 말리고 싶었다.
“그래, 이제 머지않아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 거다.”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한가요?”
소희의 말에 윤 대표는 바로 대답하기 힘들었다.
그냥 그렇다고만 말해도 소희는 아마 단념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기가 부족하면 자신을 절대 써주지 않을 윤 대표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윤 대표는 지금 소희의 연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배역에 심하게 몰입하는 것도 어느 정도 고쳐졌고, 호흡과 발성은 진작에 좋아졌다.
만약 소속사의 상황이 지금처럼 비상사태가 아니었다면 지금 정도의 영화에 괜찮은 조연의 역할을 충분히 맡을 만했고, 아마 이 영화를 적극적으로 추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만약 소희가 이번 영화에 들어온다고 해도 결정적인 역할은 줄 수가 없었다.
만약 그러면 영화가 성공하더라도 소희 개인에게는 손해가 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한껏 독이 오를 진룡은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곳이었다.
윤 대표는 절박한 눈을 한 소희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소희야. 너의 연기는 지금도 훌륭하다. 절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연습으로 익힐 만한 것들은 얼추 다 익혔다고 생각해도 좋을 거야.
그런데 지금 이 영화는 안 되겠구나.”
“저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이 영화가 개봉되면 절대 진룡하고 같은 길은 갈 수 없다고요. 하지만 대표님. 저에게도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어요.”
“끙….”
“대표님이 걱정하시는 거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사실 어차피 저도 진룡에 눈 밖에 난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요.
저도 RD에서 연습생으로 있다가 박 실장님이랑 같이 나온 거잖아요.
진룡이 그렇게 원한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결국 저도 언젠가는 진룡에 눈 밖에 나겠죠. 그럴 바에는 뭐라도 해보고 싶어요.”
소희의 말에 윤 대표는 자신이 소희의 마음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소희의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소희 정도의 신인이라면 윤 대표의 소개로 진룡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대형 기획사로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겨우 RD의 연습생이었고, 윤 엔터에서 연기를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소희를 배척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윤 대표는 이점을 소희에게 다시 설명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것보다. 저도 이제 윤 엔터의 식구가 되고 싶어요. 모든 사람이 발 벗고 나서는 일에 혼자만 웅크리고 싶지 않아요. 대표님 그러니 저에게도 기회를 주세요.”
하지만 식구가 되고 싶다는 소희의 말에 윤 대표는 자신이 생각한 것을 다 설명할 수가 없어졌다.
식구가 되고 싶다는 소희의 말 속에는 사정이 안 좋아져도 윤 엔터를 떠나지 않겠다는 소희의 의지가 강하게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소심했던 소희였기 때문일까, 윤 대표는 평소와는 다른 그녀의 모습을 보며 도저히 거부의 말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결국 윤 대표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허락을 받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표실을 나서는 소희를 보면서 윤 대표는 작게 한숨을 쉰 후 소희의 다음 계획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만약 안 되면 자신의 신념에 조금 빗나가는 일이긴 하지만 태준이랑 엮어서라도 어떻게든 드라마에 출연시켜야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저렇게 먼저 나서서 하고 싶다고 말한 소희가 고맙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진수와 찬진과 이야기를 나눈 끝에 진의 여동생인 수월이라는 캐릭터를 추가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새로운 대본이 각 배우에게 날아갔다.
“오호, 배역이 추가됐네. 이거 소희겠지? 아무래도 며칠 동안 조금 고민하는 기색이었으니까.
암 그래야지. 우리가 남이냐? 원래 이렇게 한번 움직일 때는 다 같이 그렇게 가야 하는 거야.”
민수는 당당하게 말하는 수연을 보면서 요즘 저 선배도 상당히 캐릭터가 바뀌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조금 도도해 보이는 여배우처럼 굴었는데, 이제는 뭐랄까.
그냥 동내 아는 형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 느낌이 조금 들었다.
확실히 가식이 전혀 없는 털털한 태도가 마음이 조금 편하긴 했다. 외모는 전혀 안 그렇게 생겼지만 말이다.
하지만 소희의 태도가 긍정적이라는 것에는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소희는 영화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식구들하고는 조금 벽이 생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윤 대표는 소희를 생각해서 그런 판단을 했겠지만, 민수가 보기에는 그건 차라리 소희에게 좋지 않은 판단이었다.
진룡이 무서워서 소속사 배우 간에 벽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다 같이 모여서 중국 영화를 시청하던 일행은 소희가 수줍은 표정으로 합류하자 기분 좋은 박수를 보내면서 환영해 주었다.
소희가 자신의 개인 연습 때문에 배우들의 모임에는 별로 참석하지 못해서 조금 서먹하긴 했지만 민수는 이번 영화를 같이 찍으면서 다들 좀 더 편한 사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수연은 소희가 오자마자 소희가 자신과 같은 부류인지 아니면 태준 같은 기만자 부류인지부터 확인하고 싶어했다.
“어때, 소희야. 넌 중국어 대본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니?”
“네? 그냥 별생각은 안 했는데요…. 그냥 대본이구나 내용이 재미있구나. 이런 생각밖에는….”
소희의 대답에 수연은 조금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너… 설마 기만자냐? 혹시 중국어 할 줄 알아?”
“네? 아…. 어머니가 중국 분이라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중국에서 살았었거든요. 그래서…”
소희의 말이 끝나자 수연은 절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수연을 보면서 태준은 혀를 끌끌 찼고 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다소 익살스러워 민수는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소희는 중국의 현지인과 같은 수준의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능력자였다.
중국어 구사 능력이 다소 뛰어난 세 명도 소희의 조언으로 더 편하게 대본을 숙지할 수 있었다.
중국어에 완전 꽝인 수연은 말할 것도 없었다.
수연은 그날부터 무조건 소희에게 붙어 다니면서 자신의 대사를 소희와 함께 공부했다.
특히 중국에 거지 같은 성조의 차이까지 완벽하게 교정해주는 소희의 합류는 배우들에게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그래. 정 배우 액션 연기는 잘 되어가고 있나?”
태준이 민수의 액션 연기가 궁금한지 슬쩍 물어보는데 민수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설아가 나서서 큰소리를 뻥뻥 치기 시작했다.
“흥. 바보 오라버니, 나중에 보면 뒤로 넘어갈걸.
진짜 장난 아니란 말씀. 액션 스쿨에 단장님도 민수 오빠 보고 더는 배울 게 없다고 했거든.
내가 처음에 지옥 18단계 할 때부터 알아보긴 했어. 민수 오빠는 그냥 사람이 아닌 거였어.
와~ 샥샥샥 어떻게 그렇게 잘할 수 있는지….
단장님이 민수 오빠보고 세기의 액션 배우라고 했다니까.”
조금 흥분한 듯한 설아의 말에 태준은 다시 봤다는 표정으로 민수를 바라보았고, 민수는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잔뜩 하고 있는 설아를 조금 무안하게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은 태준은 다시 설아에게 물어보았다.
“야, 그럼 넌 어떤데. 너도 민수 정도는 아니지만 제법 많이 움직여야 하잖아.”
“…..뭐 그래도 잘 따라가고는 있어. 비교 대상이 민수오빠라서 그렇지 나도 그럭저럭 잘한대.”
“그럭저럭이 아니라 정말 잘하고 있어, 설아 씨도. 아마 액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보다 투지에서 우리 영화에 참여하고 싶어 하더라고. 아마 소속사 쪽으로 따로 연락이 올 거야.”
“오… 투지에서?”
민수와 몇 번의 연습을 같이한 민 단장은 민수가 영화에서 어떤 식으로 연기를 할지 정말 궁금해졌다.
그리고 만약 엉뚱한 놈이 무술 감독의 자리에 앉게 된다면 저런 보석이 좋은 연기를 하지 못하게 될까 봐 조금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걱정만 하느니 차라리 영화에 참가하자는 결론을 내게 된 것이다.
민수가 좋은 연기를 할 수 있게 조언도 해주고, 그 연기를 직접 보고 싶다는 개인적 욕구도 충족시키겠다는 의도였다.
투지 정도 되는 스턴트 스쿨은 어떤 영화 제작자라도 액션 영화를 찍는다면 손을 내밀 수밖에 없는 집단이었고, 그래서 진룡의 손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민 단장이 윤 엔터에 연락해 액션 감독을 하고 휘하에 단원들을 영화에 출연시키고 싶다는 의사를 내보이자, 윤 대표는 한껏 기꺼워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들과 진룡의 관계를 설명해 주었다.
윤 대표의 말은 들은 민 단장은 상관없다고 말했고, 윤 대표는 감사해하면서 그들의 합류를 환영했다.
“아마 민 단장님이 무술 감독으로 참여해 주실 거야. 참 반가운 일이지.”
민수의 말대로 민 단장과 투지의 참여는 참으로 기꺼운 일이었다.
특히 민 단장 같은 사람은 자신이 마음에 든 배우가 아니면 같이 촬영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니, 나중에 홍보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액션 장면에서 같이 촬영할 스턴트맨들의 구하는 것은 윤 대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찬진이 고민만 하고 있던 사항이었는데 민 단장이 합류하면서 그 부분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이는 윤 엔터 입장에서는 정말 행운이 따른 일이었다.
“그렇네, 이번 영화 운이 좀 좋은가.”
“운도 운이지만, 시나리오가 재미있고 배우가 연기를 잘하고, 제작사가 촬영을 잘하고, 투자자가 태클을 걸지 않는다면 영화가 실패하기가 더 어렵지 않겠어?”
민수의 말에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수의 말대로 흘러간다면 정말 실패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