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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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국에 도착하여 삼화쪽에 속한 배급사인 삼화 필름과 영화 수출에 대하여 이견을 조율하던 윤 대표와 박 실장은 큰 소득 없이 몇 번의 만남을 가졌고, 결국 마지막 논의를 위하여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마지막 논의이니만큼 상대도 격식을 갖추고 삼화 필름의 사장인 위시춘까지 협상 테이블에 합류했다.
삼화 측도 윤 대표가 찍을 영화를 수입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결국 그 가격과 여러 가지 계약조건들 때문에 서로의 이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불가피했다.
박 실장과 삼화측 실무진이 별 실익 없는 토론만을 계속하는 가운데, 윤 대표와 위시춘은 아무런 말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가장 크게 의견 다툼을 보이는 부분은 역시 수익 분배와 스크린 배분이었다.
삼화 측은 대략 3천만 위안 (한화로 약 45~50억) 정도로 중국 내 상영권을 독점적으로 얻기를 원했고, 윤 엔터 측은 우선 상영권만을 넘기면서 중국 내 관객이 천만 이상이 되는 경우 10%의 상영수익을 분배받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스크린도 우선 700개로 배정하고 결과가 좋으면 서서히 늘려가겠다는 삼화 측에 맞서서 윤 엔터 측은 적어도 1500개는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서로의 입장에서 합의점이 도출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윤 대표는 위시춘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사장님.
어쨌든 삼화 측도 우선 영화를 수입하는 거 자체에는 이견이 없는 모양이니, 우선 논의는 여기까지 하죠.
나중에 영화가 나오면 바로 필름을 보내 드릴 테니 영화를 보고 어떻게 할지 다시 이야기해 보도록 합시다.
물론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연히 수입을 취소하셔도 좋습니다.”
윤 대표가 일어서자 위시춘도 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 대표는 위시춘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중국은 참으로 대국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대인들은 때에 따라 돈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시하곤 하시더군요.
저희는 삼화에 최대한의 성의를 보일 것입니다.
그러니 삼화도 저희에게 아량을 보여 주셨으면 좋겠군요.”
윤 대표가 악수를 하고 박 실장과 회의실을 나서자 위시춘은 그런 윤 대표의 뒷모습을 묘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윤 대표와 박 실장은 계약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이번 행보로 자신의 마음에 차는 계약을 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한국 영화가 중국에서 소기의 성과를 내는 중이긴 했지만 아직 대박을 기록한 경우는 드물었으니, 삼화 입장에서도 크게 배팅하기는 어려울 거란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끝까지 과감하게 나간 이유는 올해 전반기에는 삼화에 스케일이 큰 영화를 수출할 한국 제작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 전반기에는 진룡을 통해서 제작되는 영화들이 계속 개봉할 테고, 삼화는 애써 얻은 수입권을 별다른 이익 없이 놀리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어쨌든 진룡의 손을 타지 않은 윤 엔터의 영화를 수입하긴 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윤 대표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몇 개의 스크린이 될지, 혹은 얼마를 받을지가 아니라 상대가 윤 엔터의 영화를 수입할 마음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번 회의를 통해 상대의 입장을 확실히 알 수 있었으니 이제 정말 영화를 잘 찍는 일만 남았다.
“우리가 조금 심하긴 했지?”
“그렇죠. 1500개의 스크린에 10% 수익 배분이라니요. 아마 그들은 한국영화가 그런 조건을 걸고 달려들 거라 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사실 저들이 제시한 3천만 위안만 해도 보통 수입 영화가 받는 돈보다는 많은 돈이니까요. 어쩌면 그걸 거절하고 떠난 저희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우리가 쏟아부을 돈이 배우들 출연료까지 포함하면 못해도 150억이 넘을 건데, 그건 너무 아깝잖아.
솔직히 계약금 따위 필요 없이 몇 %라도 좋으니 무조건 수익분배를 받는 방식으로 계약하고 싶어.
할리우드영화가 아닌 한국영화도 그런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다는 선례가 되고 싶으니까 말이야.”
“영화가 나오면 결정하기로 했으니, 아마 영화가 잘 만들어지면 상대도 어느 정도 수용을 할 겁니다.”
“그래…. 영화가 잘 나오면 말이야.”
“그런데 마지막 그 말은 대체 무슨 뜻이었습니까?”
박 실장의 질문에 윤 대표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별다른 뜻 없었어. 그냥 그 상황에서 내가 위시춘 이라면 조금 기분이 나쁠 것 같더라고.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거 같아서 생각하다가 그냥 튀어나온 말이야. 일종의 립서비스라고 할 수 있겠군.
저 녀석들 대국이란 말 하고 대인이란 말을 더럽게 좋아하니까.
덕분에 상대도 무슨 말인가 싶어서 별로 인상을 쓰지 않았잖아.”
“하…. 대표님.”
윤 대표에 대답에 박 실장은 황당한 눈으로 잠시 윤 대표를 바라보았고 윤 대표는 그런 그의 눈을 살짝 피하고는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삼화에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야. 그래야 그 녀석들이 우리 영화에 많은 스크린을 배정해 줄 테니까 말이야.”
박 실장은 윤 대표가 자기가 처음 왔을 때와도 조금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엄한 얼굴로 무게만 잡을 줄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런 엉뚱함이 있었다니.
“대표님 조금 변하셨네요.”
“아, 그런가? 하긴 그럴지도. 며칠 영화를 찍는다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녔더니, 옛날 생각이 조금 나더라고.
10년을 쉬었지만 나는 아직 배우인가 봐. 막상 다시 영화를 찍는다니 조금 흥분되는 것이….. 하하 이 무슨 주책인지 참….”
박 실장의 말대로 영화를 찍기로 한 이후에 윤 대표는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이게 대표에서 배우로 변해가는 과정인지, 항상 무게를 잡고 있던 모습은 조금씩 사라지고 왠지 웃음도 조금씩은 늘어났다.
시작은 진룡에게 이를 갈면서 한 방 먹여주고 배우들이 자생할 길을 만들어 주기 위해 결정한 영화 제작이었지만 어느새 그 사실은 다 잊은 것처럼 영화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박 실장은 영화 촬영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환하게 웃고 있는 윤 대표를 보며 이 사람도 천생 배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 대표가 떠나있는 사이 대본이 완성되고 배우들은 대본을 받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대본이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였다. 한국어 대본 하나랑 중국어 대본 하나, 두 개의 대본을 받은 수연은 절망에 찬 비명을 질러댔다.
“오 마이 갓! 진짜였어. 젠장.”
태준은 두 개의 대본에서 아버지가 말했던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겠다는 말이 정말 빈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아도 대본을 받아 들었다. 중국어 대본을 받아 들고 잠시 살펴보던 설아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태준을 바라보았다.
“이거 내가 알던 중국어랑은 조금 다르네.”
“사극이니까 아마 그렇겠지? 사극 대사는 원래 조금 다르잖아.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뭐 이런 식이니 조금 다를 수밖에”
태준에 말에 설아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중국의 사국 어투까지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니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이었다.
중국어를 할 줄 안다고 공 먹을 수 없다는 사실에 설아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액션 연기가 조금씩 잡혀가고 있다는 것이 설아에게는 위안으로 다가왔다.
만약 그것까지 엉망이었으면 자신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을 테니 말이다.
“근데 민수는? 오늘 안보이던데.”
수연이 민수의 행방을 궁금해하자 태준은 민수가 오늘 조진성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고 설명했다.
태준의 설명을 들은 수연은 조금 꿍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연기를 배울 때 꽤 자신을 귀여워 해주던 진성의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끙. 왜 민수만 만나러 갔지? 나도 선생님 뵙고 싶은데.”
“선생님이 민수를 한번 따로 보고 싶으시다네. 넌 예전에 선생님께 연기도 배웠었잖아. 그리고 그렇게 뵙고 싶으면 직접 찾아갔어야지.”
태준의 타박에 수연은 날카로운 눈으로 태준을 노려보았다.
“그 선생님이 그렇게 막 마음대로 찾아가도 되는 분이야? 어? 얼마나 어려운 선배님이자 선생님인데.”
“네가 선생님께 애교부리던 거 생각하면 참, 말과 행동이 다르다 그치? 그냥 조용히 하고 중국 사극이나 보는 게 어때?”
태준의 말에 수연은 구시렁거리면서 사극이 나오고 있는 노트북의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설아와 수연, 그리고 태준은 앞으로도 다 같이 모여 중국 사극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중국어 대사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그리고 장소는 당연히 민수의 방이었다.
비록 민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일행들이 대본을 가지고 절망하고 있는 사이 민수는 동원과 함께 “어두운 도시” 촬영장을 찾아가고 있었다.
민수의 손에는 진성에게 전해줄 대본 두 권이 들려 있었다.
“동원 씨, 며칠 동안 선생님의 매니저로 일하게 될 텐데 인수인계는 잘 받으셨어요?”
“네, 선생님이 드시는 음료, 쉴 때 들으시는 음악, 주로 드시는 음식 같은 것들에 대하여서는 대충 메모를 해 두었습니다.
경력이 많으신 분 중에는 특별한 루틴을 가지신 분들이 많다고 하는데 다행히 조진성 선생님은 별로 가리시는 것은 없으시더군요.”
처음에 첫 인터뷰에서 물을 먹고 울상을 짓던 저 매니저도 이제는 제법 매니저티가 났다. 민수는 동원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선생님은 지금 어떤 연기를 하고 계실까. 민수는 조금 설레는 기분으로 촬영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촬영장, 민수와 동원은 자신들을 기다리던 조진성 선생님의 매니저와 교대를 하고는 배우들이 촬영을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촬영장 분위기는 민수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좋지 않았다. 왠지 조금 가라앉은 느낌이라고 할까.
전생에서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면 촬영장이 저런 분위기인 것은 대부분 무슨 문제가 있는 경우뿐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
민수가 의문을 가지는 동안에도 촬영은 계속되었다.
이제 거의 극의 마지막 부분인 듯했다.
진성이 부하에게 배신을 당하고 도망치다 결국 살해당하는 장면, 민수는 전생에서 이 부분을 DVD로 보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전생에서는 선생님이 저 장면을 끝으로 더는 영화를 찍지 않으셨다.
이번에는 조금 달라졌지만 말이다.
민수는 촬영을 마치고 차로 돌아오시는 선생님께 크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진성을 뒤따라 오는 조태수 선배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태수는 민수를 보고는 크게 웃으면서 조진성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살짝 건드렸다.
“선생님, 이거 저번에는 태준이가 인사드리러 오고 오늘은 민수가 인사드리러 오고. 역시 윤 엔터에서는 선생님에 대한 대우가 아우~. 참 이런 건 부럽네요.
우리 소속사 애들은 어떻게 인사 한번 하러 안 오는지 내가 자기들한테 해준 게 어딘데. 에잉.”
“원, 참 실없기는, 막상 인사하러 온다고 하면 학을 뗄 녀석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태수에게 적당히 타박을 준 진성은 민수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후 태수를 태우고 차를 출발시켰다.
동원은 바로 진성이 찍어주는 식당을 향하여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민수와 진성 태수가 차의 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배님 매니저가 걱정하겠는데요. 갑자기 이렇게 타고 떠나셔서.”
“에이. 당연히 미리 말했지. 아마 이따가 식당으로 바로 올 거야. 내가 아무리 막 나가는 사람이라도 그러면 쓰나.”
민수는 전생에 조태수 대탈주! 조태수 잠적! 이런 기사를 많이 접했었다.
그리고 조태수가 걸핏하면 매니저를 버리고 혼자 나다니는 것을 즐긴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떠본 것인데, 아직은 그렇게 매니저를 버리고 다니지는 않는가 보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조진성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민수가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진성이 태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에이, 몹쓸 놈들. 이럴 거면 아예 시작하지 말지.”
진성의 입에서 좋지 않은 소리가 나오자 태수는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진성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선생님을 조르지도 않았을 텐데요.”
둘 사이의 대화를 들어본 민수는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