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99화 (99/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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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나랑 영화를 찍자라, 작은 일이 아니군그래. 대체 무슨 사정이야?”

    강철은 찬진에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강철이 설명을 마치자 찬진은 파안대소하면서 강철을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하하, 그래서 영화로 한번 들이받아 보겠다는 거야? 진룡이랑? 하긴 그러면 이해가 가긴 하네. 앞으로 상업영화 찍을 놈들은 웬만하면 자네 부탁을 거절할 테니까 말이야.”

    찬진에 말에 고개를 끄덕인 강철은 자신이 가져온 시나리오를 찬진에게 내밀었다.

    “이게 그 시나리오야. 한번 살펴봐.”

    찬진은 강철이 내민 시나리오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쉬면서 시나리오를 잡아 들었다.

    “하, 결국 윤강철하고 영화를 찍으려면 내가 선택한 시나리오로는 안된다는 거군. 하지만 너도 내가 찍고 싶은 것만 찍는 거 잘 알잖아.

    남이 주는 대로 찍었으면 내가 지금 독립영화나 찍고 앉아 있었겠어?”

    “김 감독, 내가 그건 잘 아는데 하지만 잘 생각해봐야 할 거야. 그 작품이 윤강철 인생의 마지막 영화가 될 거고, 만약 그걸 찍지 않는다면 김 감독은 영원히 나와 영화를 찍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나뿐만이 아니지. 진성 형님도 그 영화를 끝으로 은퇴하신다고 했어. 자네가 가장 좋아했던 배우 둘의 은퇴 작이야. 그 정도면 자네의 신념을 잠시 놓을 가치가 있지 않나?”

    강철과 진성의 은퇴 작이라는 말에 찬진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강철의 내민 시나리오를 펴고 대충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찬성이 보기에 시나리오의 내용은 무난한 느낌이었다. 크게 혹하지는 않았지만 찍으면 그럭저럭 찍을 순 있어 보였다.

    그리고 우습게도, 지금까지 자신을 매혹했던 시나리오들은 다 망했고, 자신이 무난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거의 흥행에 성공했으니, 아마도 이 작품도 무난하게 촬영된다면 어느 정도 흥행에 성공하겠다 싶었다.

    “이거, 무난하긴 하네. 조금 손볼 곳은 몇 군데 보이지만 말이야. 그래. 출연 배우는 누구누구야?”

    “나랑 진성 형님. 그리고 윤숙 누님. 강환이랑 윤태준, 이수연, 정민수, 그리고 설아. 우선 정해진 건 이정도야.”

    “미친…. 네놈이랑 조진성 배우님. 정윤숙 배우님이랑 윤태준 이렇게만 해도 출연료가 대체 얼마냐? 이거 투자자는 확실한 거야?

    저거 대충 찍어도 100억은 들 거야. 마무리 CG 작업이랑, 전투씬 2개가 얼마를 잡아먹을지도 모르는데 진룡쪽 말고 그렇게 투자할 투자자가 있다고?”

    “투자자는 걱정하지마. 그 정도는 충분히 마련해 줄 테니까. 어때 할 거야 말 거야? 이거 네가 안 한다면 또 다른 감독 찾아가 봐야 해.”

    “이거이거, 이놈 또 제 마누라 손 빌렸구먼 저렇게 당당한 거 보니. 하여간 장가 하나는 잘 가서는, 너 이거 망하면 처갓집 기둥뿌리는 하나 뽑아 먹는 거 알고는 있냐?”

    강철은 찬진의 타박에 어이가 없었다. 진짜 마누라 잘 만난 게 누군데 저런 말을 하는지, 강철은 저놈이 마누라를 잘 만나지 못했으면 저렇게 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은 꿈도 못 꿀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찬진은 부인은 찬진이 처음 찍게 된 영화의 조연배우 중 한 명이었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실 연기자의 재목은 아니었다.

    평소 같았으면 연기자의 실수에 때려치우라고 소리를 지를 찬진이었지만 그때만은 무엇에 씌었는지 아주 친절하게 그녀를 잘 다독여 영화 촬영을 마쳤지만, 불행히도 그 영화는 결국 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자상한 찬진의 모습에 반한 배우는 찬진에게 큰 호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녀의 적극적인 대시에 찬진과 그녀는 금방 연인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찬진에게 절망을 준 영화였지만 찬진은 그 영화에서 자기 인생의 가장 큰 조력자를 만난 셈이었다.

    어느 세 여배우와 좋은 관계가 되었던 찬진, 찬진이 별생각 없이 호감을 느끼게 된 이 여자는 그 당시 300개의 스크린, 지금은 1000개가량의 스크린을 가진 사업가의 딸이었고, 그녀의 가족들에 열렬한 반대를 뚫고 결혼에 성공한 순간부터 찬진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되었다.

    지금도 독립영화를 찍을 때마다 처가에서 몇 개 정도의 스크린은 무조건 배정해 주고 있었고, 마음씨 착한 부인은 항상 옆에서 자신의 영화를 좋아해 주었으니 정말 부인복이 탁월한 남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윤 대표의 머릿속에 찬진을 감독으로 내정한 이유에는 그의 능력에다가 그런 배경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김 감독이 그런 말 하는 건 진짜 누워서 침 뱉기 아니야? 그래서 할 꺼야 말 거야?”

    “끙…..”

    찬진은 섣불리 결정하기 힘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조금 고민은 되었겠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아무리 윤강철이라도 지금까지 지켜온 자신만의 신념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요즘 상황이 조금 좋지 않았다.

    그 착하던 부인도 근래에는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자신이 감독이란 이름을 달고 있지만 변변찮은 작품도 없었고, 당연히 수상경력도 없었다.

    아내가 아무리 자신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까지 좋아해 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특히 올해 신년인사를 하러 갔다가 아내가 형제들에게 조금 무시를 당한 듯하기도 했다. 하긴 남편이 그렇게 처가에 빌붙어만 있으니 어찌 아내의 면이 살겠는가.

    그리고 항상 몇 개의 스크린을 배정해주는 장인어른께도 면목이 없었고 말이다.

    자신이 무시당하는 거야 별 신경도 안 쓰지만, 부인이 그 대상이라면 정말 이야기가 달랐다. 그래서 찬진도 적어도 한편의 대표작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강철이 나열한 그 배우들. 그들이 대충 적당히 연기만 해도, 아니 그들이 한 작품에 나온다는 것이 세간에 퍼지기만 해도 아마 몇백만의 관객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찬진은 이를 악물고 강철에게 대답했다.

    “야. 그래 한다고 해. 그래서 얼마야? 제작해주면 우리 쪽에 떨어지는 건.”

    “촬영 기간에 스텝들 월급 다 주고, 한국 상영 순수익의 10%”

    “에라이. 도둑놈아!”

    “이봐, 김 감독. 투자자 우리가 다 물어왔고, 배우들 내가 다 구했고, 김 감독이 할 일은 촬영하고 소품 챙기는 일뿐이야. 그럼 그 정도가 적당하지 않겠어? 대신 시나리오만 어기지 않으면 촬영은 김 감독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 줄게.”

    “끙….”

    사실 윤 대표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영화계의 소득분배가 개선되어서 상영관이 50%만 가져가게 되었다 쳐도. 제작사가 가져갈 수 있는 소득의 맥시멈은 20~30%에 불과했고 그중에 배우들 출연료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그걸 제외하고 순이익의 10%면 나쁜 제안은 절대 아니었다.

    “뭐, 좋아. 그래 그러자고. 그러면 우선 시나리오부터 손봐야겠군. 그쪽 시나리오 집필자를 이쪽으로 보내. 당장 시작하게. 그리고 촬영은 우선 단양에서 하게 되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쪽에서 빌릴 수 있는 것은 빌려야지.

    문제는 마지막 전투야. 협곡과 관문이 필요한 데다가…. 일부를 CG로 대체한다 쳐도, 아무래도 관문을 적당한 위치에 지어야 할 거 같아.”

    “제작비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군. 그래도 관문 하나만 지어도 된다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좋아, 그건 내가 알아봐야 할 일이네.

    시나리오 작업을 마치면 소품 제작이랑, 마지막 촬영 전에 관문 짓는 건 내가 알아볼 테니.

    윤강철 배우님은 이제 앞으로 할 연기에나 신경 쓰셔.

    한 10년 쉬었다고 내 작품에서 거지 같은 연기를 하는 건 아니겠지? 비싼 배우 윤강철 씨?”

    이야기가 잘 풀려서 제작자 겸 감독을 구하게 된 윤 대표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만 남았다. 어쩌면 이 마지막 작업이 가장 중요할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준수를 이곳으로 부른 윤 대표는 찬진에게 잘 해보자고 인사를 건넨 후. 마지막 계약을 위하여 중국으로 출발할 준비를 서둘렀다.

    윤 엔터의 모든 인원은 앞으로의 촬영을 위하여 여러 가지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중에 배우가 할 일은 역시 연기 준비였다.

    “이거, 중국도 겨냥해서 영화를 만드는 건데, 혹시 중국어로 연기를 해야 할 수도 있는 건가?”

    뜬금없는 수연의 말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수연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태준은 그런 수연을 살짝 비웃으면 입을 열었다.

    “설마, 자막이겠지. 흠…. 하지만 생각은 해볼 일이네. 중국어로 연기를 할 수만 있으면.”

    태준에 말에 민수는 문득 아직도 중국의 장년층 이상은 자막을 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젊은 층은 한국의 드라마나 예능 등을 인터넷으로 시청하면서 자막으로 처리된 영상을 보는 일에 상당히 적응된 상황이라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장년층 이상은 자막을 보는 것을 별로 즐기지 않았다.

    중국의 미묘하게 높은 문맹률도 이것과 상관있긴 하지만 사실 그보다 역시 가장 주된 이유는 역시 중국의 끝없는 자부심이었다. 모든 문화의 중심을 자신들이라고 생각하는 중국이라 자국에 들어온 콘텐츠도 자국의 언어로 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러면서도 할리우드 영화는 중국에서 잘나가고 있으니 그건 조금 아이러니하긴 했다.

    확실히 자막으로 된 영화보다 중국어로 된 영화가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수출판은 중국어로 연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민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수연이 질색인 표정을 지었다.

    “야, 영어도 못 하는데 중국어를 하라고? 차라리 날 그냥 죽여!”

    수연의 소리를 버럭 지르자 태준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혀를 찼고 설아는 슬쩍 수연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민수는 피식 웃으면서 수연을 달래 주었다.

    “수연 선배. 중국어를 마스터 하는 건 어렵지만 적어도 대본에 나온 말 정도를 숙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파이팅?”

    “뭐야? 너 설마 중국어 할 수 있어?”

    “뭐. 조금은요. 대본을 보고 연기를 할 정도는 되죠.”

    수연은 민수의 대답을 듣고 절망한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젠장, 나만 바보야? 저 남매는 어려서부터 중국어를 공부했으니 당연히 할 줄 알겠고, 민수만 믿었는데 저놈까지 중국어를 할 줄 알다니….”

    “그런데. 정윤숙 선생님하고 조진성 선생님은 중국어를 할 줄 아시나?”

    “글쎄요….”

    민수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중국어에 대한 것은 좀 나중에 신경 써야 할 일이었지만 지금 당장 신경 써야 할 일은 역시 액션 연기에 대한 대비였다.

    민수는 작품 내내 액션 연기가 대부분이었고, 설아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배역의 특성상 제법 많은 액션 연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민수는 설아에 대해서도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예전에 설아와 같이 지옥 18단계를 하면서 느낀 것인데, 설아의 체력과 근력, 그리고 민첩성은 이미 여성의 수준이 아니었다.

    태준이 농담 삼아 자신과 싸워도 이길 거라는 말은 완전히 빈말은 아닐 것이다.

    물론 한창 때인 젊은 남성을 완전히 제압하진 못하겠지만, 만약 태준과 설아가 글러브를 끼고 링에서 붙는다면 태준이 이긴다고 장담하진 못하리라.

    하지만 액션 연기는 신체 능력이 아니라 기술로 하는 것인 만큼 설아도 처음에는 많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금방 익숙해지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설아와 민수는 윤 대표가 예약해 놓은 액션스쿨로 아침 일찍 출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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