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98화 (98/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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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남은 시나리오들을 다 살펴보았지만 역시 마음에 차는 대본은 없었다.

결국 준수의 시나리오로 결정을 내린 일행은 윤 대표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대표실을 찾게 되었다.

윤 대표는 준수까지 우르르 몰려와 대본을 내미는 일행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면서 대본을 읽어보았다.

윤 대표가 시나리오를 보는 동안 일행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윤 대표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저 시나리오가 퇴짜를 맞는다면 다시 시나리오를 결정해야 하는데 정말 적절한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본을 한장 한장 넘기는 윤 대표의 표정은 자못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살짝 미소를 지은 윤 대표는 고개를 들고 준수를 바라보았다.

“이 시나리오를 준수가 썼다고? 재미있더구나.”

윤 대표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일행들의 얼굴이 조금 밝아 졌다. 하지만 윤 대표의 다음 말이 이어지자 다시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걸 그대로 영화로 만들 수는 없겠구나. 아마 다른 제작사들도 이 시나리오를 그대로 영화화하는 것은 반대 할 거야.”

윤 대표는 자신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일행의 행태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으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워 녀석들도, 이대로 할 수는 없다는 거지 전혀 쓰지 못한다는 소리가 아니야. 조금만 변형하면 충분히 써먹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우선 이 시나리오를 보니 사극 주제에 제작비가 엄청나겠더구나. 특히 마지막 전투 장면과, 황성 전투 장면을 포함 한다면 엄청나겠구나.

아마 배우 출연료를 제외하고도 100억은 족히 들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면 제작사 입장에서는 국내 상영만으로 손익 분기점을 넘기고 이익을 얻는 것에 조금 부담스러운 입장이 된단다. 그럼 결국 눈을 해외 쪽으로도 돌리게 되는데…

이 시나리오는 딱히 수출할 곳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구나.

특히 이건 절대 중국에서는 수입을 허가하지 않을 거란 말이야.

우리의 목표가 우선 한국 시장과 중국 시장이니…. 조금 수정을 해보자.

우선, 국가는 고려보다는 가상의 국가가 좋겠구나.

특히 황실의 인물들이나 대신들의 의상에 신경을 써야겠다.

의상은 고려의 복식을 그대로 따는 것보다는 살짝 명나라나 당나라의 화려한 복식을 추가하면 좋겠구나.

이렇게 하면 우리가 보기에는 익숙한 고려 시대와 비슷하고, 중국 쪽에서는 고대의 중국쯤으로 생각할 수 있게 말이다.

그리고 여기, 흑월이 반란을 일으키는 부분. 이 부분은 부득이하게 수정해야 할 거 같구나.

중국은 반란에 민감하게 반응한단다. 아마 이 부분이 그대로 들어간다면 절대 중국에서 수입을 허가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를 보니, 상대가 원나라 기병하고 비슷하게 설정되어있던데, 이 부분은 서양 어딘가의 오랑캐나 아니면 야만인 정도로 바꾸면 어떨까. 어떻게 바꾸던지 상대가 몽골족이 되어선 안 될 거야.

그 치들, 웃기지만 원나라 몽골족조차 자신들의 역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서 말이야.

특수 분장이 들어가야 해서 수고스럽긴 하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겠지.”

윤 대표의 설명이 이어지고 진수는 윤 대표의 말을 귀 기울여 경청하고 있었다. 그런 진수의 모습에 살짝 웃음을 지은 윤 대표는 마지막으로 진수에게 이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우선 내가 보기엔 이 정도인데…. 조금 더 수정해야 할 수도 있단다. 만약 시나리오를 조금 수정하게 해준다면, 난 이 시나리오를 쓰고 싶구나.

우리랑 계약하겠니?”

윤 대표가 계약하고 싶다고 말하자 준수는 자신에게 다가온 뜻밖의 행운에 감사하면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수가 흔쾌히 허락하자, 윤 대표는 웃음을 지으면서 준수에게 앞으로의 상황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우선 제작사가 결정되면 이 시나리오를 조금 더 수정하게 될 거야.

하지만 중요한 부분들은 손대지 않을 생각이니 그건 걱정 말아라.

그리고 너도 시나리오 수정과정에 참가해서 더 배우도록 하는 게 좋겠구나.”

윤 대표는 생각보다 재능이 있어 보이는 준수에게 한 가지의 경험이라도 더 쌓게 해주고 싶었다. 윤 대표의 마음을 눈치챈 준수는 더 많이 배워 더 좋은 시나리오로 보답할 것을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동생의 목숨을 구해준 민수가 있는 곳, 그리고 동생과 자신이 살 집을 마련해 주고, 일자리를 마련해준 윤 대표가 있는 곳. 윤 엔터는 준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감사한 곳이었다.

자신의 시나리오가 윤 엔터에 도움이 된다니, 준수의 가슴속은 만족감과 뿌듯함으로 가득 차올랐다.

기뻐하는 준수를 웃으면서 바라보던 윤 대표는 시선을 돌려 한숨을 쉬며 안도하는 민수와 일당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그들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하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본이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대충 자신이 어떤 배역을 해야 할 거라는 것은 잘 알 거라 믿는다. 특히 설아랑 민수는 준비할게 많겠구나. 저 액션 장면 들을 차질 없이 촬영할 수 있게 준비를 해야 할 거야.

액션 스쿨에 연락해 놓으마. 미리부터 준비해 놓도록 해라. 아 그리고 민수는 잠시만 남아라.”

나머지 일행은 전부 나가고 민수만 자리에 남았다. 의아해하는 민수에게 윤 대표는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흠… 사실, 진성 형님이 너를 조금 보고 싶어 하시더구나. 그래서 말인데…. 혹시 괜찮으면 진성 형님의 촬영장에 한 번 내려갔다 오겠니?

며칠 있으면 “어두운 도시”가 막바지 촬영에 들어가게 되고, 동원이가 한동안 진성 형님의 매니저로 일하게 될 거야. 그때 하루 따라가서 형님을 좀 만나고 왔으면 좋겠구나. 괜찮겠니?”

불감청 고소원이라 했던가. 민수가 원해 마지않던 일이라 민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민수가 꺼리는 기색 없이 바로 승낙하자 윤 대표의 표정도 덩달아 밝아 졌다.

“그래. 그럼 그렇게 알고 내일부터는 우선 액션 스쿨에서 액션 연기를 배우도록 해라. 촬영장 방문 일자는 동원이를 통해서 알려 주도록 하마.”

민수까지 대표실을 나서자 윤 대표는 시나리오를 바라보면서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다.

자신의 마음에 완전히 든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 정도 시나리오도 충분히 과분했다. 아마 아무리 봐도 이것보다 나은 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윤 대표는 시나리오까지 확정이 되었으니 이제는 제작자를 만나러 가야 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놈을 만나러 갈 시간이군. 그놈이 허락해 줘야 할 텐데….”

자신을 한창 귀찮게 하던 그놈을 생각하자 윤 대표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맺혔다. 아마 그놈의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면 윤 대표는 아마 상당히 귀찮아 지리라.

그날 저녁, 윤 대표는 대본 하나만 들고 충무로에 한 영화사를 찾아갔다.

“대한 영화사” 허름한 건물 위에 박혀 있는 간판을 바라보면서 윤 대표는 자신에 과거의 편린을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이 되었다.

윤 대표가 한참 활동하고 있을 시기만 해도 영화제작사는 대부분 충무로에 몰려 있었다. 지금 윤 대표가 서 있던 이 거리에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많은 영화사가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지금 새로 생겨나는 영화사들은 강남 근처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직도 그대로 여기에 있었다.

허름한 계단을 지나 위로 올라간 윤 대표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는 모니터를 집중해서 바라보던 한 남자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평범한 난방에 조금 부스스한 모습의 남자는 찾아올 사람도 없는 시간에 누군가 자신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윤강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게 누구야. 윤강철이잖아?”

“사는 꼬라지 하고는. 밥은 먹고 다니는 거냐?”

한때 극장가에 한국 영화의 붐이 일고, 한국에는 기린아라고 부르던 여러 명의 젊은 감독이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거장이 되어서 한국 영화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고, 일부는 자신에게 실망하면서 이 바닥을 떴으며, 일부는 아직도 이 바닥에서 자신의 인생 작을 찍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한때 기린아라고 불린 김찬진 감독은 조금 달랐다. 크게 두 번의 영화를 말아먹은 이 감독은 그냥 자신의 역량이 그 정도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 버렸다.

그리고 영화를 찍는 즐거움은 잊지 못해,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찍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괴짜였다.

한때 신성이라 불리다가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채 자신을 스스로 망령이라고 부르는 김찬진 감독을 그 당시 영화 관계자들은 “3초의 예술”이라고 불렀었다.

그 당시 씬 자체의 아름다움과 배우의 매력을 극도로 올리는 자신만의 기법을 가진 이 감독의 실패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건 윤강철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김찬진 감독은 어째서 두 개의 영화를 완전히 말아 먹었을까. 그건 김찬진 감독이 유일하게 가지지 못한 것이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었기 때문이다.

작품 보는 눈이 너무나 안 좋은 이 감독은 심지어 작품을 선택할 때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전혀 듣지 않는 쇠고집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두 번의 실패를 겪은 후 찬진은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대로 작품을 선택해서 영화를 찍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의 돈으로 자기가 찍고 싶은 영화를 찍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저예산 독립영화를 찍는 것이었다.

“호…. 정말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세상에 윤강철이라니. 이게 몇 년 만이야?”

“얼추 십 년은 넘었네. 내가 영화판 떠나고 나서는 처음 만난 것일 테니까.”

“못된 놈…. 연락 좀 하고 살지. 그렇게 다 떠나 사니 살만하디?”

“흥, 연락했으면. 네 녀석이 계속한 편 찍자고 얼토당토않은 시나리오를 계속 들이밀었을 텐데. 그 지겨운 일을 반복하자고?”

“아니, 그럼 한편만 찍어 주면 됐잖아?”

“네놈이 찍은 영화 결과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내가 말했지 대본만 적당한 거 가지고 오면 무조건 찍어준다고.”

“끙…. 그래. 그건 그렇지.”

젊은 시절 김찬진 감독은 윤강철의 연기에 강하게 매료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후 2번의 작품을 찍을 동안 항상 가장 먼저 대본을 건네준 배우가 윤강철이었다. 하지만 윤강철은 항상 대본을 탓하면서 김찬진의 영화에 합류하지 않았다.

처음에 찬진은 강철이 그냥 대본을 핑계로 자신 같은 성공작이 없는 감독과는 촬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를 찍을 때 이를 악물고 찍었었다. 성공해서 꼭 저놈과 영화를 찍겠다고.

하지만 강철이 입봉 신인 감독과 영화를 찍는 것을 보고 정말 화를 참을 수 없게 된 찬진은 혼자서 강철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마주한 술자리에서 찬진은 알게 되었다. 강철이 핑계가 아니라 정말 시나리오 때문에 자신의 영화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눈 둘은 그때부터 배우 대 감독이 아닌 인간 대 인간의 사이가 되었었다. 그리고 자신이 찍고 싶은 시나리오 말고 다른 걸 찍어보라고 가장 많이 설득한 것도 강철이었다.

하지만 결국 강철은 찬진을 전혀 설득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찬진은 이제 이렇게 자신이 찍고 싶은 것만 찍는 독립영화의 감독이었다.

차라리 상업적인 성공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 행복한 삶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강철이 보기에도 성공작 하나 없는 이 감독이 불행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어쨌거나 오늘은 강철이 이 감독을 설득하여야 한다. 자신이 주는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자고 말이다.

“그래. 옛이야기는 뭐 그렇고, 여기까지 무슨 일인고? 비싼 배우 윤강철.”

찬진의 말에 강철은 입가는 옛 생각으로 웃음이 절로 머금어졌다. 찬진은 항상 자신을 비싼 배우라고 불렀었다. 자기의 부탁은 한 번도 안 들어준다고, 이제 스크린을 떠난 지가 10년쯤 지났지만 이 감독에게 자신은 아직도 배우인가 보다.

“하하, 비싼 배우라. 그 말도 오랜만이군. 감회가 새로워 정말….

김 감독. 나랑 영화 하나 찍어 볼 생각 없어?”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들은 찬진의 눈은 의아함으로 가득 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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