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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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엔터의 차후 행보가 결정되자 소속된 모든 인원은 자신의 맡은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배우들이 맡은 일은 바로 시나리오를 체크하는 일이었다.
민수와 태준, 그리고 설아와 수연까지.
윤 엔터의 배우들은 민수에 방에 옹기종기 모여 박 실장이 어디선가 끌어온 시나리오들을 천천히 살펴보고 있었다.
시나리오에 맞춰 배우를 섭외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에 맞춰 시나리오를 찾아야 하는 이례적인 상황, 특히 민수와 수연이 조금 돋보일 수 있는 극본을 찾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역시…. 마음에 드는 걸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네.
아버지 말로는 강환 삼촌이랑 조진성 선생님하고 정윤숙 선생님까지 참가하신다고 하던데. 세 분 다 어떤 배역이든지 상관없다고 하셨고 말이야.”
태준에 말에 민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태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윤 대표가 회사의 활로를 뚫기 위해 영화를 제작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게 며칠 전이였다. 그래서 민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진성 선생님은 이제 은퇴를 생각하고 계신 만큼 같이 연기를 할 기회가 없을 거로 생각했었기 때문에 애써 기대감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윤 대표님이 결국 조진성 선생님의 설득에 성공한 모양이다.
게다가 배역에 상관없이 하겠다는 것은 이번에 젊은 배우들을 확실히 밀어주겠다는 뜻이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지만 정말 놀라운 일은 윤 대표까지 한 배역을 소화해 주겠다고 선언한 일이었다.
‘하…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전생에서는 다시는 작품을 찍지 않으셨잖아.’
살짝 얼이 빠진 듯한 민수를 바라보면서 태준의 얼굴에 미소가 한껏 번져간다.
“사실 나도 믿어지지 않아.
한때 내 소망이기도 했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일이 이렇게 흘러가다 보니 이렇게 돼버렸어.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건 다 동원하시겠대.”
태준에 말에 정신이 번뜩 돌아온 민수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태준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묘한 기대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동원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으뜸은 역시 아버지 그 자신 아니겠어?
윤 강철의 10년 만에 스크린 복귀작이라…. 그리고 그 작품을 아들인 내가 같이한다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태준의 말 대로였다. 민수의 머릿속에서도 사람들의 반응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한때 최고의 배우였던 윤강철.
지금 30대가 넘은 사람들은 아직도 윤강철을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배우였던 강철과 지금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인 그의 아들 윤태준.
이 둘이 같은 영화에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이 엄청나게 집중될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하… 재수 없으면 두 부자의 들러리만 잔뜩 서겠네. 뭐, 나야 상관없지만 민수 후배는 갈 길이 구만리인데 괜찮겠니?”
수연이 걱정 반 농담 반으로 말을 꺼냈지만 민수의 얼굴에는 환희만이 가득했다.
조진성과 윤강철, 그리고 윤태준. 이들과 한 무대에 선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들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연기를 한 번만 선보일 수만 있다면 솔직히 민수는 그다음 날 은퇴를 해도 좋았다.
“그래. 네 녀석 얼굴을 보니 딱 봐도 괜찮아 보이네.”
민수의 반응에 수연은 자연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대본으로 눈을 돌렸다.
사실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 수연조차도 마음속으로는 윤 대표와 한 작품에서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뜨겁게 반기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는 수연의 눈이 묘하게 불타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옆에서 민수의 반응을 살피던 태준도 민수의 얼굴을 보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래야지. 태준이 생각하는 민수는 연기에 있어서는 물러서는 남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이 소식을 접하고 환호를 부른 만큼 분명히 민수도 그럴 거라 예상했는데 역시 자신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
과연 저 친구가 내로라하는 대 선배 둘과 함께 어떤 연기를 보여 줄 것인가. 태준은 자신의 기대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배우 윤강철은 자신의 마음속에 산과 같은 존재였다.
자신이 가장 본받고 싶은 이상적인 연기자인 아버지.
결국 연기자가 되었지만, 자신에게는 아버지와 한 무대에 설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그 점이 못내 안타까움으로 남아 있었다.
은퇴가 너무 이른 것이 아닌가, 왜 이렇게 빠르게 은퇴했을까.
항상 아쉬웠지만, 청룡과 주작에서 모두 대상을 탄 후 더는 의욕을 가지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후진 양성에 힘 쏟겠다는 그 생각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아버지와 꼭 같이 연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반 은퇴상태인 아버지에게 같이 한 번만 연기를 해달라고 조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것은 그냥 희망으로 남았고 항상 아쉬움을 마음속 깊이 삼키기만 했었다.
“나도 지금은 차라리 아버지의 자존심을 왕창 긁어준 진룡에 조금 고마운 마음이야. 그들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아버지가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으셨을걸.”
태준의 표정에서 민수는 그 생각을 능히 짐 직할 수 있었다. 자신도 그런 위대한 배우가 아버지로 계셨으면 당연히 한 번쯤은 같이 호흡을 맞추고 싶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존경하는 배우와 연기를 같이 하는 것과 그런 아버지와 같이 연기하는 것 아마 둘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할 것이다.
“대본이 중요하겠네요. 민수 오빠가 묻혀 버리면 영화를 찍는 의미가 퇴색돼버리잖아요.”
설아가 중간에 덧붙여 말하자 민수는 그냥 웃으면서 설아에게 대답했다.
“아니죠. 이건 어떻게 찍어도 찍기만 하면 저에게 큰 의미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최선을 다해야겠죠. 이런 경험은 아마 절대 다시 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거 어쩌면 설아 씨 데뷔작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 설아 씨도 집중해 주세요.”
설아는 민수의 말에 입을 뿌 하고 내밀고는 다시 대본 선별 작업에 집중했다. 그런 둘의 모습에 태준은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태준도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본 선정 작업에 더 집중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다들 만족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태준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대본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대본을 살펴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것은 역시 없었다.
역시 문제는 등장인물을 배우들에 맞추는 것이었다.
배우의 수 자체가 자신들의 무기 중 하나였으니, 등장인물이 줄어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결국 대본에 배우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선택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난이도가 몇 배로 증가 되었다.
“확실히 쉽지 않아. 물론 대본 수정을 통해서 인물 한두 명 정도는 수정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만큼 매력적인 시나리오는 없군.”
“그거야 그렇지. 그리고 그 정도 시나리오라면 이미 영화 계약이 잡혀 있겠지.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겠어?”
잠시 쉬는 시간 동안 일행은 현 상황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음…. 우리에게 맞춘 시나리오가 아니라면 역시 어려우려나요.”
설아가 맞춤이라는 말을 하자 민수는 잠깐 며칠 전 준수가 내민 대본이 생각났다. 그 대본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뭔가 익숙한 느낌이었는데 설마 그 녀석이 윤 엔터 배우들을 생각하고 대본을 쓴 건가 싶었다.
민수는 바로 준수가 자신에게 넘겨준 대본을 모두 앞에 펼쳐 들었다. 태준은 민수가 자신의 책상 위에서 시나리오를 건네주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것을 살펴보았다.
시나리오를 대충 살펴본 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민수를 바라보았다.
“이거 괜찮은데,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보다 배역이 왠지 우리들 숫자랑 좀 비슷하지 않아?”
민수가 느낀 것을 태준도 바로 느꼈나 보다. 그리고 민수는 준수의 생각을 확실히 알고 싶어졌다.
“그래? 그럼 우선 작가님을 호출해 보지.”
준수에게 연락하는 민수의 모습을 보면서 태준은 민수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민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민수의 연락을 받고 헐레벌떡 달려온 준수는 방안에 배우들을 보고 순간 멈칫하고 당황한 눈빛으로 민수를 바라보았다.
“자. 작가님 오셨네. 어서 들어와, 준수.”
준수는 민수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끌려왔고, 당황한 그 모습으로 질질 끌려 방으로 들어오는 준수의 모습에 일행은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방안에서 수줍은 표정을 짓던 준수는 시나리오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거침없이 대답하기 시작했다.
“맞아요. 글을 쓰는데 가장 이미지화하기 쉬운 게 윤 엔터 배우님들이더라고요. 그래서 이분들이 영화를 찍는다면 스토리가 좋을까 생각하다 보니 캐릭터가 그렇게 나왔어요.
윤 대표님, 그리고 민 여사님 그리고 젊은 배우님들 4명, 그리고 악역으로 가상의 배우님을 한 분 넣었고요.”
준수의 말을 들으니 왜 등장인물의 수가 자신들과 맞게 되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예 그렇게 맞추고 시작했으니 당연히 맞을 수밖에.
태준은 이 시나리오에 강철과 준성, 그리고 윤숙이 출연하는 것을 생각해 봤다.
민 여사의 자리에 윤숙이 들어가고, 악역으로 준성이 들어간다면 딱 맞아 들어갔다.
그리고 민수의 역할이 자신이나 강철의 역할에 전혀 죽지 않았다. 아마 민수가 하기에 따라 가장 주목받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전혀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거. 흑영의 “진” 배역은 왜 이런 거예요? 이거 정 배우를 생각하고 만든 배역 아닌가요? 이거 액션 장면이 너무….”
태준의 물음에 준수는 멋쩍게 웃음을 지으면서 조금 난처해했다.
“하하하. 좀 심하죠?
사실 진을 좀 멋있게 쓰고 싶었어요. 좀 더 멋있게, 좀 더 임팩트 있게,
그렇게 생각하고 쓰다 보니 이상하게 “진”이 점점 초인이 되어 가더라고요.
애착은 많이 가지만 그래서 너무 힘이 들어갔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그래도 액션은 와이어도 있고, 연출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요?”
태준은 준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준수가 힘을 잔뜩 주고 써준 덕분에 만약 민수가 “진”을 소화할 수만 있다면 정말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을 마친 태준은 민수를 바라보면서 씩하고 웃었다. 그리고 손을 어깨에 착하고 올리더니 민수에게 약 올리듯이 말을 꺼내었다.
“이거이거, 정 배우 이거 찍으면 정 배우 죽어나겠어. 이 정도 액션을 소화해 낼 수나 있겠어? 찍다가 병원에 실려 가는 거 아니야?”
태준의 말에 민수도 그 생각에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진”은 잘만 연기한다면 참 멋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의미로는 진정한 주인공이라고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유일한 문제는 액션 장면이 너무 많다는 건데….
민수는 자신에게 장난스럽게 말하는 태준을 보면서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자신 있게 태준에게 말하였다.
“이봐. 윤 배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자신 있는 게 액션이야. 내가 설아 씨의 지옥 18단계도 우스운 사람이거든. 나중에 한번 보자고. 내가 어떻게 하는지.”
민수의 말에 설아가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고 했지만, 꾹 참고 입을 다물었고 한창 설아의 지옥훈련을 받는 수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민수를 바라보았다.
약간의 과장이긴 했지만 민수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전생에서도 스턴트만 10년 동안 해왔고, 그래서 액션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신체 능력이 극대화된 지금은 어떠할까.
아마 해보지 않았지만, 전생에 전성기 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대단한 액션을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자신 있는 민수의 태도에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수까지 자신 있다면 이 시나리오보다 적당한 것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태준의 모습에 정확한 영문을 모르는 준수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