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96화 (96/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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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표의 설명이 계속될수록 박 실장의 표정은 점점 묘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윤 대표가 설명을 마치자 박 실장은 계획의 가능성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희가 만드는 영화를 제작해 줄만 한 영화사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만드시겠다는 영화 하나만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지만, 저희가 계속 영화 제작에 투자한다면 모를까 영화사 입장에서는 한 해에도 몇 편의 영화에 투자하는 진룡과 MJ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텐데요.”

“그건 알아봐야 하겠지만, 내가 생각해 놓은 곳은 있어. 진룡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곳이”

“투자부터, 영화사, 배급에 배우까지 다 신경 써야 하겠군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마땅한 돌파구가 없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럼 제가 무슨 일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좋아. 박 실장이 해줄 일은 시나리오를 알아보는 거야. 지금 영화사들 사이에서 떠도는 시나리오를 은밀히 모아 줬으면 좋겠어.

적어도 제작 과정에서는 태클을 받고 싶지 않으니 꼭 비밀스럽게 모아줘.

쉽지는 않겠지만 진룡쪽의 귀에 들어가지 않아야 해.”

“네, 대표님.”

박 실장이 지시를 받고 대표실을 나서자 윤 대표가 설명하고 있는 동안 아무 말 하지 않던 민 여사가 살며시 윤 대표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재미있는 생각을 하셨네요. 번거롭긴 하겠지만 영화가 성공한다면 일이 재미있게 흘러가겠어요.”

“그래. 이번 영화가 무조건 대성공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행 과제가 있지. 시나리오도 그중 하나인데 사실 이것이 가장 걱정이야.

과연 우리 아이들이 돋보일 시나리오가 있어야 할 텐데….”

“투자는 제가 할 수 있게 해주시는 거죠? 전에도 말했지만, 저 이번에 무조건 손해를 벌충해야 한다고요.”

민 여사의 말에 윤 대표의 입가가 조금 올라가면서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이거, 정신 바짝 차려야겠군. 얼마가 들지도 모르는 영화야. 실패하면 그 손실이 어마어마할 거고. 그런데도 정말 투자할 생각이야?”

“제가 말했잖아요. 이번에 손해 벌충한다고. 그러니 분발해 주세요.”

“좋아, 한번 분발해 보지. 길바닥에 나앉지 않으려면 분발할 수밖에.”

“그럼 저도 자금상황부 터 파악해 봐야겠네요. 집에서 봐요.”

민 여사가 대표실을 떠나고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 대표는 다시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하고 있었다.

“우선 알아볼 것이 배우와 제작사인가. 역시 문제는 그 형님이겠군. 이 형님만 설득할 수 있으면 상영관까지 어느 정도는 확보할 수 있을 텐데…. 시간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아. 서둘러 움직여야겠군.”

윤 대표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같은 소속사의 배우인 조진성의 집이었다.

진성은 윤 대표가 연락도 없이 자신을 찾아오자 반갑긴 하면서도 이놈이 왜 안 하던 짓을 하나 싶어 미심쩍은 눈으로 윤 대표를 바라보았다.

“네 녀석이 웬일이냐? 연락도 없이.”

“하하하. 새해도 밝았고 문안 인사라도 드리려고 왔죠.”

“원… 안 하던 짓을…. 좋아, 어쨌든 왔으니 우선 앉아라. 마실 거라도 한 잔 내어주랴?”

“아니요. 괜찮습니다.”

넉살 좋게 웃던 윤 대표는 진성에게 이런저런 일상적인 이야기 들을 꺼내었다. 그리고 지금 촬영 막바지에 이른 “어두운 도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을 그렇게 대화를 하면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 진성은 윤 대표를 바라보면서 직접 묻기 시작했다.

“네놈이 이렇게 인사나 하자고 날 찾아 왔을 리는 없는데, 무슨 일이냐? 혹시 무슨 사고라도 친 건 아니겠지?”

정곡을 찌르는 진성의 말에 윤 대표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멋쩍게 웃으면서 지금 상황에 대하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윤 대표가 설명하는 동안 인상을 쓰면서 경청한 진성은 윤 대표의 설명이 끝나자 깊게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결국 사고를 치긴 쳤구나. 시대가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제작사 쪽이랑 갈등을 빚으면 손해는 배우만 보는 거야. 그걸 잘 아는 녀석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형님. 하지만 상대가 너무….”

“하… 그래. 그러니까 결론은 네 녀석이 계획하고 있는 영화에 출연해 달라는 거구나.

이 녀석, 내가 분명히 지금 작품이 내 마지막 출연작이 될 거라고 말했었건만….”

진성은 한동안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자신을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는 윤 대표의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쨌거나 자신이 몸담은 곳이 별로 좋지 못한 상황에 부닥쳐있고, 대표라는 동생 놈이 도움을 청해 온 상황, 자신은 이 바닥을 이제 떠나겠지만 마지막 추억을 새겨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지금 찍고 있는 영화를 은퇴 작으로 하기에는 뭔가 조금 아쉬웠다. 만약 윤 대표의 계획대로 된다면, 자신의 은퇴 작에 어울리는 그런 영화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바로 승낙하면 재미가 없는 법, 진성은 윤 대표에게 조건을 하나 내걸었다.

“어쩐다….. 그래, 좋아. 우선 한번 보자.

그리고 그 정민수라는 하는 아이는 촬영장으로 보내봐.

태준이 녀석이 그러더구나, 이번에 네놈이 그래도 괜찮은 녀석을 하나 건졌다고.

내가 한번 보고 그 녀석이 싹수가 있어 보이면 나도 참가하도록 하마.

내 은퇴를 미루는 일인데, 내가 그 정도는 해도 되겠지?”

윤 대표는 진성이 말은 저렇게 해도 아마 마음속으로 출연을 결심하고 있을 거란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서로 하루 이틀 본 사이가 아니니만큼 정말 고민된다면 시간을 달라고 하지 저렇게 대뜸 민수부터 보자고 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퇴까지 미루자는 억지에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윤 대표는 진성이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자 얼굴에 웃음꽃이 피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님. 그럼 촬영 시작되면 바로 보내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그날 매니저도 하나 딸려 보내라.

김 군의 어머님이 아주 편찮으시단다. 당분간 쉬게 해줘. 그럼 용건 마쳤으면 빨리 가봐.

네놈 말을 들어보니 할 일이 태산이겠구나.”

윤 대표는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고는 진성의 집을 나섰다.

이제 한고비를 넘겼다. 진성의 합류는 단순히 배우 한 명이 합류한 것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이제 다음 사람을 찾아갈 차례였다.

다음 윤 대표가 찾아간 배우는 원로배우 정윤숙이었다. 윤숙은 한 가지 조건을 내 걸긴 했지만 흔쾌히 출연을 결정하였다.

“그래, 윤 대표가 부탁하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지금까지 별로 해준 것도 없으니까. 나도 좀 무료하긴 했어. 하지만 내 부탁 꼭 잊으면 안 돼. 알았지?”

정윤숙의 부탁은 간단하다면 간단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국 영화판은 남자 배우들이 좌지우지하는 상황이었고, 여자 배우는 주연이라고 할지라도 보조적인 역할을 맡을 뿐이었다.

그래서 윤숙 역시 완전히 자신의 영화라고 할만한 작품이 없었고, 그것이 긴 연기 인생에 한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완전히 영화계를 떠나기 전에 그런 작품을 하나 남기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염원이었다.

정윤숙의 부탁은 훗날 자신이 영화의 중심이 되는 배역을 맡았을 때 다른 배역에 캐스팅이 난항에 부딪힌다면 윤 엔터의 배우를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부탁에 윤 대표는 바로 그렇게 하겠다고 승낙했다.

윤숙과 오랜 시간 함께했던 윤 대표는 그녀의 염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런 기회가 온다면 별다른 부탁이 없었어도 최선을 다하여 윤숙을 도왔을 것이다.

두 명의 원로 배우를 만난 윤 대표는 한숨을 쉬면서 오늘 만날 마지막 인물을 떠올렸다.

“이놈이 조금 까다롭긴 한데…. “

마지막으로 만날 인물은 바로 강환이었다. 연극판에서만 노는 강환에게 영화 출연을 제안해야 하는 상황. 물론 강환은 윤 대표의 부탁을 들어주겠지만. 윤 대표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윤 대표는 강환의 극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한숨을 쉬었다.

오랜만에 찾은 강환의 극단 “천지”는 연말과 연초를 맞이하여 한참 극을 상영하고 있었다.

윤 대표는 객석에 앉아 강환이 연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했다.

연극이 끝나고, 극단 식구들과 뒤풀이를 하는 곳으로 윤 대표가 찾아갔다. 항상 강환이 찾는 이곳은 윤 대표에게도 여러 가지 추억이 깃든 곳이었다. 그리고 후배들과 술잔을 나누는 강환의 곁으로 말없이 다가가 강환에 옆에 자리를 잡았다.

강환은 생각지도 못한 윤 대표의 방문에 당황하면서도 반가운 마음이 들어 환하게 웃으며 윤 대표를 반겨 주었다.

“뭐야, 형님이 웬일이야? 말도 없이 찾아오다니.”

“뭐긴 인마. 연기 잘 봤어. 여전하던데.”

“킥, 나야 언제나 여전하지. 내가 강환인데.”

한동안 그렇게 윤 대표와 강환은 술잔을 서로 나누었다. 그렇게 뒤풀이가 끝나고 극단의 식구들이 다 떠나자 강환은 넌지시 윤 대표에게 오늘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형님이 이유 없이 이곳까지 올 리는 없고. 또 무슨 일이야? 이 대배우 강환님의 힘이 필요한 곳이.”

너스레를 떠는 강환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 윤 대표는 웃으면서 강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대배우 강환님의 힘이 필요하긴 하다. 그보다 지금 “천지”의 상황은 어때? 잘 굴러가나?”

윤 대표의 말에 강환은 잠깐 인상을 쓰고 윤 대표의 말을 끊었다.

“아, 잠깐. 우선 정정부터. 극단이름 바꿨어, “뿌리”로.

“천지일보” 개자식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니까 밥맛이 떨어져서, 갑자기 극단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 뜻도 좋고 어감도 좋았는데 말이야. 에잉.

그러니 앞으로는 “뿌리” 라고 불러줘.

그리고 극단이야 뭐, 원래 그렇지. 특별한 거 있나. 항상 그렇지.

어 뭐야? 설마 지금….

그럼 우리 극단의 투자자로서 극단 상황을 살펴보러 오신 건가?

설마 소속사에 무슨 어려운 일이 생겼어? 혹시 우리 극단 문 닫아야 해?”

극단적인 강환의 반응에 윤 대표는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살짝 한숨을 쉬면서 안심한 강환은 윤 대표의 방문 목적인 무엇인지 캐묻기 시작했다.

“그럼 대체 뭐야? 이곳까지 왜 온 거야? 빨리 속 시원히 설명을 해봐.”

강환이 조바심을 보이자 윤 대표는 조금 진지한 얼굴로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강환은 대충 윤 대표의 의중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 나랑 극단의 배우들을 써볼 생각이군, 형님은.

흠…. 하긴 나쁜 선택은 아니네.

어차피 이놈들은 대부분 연극판에 뼈를 묻으려는 놈들이니까. 차라리 영화판이나 방송가로 가려는 놈은 함부로 못 보내겠네. 괜히 이상하게 싸잡아서 찍힐 수도 있으니, 그건 조심해야겠어.

OK. 알았어. 우리 투자자님이 해달라면 또 무조건 해야지.

이게 다 투자자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인데, 그럼 그럼. 혹시 투자자님이 잘못되면 우리 이제 연극도 못 하는 거잖아.

그렇게 알고 있을게. 금방 윤곽 나올 거잖아. 몇 명이나 필요할지 그때 말해줘. 그리고 난 좀 대사가 적은 역할로 부탁해.”

강환의 말대로 윤 대표의 지원이 없으면 극단 “뿌리”는 운영이 어려워질 것이고 그러면 사정 어려운 연극배우들에게 지원해줄 여력도 없어 질 것이다.

친분이나 이런 것을 떠나 강환에게는 윤 대표와 윤 엔터의 건재함이 가장 중요했다.

아직 한국 연극계는 연극만으로 생계를 꾸려가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 내가 미안하다. 너까지 동원해야 해서. 하지만 이번 일만 잘 풀리면 아마 너도 숨통이 더 트일 거야. 어쩌면 돈이 많이 될 수도 있거든. 하여간 이번만 부탁할게.”

윤 대표의 말에 강환에 얼굴에 미소가 맺힌다. 강환은 이래서 윤 대표를 좋아한다. 자신이 분명 무조건 도와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지만. 윤 대표는 그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자신이 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받는 것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자신이 잘해 줘야 한다. 자신이 연기를 가르친 제자들의 미래와 그리고 극단 식구들의 밥그릇까지 걸려 있는 일이 아닌가.

“돈 좋지.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우리 애들하고 제대로 된 거 좀 한번 만들어 보게.”

강환이 말하면 술잔을 들자, 윤 대표도 술잔을 마주쳤다.

그리고 술잔을 한 번에 기울인 강환은 피식 웃으면서 윤 대표를 쳐다보았다.

“하긴, 우리 강철 형님이 들어가서 성공 못 한 영화가 없지.”

강환은 다른 것은 몰라도 영화에 대해서는 윤 대표를 완전히 신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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