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92화 (92/325)

#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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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조금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차로 다가가던 민수는 차 앞에 서 있는 형우와 설아를 발견했다.

검은색 H 스커트에 두꺼운 스타킹, 흰색 블라우스에 회색 코트, 그리고 목도리로 무장한 설아의 모습에 민수는 순간 잠시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정신이 들자 설아에게 지금, 이 상황에 관하여 묻게 되었다.

“아니, 설아 씨가 어떻게….”

조금 당황한 민수의 모습에 설아는 밝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헤~ 먼 길 가신다면서요. 형우 씨랑 두 분만 가면 그 시간 동안 칙칙하기만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제가 여러분을 밝은 곳으로 인도하겠어요.”

그리고 설아가 말하는 동안 자신의 눈을 슬쩍 피하는 형우를 보니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저놈이군…. 저번에 안면을 트더니 어느 세 설아 씨랑도 연락하고 지내는 중이었군. 참 대단하다면 대단한 놈이야.’

자신을 기다린 설아에게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 않았고, 사실 혼자 가는 것이 조금 두렵기도 했던 민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 설아의 동행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차 안의 분위기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설아는 너무 무거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살짝 인상을 쓰며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다.

설아는 시상식에 관한 기사들을 읽으면서 민수를 조금씩 놀리기 시작했다.

시상식이 마치고 이틀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그에 관한 기사들이 많았고 사람들은 그에 관하여 여러 가지 댓글을 올리고 있었다.

아마 내일 백호 가요제가 열리기 전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리라.

“어머… 정민수 역시 상남자. 진정한 상남자다운 수상소감이었다. 정민수 패기! 민수 오빠 수상소감이 제법 인상적이었나 봐요.”

“상남자라…. 그런 게 아니었는데요. 그거참…”

정말 머릿속이 비어 버린 것처럼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아 짧게 말하고 내려온 수상 소감이 그런 식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에서 민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오. 여기 재미있는 댓글이 있네요. 윤태준이 정민수 어깨에 팔 두르는 데 이거 나만 설레? 둘이 옷 입은 게 커플룩 아니냐? 커플이면 누가 공이야? 이건 여초 사이트에서 올라온 글이네요.”

“끙….”

민수는 소속사 여성들 사이에서는 정신적 고자로, 일부 여초 사이트에서는 동성애자로 생각되고 있는 자신의 현실에 탄식 가득한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설아 씨가 말했던 정신적 고자설 보다는 타격이 크지 않네요.”

“뿌~ 그건 사실이니까 전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네요.”

사뭇 당당한 설아의 모습에 민수는 할 말을 잃고 창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설아와 민수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자 분위기가 조금 밝아지긴 했다. 하지만 민수의 표정은 여전히 조금 어두웠다.

그러는 사이 차는 속초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민수는 처음으로 자신의 부모님이 잠들고 있는 봉안당을 방문하게 되었다.

우선 민수가 가장 먼저 부모님을 뵙고 형우와 설아는 잠시 민수를 기다리기로 했다.

민수는 천천히 부모님의 이름이 적힌 곳 앞에 섰다.

국가에서 화재 사고 피해자를 위하여 만들어준 자리는 좁고 초라했다.

그리고 민수는 이런 곳에 오랫동안 부모님을 방치해 왔던 자신이 한심스럽기만 했다.

잠깐 그렇게 그곳을 바라보던 민수는 어느 세 자신의 눈가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생에서는 죽을 때까지 울어본 기억이 없었다. 아니 한 번 있었던가.

극단이 망하고 이제는 연기할 곳을 잃었을 때 자신의 재능 없음을 한탄하면서 울었던 거 같다. 하지만 전생에서는 이곳을 결국 한 번도 찾지 않았었지.

여러 가지 상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조금 울고 나자 마음이 편해졌다. 조윤희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다.

가능하면 빨리 가보라고 하셨었지.

사람들은 어떤 아픔을 극복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 아픔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일이라고 했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은 그냥 계속 피하기만 한 것이다.

이제는 조금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다.

그렇게 민수가 서 있는 곳으로 설아가 다가왔다. 설아가 자신의 옆으로 서자 민수는 설아를 바라보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초라하죠? 그런데 사실 이것도 운이 좋은 거였어요. 한데 뭉쳐서 사망하신 분들은 이렇게 따로 자리를 받지도 못하셨거든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두 사람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저희 아버지가…. 죽는 순간까지 어머니를 꽉 끌어안고 계셨다고 해요.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어머니를 보호하고 싶으셨나 봐요. 뭐 결국은 거의 동시에 돌아가셨겠지만….”

“슬프지만…. 조금 낭만적이시네요.”

“항상 말씀하셨죠. 우리 부부는 가능하면 한날한시에 떠나고 싶다고. 물론 이런 식으로 가려고 하신 건 아니었을 텐데.”

“적어도 같이 가셨으니, 하늘에서도 외롭지는 않으실 거에요.”

“그건 그렇네요. 고아 출신이신 두 분이라 어렸을 때는 항상 외로웠다고 하셨어요. 그러다 이제 서로 결혼을 하고 가족이 생겨서 이제는 외롭지 않고 행복하다고 하셨으니…”

그렇게 민수는 설아에게 생각나는 데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꺼냈다.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자 민수는 자신의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민수 오빠. 초라한 것을 떠나서 여기는 너무 먼 것 같아요. 그러니 서울 근방으로 옮기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면 좀 더 자주 찾아뵐 수 있잖아요.”

설아의 말에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그리 넉넉하진 않지만, 드라마 출연료와 광고 출연료로 부모님 봉안당을 옮길 여력은 충분히 있었으니까.

그렇게 봉안당 이전을 결심하고 일행은 차에 몸을 싣고 서울로 출발했다.

돌아가는 길은 오는 길 보다는 확실히 밝은 분위기였다.

“그러니까 민수 오빠가 정신적 고자가 아니라고요?”

“그렇다니까요. 그 왜 그런 게 있어요.

사실 군인들이 하사 진급 전까지 3년은 외부하고 연락도 제한되고 이동도 제한되거든요.

그래서 그 기간은 많이들 답답해해요. 그런데 규정 위반이긴 하지만 외부에서 잡지 같은 거 반입하는 것은 그냥 다들 넘어가거든요.

역시 남자들만 득실득실하는 곳이니만큼 관심사는 역시 여자 아니겠습니까?

그 잡지에 보면 이제 예쁜 여자들 사진이 쫙 있는데… 우리 정 배우님도 딱! 그중에 마음에 들어 하는 사진이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오호… 그래요?”

하도 오래되어 기억도 안 나는 일을 형우가 신나서 이야기하니 민수는 참 뭐라고 반박하기 힘들었다. 형우에게는 대충 2~3년 전의 이야기였지만 자신에게는 30년도 넘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야야.”

민수가 제지하려고 했지만 터진 형우의 입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그 사진이 참 요염했죠. 민수 형은 그 사진 말고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역시 요염하고 관능적인 쪽으로 눈이 가셨다는 거네요.”

민수는 어쩌다가 저런 쪽으로 이야기가 나왔나 싶어 한숨만 쉬고 있었다.

“게다가 요전에 설아 씨가 찍은 뮤비들도 있지 않습니까? 고등학생, 회사원, 대학생, 간호사, 바텐더까지.

역시 그중에서도 K-G랑 찍은 바텐더에 가장 집중했었다니까요.”

“취향이 참 일관적이시네요. 우리 민수 오빠는. 그거 사실 저도 조금은 부담스러운 옷이었거든요. 너무 짧은 데다가 붙기까지 해서”

자신이 그 영상에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맞지만 형우가 그걸 어떻게 알았나 싶었다.

왠지 그냥 넘겨짚은 거 같은데 결국 명확한 사실이라 민수는 부인하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설아의 날카로운 눈빛을 피하기만 했다.

“정신적 고자는 아니었네요. 민수 오빠. 그 말은 취소할게요.”

상큼하게 웃고 있는 설아에게 민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흠…. 섹시라…..”

그리고 설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잠시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이따가 나 좀 보자. 형우야.”

자신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기만 하는 형우를 보면서 민수는 하필 어제 휴가를 떠난 동원이 그리워졌다.

그리고 저놈이랑 같이 가게 만든 하늘을 원망하고 있었다.

윤 엔터의 대표실.

윤 대표는 앞으로 배우들의 계획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태준이랑 수연이는 확실히 영화를 찍고 싶어 했지.”

“별당신” 조차 영화랑 고민하다가 찍었던 태준과 드라마 판에서만 놀던 수연은 둘 다 영화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민수조차 그렇게 말했었고.”

시상식을 마치고 돌아온 배우들하고 이야기했을 때 다들 영화를 원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한 윤 대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영화를 찍는다고 할 때 문제는 진룡 미디어와 국내에서 가장 강한 커넥션을 가진 MJ 였다.

지금 중국 내에서는 한창 상영관을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고 MJ는 진룡의 지원에 힘입어 중국 내 상영관을 건설하는 중이었다. 그런 만큼 현재 진룡과 MJ의 결속은 매우 강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MJ는 현재 한국 내 스크린의 30%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고, 만약 MJ 쪽에서 윤 엔터의 배우들을 거부한다면 일이 조금 어렵게 돌아갈 것이다.

윤 대표가 알아보니 역시 윤 엔터의 배우들은 진룡 미디어 내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다.

윤 대표 본인도 그쪽과는 별로 상종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영화를 찍으려면 어느 정도는 상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만약 태준이 영화를 찍는다면 MJ도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MJ를 제외한 다른 배급사에서는 태준의 영화를 올릴 테니까 거부하게 되면 결국 자신들만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니 말이다.

“역시 가장 문제는 직접 진룡이랑 얽혀있는 수연이랑 아직 위치가 확고하지 않은 민수란 건가…. 하긴 아직 완전 신인인 설아랑 소희도 문제이긴 하겠군.”

윤 대표가 한참 고민을 하고 있는데 민 여사가 대표실로 들어섰다.

“연말에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하고 계세요?”

윤 대표는 민 여사가 자신의 옆에 자리를 잡자 슬며시 웃으면서 반겨 주었다.

“아, 민 여사. 아이들 다음 스케줄 때문에 생각 좀 하고 있었어. 이 녀석들이 다 영화를 찍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그래요?”

민 여사는 윤 대표가 내미는 내년에 제작 계획 중인 영화를 살펴보았다.

그렇게 표를 다 읽은 민 여사는 고개를 돌려 윤 대표를 쳐다보았다.

“이거 좀 힘들겠네요. 규모가 있는 영화들은 MJ나 진룡의 자본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네요.”

“여러 가지 조금 힘든 상황이긴 해. 올해가 조금 공교로운 거지.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

내랑 태준이가 중국에 가서 분탕질을 좀 한 것도 나비효과로 좀 돌아오긴 했고 말이야.”

중국에 수입되는 영화는 분장제 (흥행 수익을 분배받는 구조)와 매단제 (흥행과는 상관없이 일정한 금액을 받는 구조)로 나누어져 있는데 분장제 영화는 한 해 40편으로 수입이 제한되어있었다.

할리우드 영화를 주로 취급하던 삼화는 분장제 영화를 수입할 권리 30편을 가지고 있었고 대신 한국 영화를 매단제로 수입하는 사업을 진룡이 가지고 있었다.

태준의 활약으로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 관심을 두게 된 삼화는 광전총국을 사이에 낀 협의를 통하여 한국 영화를 수입할 권리를 얻게 되었다.

대신 진룡측에는 자신들이 거의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분장제 영화를 수입할 권리 10편을 넘겨주게 되었다.

삼화 측의 생각은 간단했다. 분장제의 권리를 써서 수입할 만한 영화는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급 영화뿐인데, 자신들이 할리우드 대형 영화사와의 컨넥션이 확고하기 때문에 진룡이 그 권리를 가진다고 해도 별다른 이익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결국 자신들이 할리우드의 6대 제작사만 잡고 있으면 진룡 보다 자신들이 가지게 될 이익이 더 크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진룡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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