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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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민수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정신과였다.
태준과 대화하면서 느끼게 되었지만, 자신은 예전과 너무 달랐다. 그래서 민수는 변한 자신의 모습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가장 급하다고 생각한 민수는 바로 병원을 향하여 출발했다.
거의 9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찾은 병원, 상담실에 들어서자 상담의 선생님은 반갑게 웃으면서 민수를 반겨 주었다.
선생님은 민수에게 신인상 수상을 축하해 주면서 드라마 출연 당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져 마음속으로 많이 걱정했다고 말씀하셨다.
본격적인 상담이 시작되고 민수는 지난 9개월의 시간 동안 자신이 해왔던 일들을 차분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의 사건마다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했고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빠짐없이 설명했다. 또한 마지막으로 자신이 가진 의문이 무엇인지도 이야기했다.
민수의 이야기가 다 끝나자 선생님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민수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민수 씨는 자신에 대하여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너무 단정적으로 생각하고 계시군요.”
“그거야…..”
민수는 전생에 30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살아오면서 형성된 성격과 성향이 있었다.
그리고 민수는 사실 30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민수는 자신이 살아온 30년 동안 해왔던 행동들이 자신을 정확하게 정의한다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그럼 우리 같이 한번 생각해 볼까요?
민수 씨가 설아 씨랑 같이 운동을 시작한 일, 그리고 혜민이를 위하여 전 재산을 치료비로 기부한 일, 그리고 힐링 멘토에서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상담한 일은 민수 씨가 의식적으로 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네, 가능하면 사람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늘리고,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낄 만한 일을 하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리고 배우들의 사소한 기 싸움에 무감각한 일과 옷을 양보하고도 속상하지 않은 것, 루머로 흔들리지 않았던 것을 자신 다운 일이라고 하셨고요.”
“그렇죠. 전 원래 타인의 악의나 오해 같은 것은 조금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리고 문제는 설아 씨나 수연 씨를 도운 것, 혜민이를 볼 때마다 가슴이 따듯해지는 것, 그리고 이번에 기자회견 할 때 기자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 것이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이죠?”
“네,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죠. 무의식중에 다른 사람을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다니… 게다가 기자회견에서 전 정말 엄청나게 화가 났었어요. 스스로 참을 수 없을 만큼요.”
“그렇군요. 민수 씨 그럼 지금 민수 씨는 주위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들과 어떻게 지내고 싶으신가요?”
“다들 좋은 사람들이죠. 그래서 다 잘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가능하면 친하게 지내고 싶죠.”
선생님의 이야기에 민수는 윤 엔터 식구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가에는 미소가 살짝 스며들었다. 그 모습을 본 선생님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요? 여기서 벌써 모순이 있는 것 같은데요? 민수 씨는 타인에게는 조금 무감각한 사람이라고 했었죠. 하지만 지금 민수 씨는 그들의 행복을 바라고 있군요.
좋아요. 그럼 민수 씨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은 무엇인가요? 민수 씨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어떤 삶이죠?”
“제가 원하는 연기를 계속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제 주변의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지내는 그런 삶….”
“거기서도 알 수 있군요. 민수 씨의 생각 속에는 자신만이 아니라 이미 주변 사람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민수 씨. 민수 씨는 스스로 타인에게 무감각하다고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군요.
혹시 스스로에 대하여 무슨 고정관념을 가진 게 아닌가요? 난 분명 이런 사람이다. 라고 생각한 것은 때로는 틀릴 수도 있고, 혹은 변하기도 합니다.
민수가 잠시 말이 없자 선생님은 웃으면서 민수를 바라보았다.
“민수 씨, 사람은 원래 변하는 존재입니다. 아주 작은 계기로도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었는데…. 그 짧은 시간에 제가 그렇게까지 변했다고요?”
“하하하. 잘 생각해 보세요. 그것보다 더 극적으로 변한 분이 민수 씨 주변에 계시잖아요.”
“그게…무슨”
“조윤희 선생님. 그분은 민수 씨의 행동 하나로 완전히 다른 분이 되었죠.”
“아…..”
“지금까지 민수 씨가 변하지 않은 건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떤 한 가지에 너무 몰입해 계셨기 때문입니다. 조윤희 선생님이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처럼요.”
“그럼 제가 지금 연기 한 가지만을 몰입하고 있지는 않다는 거군요.”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어떤가요? 지금 민수 씨의 머릿속에 연기에 대한 생각밖에 없나요?”
“그건….”
선생님의 질문을 들은 민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지금 자신은 연기만을 생각하고 살던 전생이 자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윤 엔터 식구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들의 행복을 바라고 있었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자신은 항상 예전과 같이 홀로 살아가는 삶을 두려워했었다. 타인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데 왜 홀로 사는 삶이 두렵겠는가.
목표가 변하고 생각이 변하면 당연히 행동도 변하는 것이다.
결국 지금의 자신은 전생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생각이 변해 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무감각한 민수에서 이제 지인들에게는 관심이 많은 민수로 말이다.
그런데 자신을 계속 전생의 민수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니 자신의 행동에서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혹시나 하던 것이 사실로 다가오자 민수는 이제 그 변화에 대하여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솔직히 제가 느낀 것을 이야기하자면 민수 씨는 확실히 변했습니다. 저번에 상담할 때랑은 전혀 느낌이 달라요. 특히 도피성 몰입 증후군에 대한 증상들도 거의 사라졌어요.
지금 민수 씨가 생소하게 느끼는 그런 감정 기복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느끼는 것입니다.
다만 민수 씨의 한 가지에만 몰입하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죠.
이제 민수 씨도 서서히 여러 가지 감정들을 느끼게 될 겁니다. 이번에 느낀 그 분노는 그 시작에 불가합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그런 생소한 감정이 느껴지더라도 놀라지 마시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세요.”
“하지만…. 전 조금 걱정돼요. 제가 혹시 제 주변 사람들하고의 관계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요. 그래서 제가 그 사람들의 삶에 끼어드는 것이 조금 두려울 때가 있어요.”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사람들과의 관계에 집착한 다라….
아마 민수 씨가 걱정할 만한 것은 도피성 몰입 증후군에 새로운 몰입 대상이 생기는 것이겠죠?
하지만 타인과의 관계는 그런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선 타인과 인간관계를 가지는 것은 도피가 아니지 않습니까?
민수 씨가 처음에 군대로 간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왜 군대를 선택했는지.
그리고 사람은 원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하고 그 정도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요.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또한 그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있는 힘껏 그들을 돕죠.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인간관계에 대하여서는 집착과 몰입이 나타날 수 없다는 말과 남들도 다 같이 그렇게 산다는 이야기에 민수는 조금 안심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는 생각을 하세요. 자신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민수 씨는 앞으로 더 변할 테니까요.
자, 그럼 이제 연기에 대하여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군요.
민수 씨는 이번에 입상하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연기를 인정받게 되었어요. 저도 그 장면을 티브이로 보았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으셨던 거 같은데 맞나요?”
“네. 사실은 좀 그랬어요. 저랑 같이 후보에 오른 배우가 같은 드라마에 출연한 주연 배우였으니까요. 공동수상이 가능하긴 하지만, 반드시 공동수상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만약 상을 받게 된다면 저보다는 당연히 주연배우가 받게 될 거로 생각했어요.”
“그럼 그때는 어떤 생각을 했나요? 아쉽거나 속상하거나 그러지 않았나요?”
“음…. 그냥 별생각 없었어요. 사실 저에게 상은 그저 받으면 좋고 못 받으면 할 수 없는 그냥 그런 것이었거든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럴 때 조금 억울해하거나 욕심을 내거나 때에 따라서는 상대 배우를 질투하곤 하죠. 하다못해 적어도 속이 쓰리거나 속상해하기 마련입니다.”
“음….”
“그럼 시상식 중에 조금 특별한 경험이나 느낌은 없었나요?”
선생님의 말에 민수는 문득 태준이 대상을 받던 순간이 생각났다. 거대한 빛을 등지고 태준이 트로피를 받고 웃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태준을 축하했다. 물론 민수 자신도 진심으로 태준을 축하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은 단순한 축하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미묘한 열기와 고양감.
그것은 질투나 질시 혹은 부러움과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민수가 그 당시의 자신이 느낀 것들을 설명하자 선생님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렇군요. 그런 것을 쉽게 투쟁심이나 경쟁심, 라이벌의식 정도로 정의 내릴 수 있겠군요.
태준 씨는 민수 씨에게 어떤 사람입니까?”
“음…. 정말 좋은 녀석이에요. 배울 점이 많고요. 인간적으로 끌리는 그런 녀석요.”
“예전에 민수 씨는 무언가를 한다는 거 자체에만 의미를 두고 있었습니다. 연기도 연기한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 외의 것들은 조금 등한시했죠. 원래 그런 것들이 과몰입의 증거입니다.
사실 민수 씨가 아깝게 입상을 하지 못하는 것조차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게 민수 씨의 본래 성격인지 아니면 과몰입의 결과인지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군요.
하지만 태준 씨가 상을 받는 장면을 보고 이기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연기한다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연기를 통해 승부욕이나 경쟁심이 생겼다는 것이니까요.
민수 씨가 연기에 대한 과몰입에서 상당히 벗어 난 것은 확실하군요.
인간관계를 중요시하기 시작했고, 주변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예전과는 다른 감정들을 느끼고, 연기를 최후의 목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으니까요.
경과는 매우 좋아졌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지낸다면 과몰입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거 같군요.”
선생님과 가졌던 몇 시간의 상담을 마치고 민수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차에 올랐다.
물론 선생님에게 설명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자신이 30년의 인생을 더 살아온 경험이 있다는 것, 그리고 어제 신인상을 부여잡고 밤새 울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그런 이야기는 할 수 없었지만 선생님과의 상담으로 자신이 궁금한 것들은 얼추 알게 되었다.
"결국 결론은 이거군.
도피성 몰입 증후군은 이제 거의 다 나았지만, 아직 전생의 기억과 행동양식이 남아 있어서 혼란 스러운 상황이란 거네."
사람은 사소한 일로도 크게 변할 수 있다. 그리고 난 변해 버렸다. 그럼 내가 변한 계기는 무엇일까.
민수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가 처음 생소한 감정을 느낀 순간이 언제인지. 혜민이를 처음 봤을 때 그 아이가 아파하고 있는 모습에서 그때까지 느껴왔던 감정과는 조금 다른 안타까움을 느꼈지. 그리고 그전에는….
민수는 그전에도 묘한 안타까움을 느낀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설아와 태준이 싸운 날, 그날 울고 있는 설아의 모습과 그 당시 겪고 있는 설아의 고통이 안타까워서 그리고 전생에서 보았던 세라의 슬픈 얼굴이 생각나 결국 설아를 도와주게 되었다.
그때 설아의 모습에서 전생에 자신이 기약 없는 노력을 했던 것이 생각나 묘한 동질감과 안타까움을 느꼈었다.
그리고 그날은 자신이 처음으로 평소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하게 된 날이었다.
바로 설아의 삶에 끼어들었으니까.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고? 대체 그게 뭐라고…. 그때부터 내가 변했다니….”
민수가 중얼거리자 운전을 하던 형우는 민수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고개를 여러 번 저은 민수는 형우에게 말했다.
“형우야. 내일은 속초 쪽으로 좀 가고 싶다. 부모님의 봉안당에 한 번 들려야겠어.”
민수의 말의 형우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