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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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상식 날이 다가왔다. 시상식에 참가하지 못하는 설아는 입을 삐쭉 내밀고는 민수와 수연에게 투정을 부려댔다.
“저도 내년에는 무조건! 어떻게든! 시상식에 가고 싶어요!”
평소에 얌전한 소희조차 시상식은 부러웠는지 민수와 수연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태준은 자신이 입을 옷을 확인해 보고는 민수에게 다가와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사실, 이거 거의 정 배우 때문에 들어온 거겠지? 유니에서 의상 지원해 준 거 말이야. 사실 예전에 그 드라마틱 블루였나? 리온이 입은 거 그거참 부러웠거든.
색 자체가 신비한 게 왠지 튀는 듯 점잖은 느낌이랄까? 딱 내 취향이라서 말이야.
조윤희 선생님께 꼭 감사하다고 전해줘.”
수연의 드레스도 우아하면서 귀여운 느낌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옷이었지만 민수와 태준의 옷도 만만치 않았다.
남자 배우들이 입는 옷이 턱시도 형태로 거의 고정된 형태라 파격적인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소재로 조금 독특한 느낌을 주고 있었는데 기본 바탕은 검은색으로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은은하게 색이 변하는 형태였다.
태준이 옷은 진한 갈색으로, 민수의 옷은 진한 회색으로 색이 변하는 것이 태준의 말대로 점잖으면서 조금 특별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러네, 나도 예상하지는 못한 일이라… 시상식 마치고 바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려야겠어.”
그렇게 설아의 투정과 소희의 선망 어린 눈빛을 뒤로하고 태준과 민수, 수연은 시상식에 참석할 준비를 위하여 샵으로 출발했다.
샵에서 적당히 꾸미고 시상식 의상으로 갈아입은 세 명의 배우는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시상식장을 향하여 출발했다. 그리고 차량이 멈추고 시상식장에 도착했다. 민수는 크게 한숨을 몰아쉬고 차 문을 열었다.
“정 배우님. 잘하고 오세요.”
동원의 격려에 민수는 웃으면서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바로 차문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시상식장 앞에 위치한 포토존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비슷한 의상을 입은 태준과 민수는 같이 포토존 앞에 서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민수가 천천히 다가가니 포토존 앞에서 태준이 웃으면서 민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포토존 앞에는 연말 시상식답게 많은 기자가 배우들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잠시 사진을 찍는 시간이 지나고 태준은 민수와 같이 시상식장 안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연예프로그램의 리포터 한 명이 태준에게 다가와 짧은 인터뷰를 요청했다. 태준의 대상 후보이니만큼 어느 정도 인터뷰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기 멋진 미남 두 분이 계십니다.
“별에서 온 당신”의 윤태준 씨, 그리고 “널 위한 노래”의 정민수 씨.
훈훈한 모습으로 두 분이 같이 계시니 눈이 정화되는 느낌이네요. 평소에 두 분은 친분이 깊으신가 봐요.”
“하하하. 그럼요. 제가 이 친구랑 아주 친하죠.”
태준이 대답을 하면서 민수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리자 리포터는 신나는 목소리로 질문을 계속했다.
“어머 어머. 그러고 보니 의상도 거의 맞춘 듯 비슷하네요. 마치 커플 의상처럼요.”
“커플 의상은 아니지만, 한곳에서 나온 의상은 맞죠. 혹시 이상한 오해는 하지 않으시겠죠?”
부드러운 태준의 대답 후에도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윤태준 씨는 지금 강력한 대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데요. 대상 자신 있으신가요?”
“대상… 좋죠. 자신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제가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한 대답 감사합니다. 윤태준 씨의 수상을 기원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윤태준 씨였습니다.”
살짝 옆에서 태준의 인터뷰를 지켜본 민수는 다시 태준과 식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민수와 같이 걷는 태준은 조금 인상을 쓰고 있었다.
“조금 무례한 리포터네. 너도 신인상 후보에 올라 있는데 질문하나 던지지 않는다니.”
태준의 말에 민수는 피식 웃으면서 태준의 어깨를 두드릴 뿐이었다. 그때 저쪽에서 조태식이 태준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여…. 태준이. 오랜만이네. 짜식, 벌써 대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고 말이야. 많이 컸어.”
“키는 제가 예전에도 더 컸죠.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여기는 정민수라고 윤 엔터에 신인 배우입니다.”
웃으면서 다가오는 태수를 너스레를 떨면서 맞이한 태준은 태수에게 민수를 소개하였다. 태준이 자신을 소개하자 민수는 웃으면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선배님. 정민수라고 합니다.”
태수는 민수의 인사에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굳게 잡았다.
“알지. 들었어. 강철 선배한테 연기를 배웠다지? 외모도 좋고, 연기는 더 좋으니 아마 금방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을 거야. 혹시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같이 연기나 한번 해보자고.”
민수에게 덕담을 남기고 태준과 잠시 대화한 태수는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민수는 그런 태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태준에게 물어봤다.
“조태수 선배랑도 안면이 있었군. 우리 윤 배우께서는 저 선배님을 어떻게 아는 거야?
같이 작품을 찍은 적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아, 저 선배가 지금 조진성 선생님이랑 영화 촬영 중이잖아.
거기 한번 찾아가서 안면을 텄지. 저 선배도 보기와는 다르게 붙임성 있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윤 엔터의 원로 배우인 조진성 선생님. 선생님이 영화 촬영을 한다는 이야기에 민수는 자신이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영화라면…. 혹시 어두운 도시?”
“오, 알아? 맞아. 거기에 지금 조 선배랑 조진성 선생님이랑 촬영 중이시거든.”
조진성, 조태수 주연의 한국형 르와르 어두운 도시. 크게 흥행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민수는 이 영화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조진성 선생님의 은퇴 작이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끝으로 조진성 선생님은 다시는 스크린에 복귀하지 않았다.
요즘 민수에게 너무 여러 가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다 보니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만약 여유가 있었으면 어떻게든 찾아가 봤을 것이다.
민수는 평소에도 조진성 선생님이 연기하는 모습을 꼭 한번은 직접 눈앞에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앞으로는 절대 볼 수 없을 테니까. 조금 조바심을 느낀 민수는 태준에게 촬영이 얼마큼 진행되었는지 알고 있냐고 물어보았다.
“글세… 촬영 끝나는 시기는 대충 다음 달 말쯤 되겠네. 연말이랑 연초에는 촬영하지 않는다고 했었거든.”
태준의 대답에 작게 한숨을 쉰 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식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민수는 기회를 봐서 꼭 한번 조진성 선생님을 뵈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식장에 들어선 민수는 태준과 헤어져 “송포유” 팀에게 배정된 자리로 이동했다.
자리에는 수연과 리온, 그리고 진주까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민수형. 늦어요!”
웃으면서 자신을 반기는 리온에게 태준이 인터뷰에 잡혀서 늦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하긴 윤태준 선배님은 그랬겠네요. 유력한 대상 후보 라던데요.”
“격세지감이네. 그 애송이 녀석이 대상이라니….”
어려서부터 태준을 보아왔던 수연은 조금 아련한 눈빛으로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민수는 그 모습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사실 연기를 같이 배운 수연이 태준을 애송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태준과 수연은 서로서로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나 보다. 태준도 수연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마다 저런 눈빛을 보이곤 했으니까 말이다.
한편 진주는 낯선 환경에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살펴보고 있었다.
진주는 앞으로 자신은 이곳에 올 일이 없으니 이 기회에 마음껏 구경하고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는 중 리온이 수연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선배도 우수상 정도는 기대할 수 있지 않나요? 연기 변신을 했다는 게 장점으로 어필됐을 텐데요.”
“글쎄… 별로 기대하진 않아.”
쿨한 척 기대하지 않는다고 한 수연이지만 민수는 수연이 지금 내심 살짝 기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별당신”의 여주인공 차미애 선배는 아마도 최우수상에 입상하게 될 테고, 태풍은 사실상 조태수 선배의 원맨 드라마였으니 수연 선배 같은 경우도 우수 연기상 정도는 기대해도 되리라.
지금 잠시 주춤해서 그렇지 이수연의 이름값이 그리 가볍지는 않았으니까.
“리온 선배님이랑 민수 선배님도 신인상에 수상하셨으면 좋겠어요.”
진주의 말에 리온과 민수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조금 기대하고 있어요. 초청된 드라마에 나온 연기자 중에 신인이 별로 없더라고요. 우리가 평균 시청률이 4위인가 그런데 우리 위쪽에 드라마 중에는 신인이 전혀 없어요. 아, 주연급이나 준주연급 중에서요. 조연 분들은 제법 있긴 하지만요.”
솔직한 리온의 말에 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도 솔직히 받았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시간이 되자 시상식이 시작했다.
역시 가장 첫 시상은 신인상이었다. 여자 신인상 수상이 마치고 바로 남자 신인상을 발표할 시간이 되었다.
담담하게 앉아 있던 민수는 갑자기 자신의 심장이 급하게 뛰는 것을 느끼며 살짝 당황하고 있었다.
“남자 신인 배우상…. 수상자는…. “널 위한 노래 Song For You의 방필수, 정민수”
리온이 이름이 불리고 바로 민수의 이름이 불렸다.
그리고 자신이 이름이 이어서 불리자 민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리온을 따라 멍하니 시상식 무대 위로 오른 민수는 리온이 수상을 하고 소감을 발표하는 동안에도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수상 소감을 발표하기 위해 마이크 앞에 섰을 때. 오 만 가지 생각이 민수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기를 수초. 민수는 마이크를 앞에 두고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더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단 두 마디를 남기고 민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로 돌아와 앉아 멍하니 트로피를 바라보고 있는 민수를 보면서 수연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폼 잡기는…..”
일년에 한번 10명 남짓의 배우들이 주작 방송연기 대상에서 상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상을 받는 배우들은 스스로 감정에 북받쳐 울음을 터트리고 했다.
특히 신인상과 대상은 더욱 그러했다. 같이 신인상을 받은 리온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는 건 그런 이유였다.
그러니 담담한 민수의 수상소감은 조금 이례적인 일이긴 했다.
민수가 트로피를 바라보면서 멍하니 있는 사이에 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작가상 감독상 촬영상 등, 여러 가지 분야에서 시상이 이어졌다.
그리고 민수에게 폼 잡는다고 말했던 수연은 우수상을 받고 펑펑 울면서 수상소감을 말하고 내려왔다.
그리고 대상.
조태수가 최우수 연기상을 받는 바람에 대상은 태준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환한 표정으로 대상을 거머쥔 태준을 보면서 민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시상식을 미치고 소속사로 돌아온 세 명의 배우는 식구들의 격한 환호를 받았다. 설아와 소희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고, 평소에 감정표현에는 조금 인색했던 윤 대표까지도 오늘만큼은 환한 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리고 환영 인사가 끝난 후 민수는 자신의 방에 올라와 트로피를 내려놓고 가만히 침대 위에 몸을 기대었다.
적막한 방안에 혼자 누워있는데 갑자기 민수의 눈가에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기쁨과 서러움, 울분…. 눈물을 흘리는 동안 여러 가지 감정이 민수의 가슴속에서 들끓었다.
그리고 전생의 기억들이 민수의 머릿속에서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그런 아픈 기억들이 눈물에 씻겨 차례대로 사그라들었다. 밤새도록 눈물을 흘린 민수는 새벽에 이르러서야 조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이 들고 다시 트로피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조윤희 선생님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부모님을 찾는 시간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더 찾아가기 힘들어질 거라는 그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민수는 이제는 부모님을 만나러 갈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먹은 이상 행동은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이렇게 민수가 처음 출연한 드라마는 민수에게 신인상을 안겨 주었다.
이제 민수의 연기자 인생은 다시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