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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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모인 거, 이야기나 조금 하죠.”
민수는 냉장고에서 빌런들이 잔뜩 사다 쟁여놓은 맥주들을 꺼내 각자 앞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설아와 수연 거기에 소희까지 태준이 없으니 그야말로 꽃밭이나 다름없었다.
갑자기 조금 무안한 기분이 들어서 민수는 진짜 어디서 남자배우라도 하나 데려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수연이 먼저 입을 뗐다.
“우선 다행이다. 진짜. 이건 루머 같은 거랑은 차원이 다르잖아. 근데 우리 회사에 CCTV가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어.”
“그러게요. 진짜 휴게실 위에도 CCTV가 있네요.”
민수는 그 점은 조금 해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차근차근 그녀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거, 저 때문에 설치한 거래요. 아마 이제 다시 떼 갈 겁니다. 민 여사님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예방 차원에서 설치하신 거라네요. 그리고 그게 절 살렸고요.”
“반응도 빨랐지. 솔직히 이렇게 빠르게 진행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 그래서 걱정한 거고.”
“저번에 루머사건이 예방 주사가 된 게 아닐까요? 사람은 학습하는 동물이잖아요.”
“오면서 오 팀장님께 들었는데, 박 실장님이 데려오신 직원들이 빠르게 움직여 줬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우리 소속사 직원들은 언론사랑 별로 안 친하잖아요. 기자 하나라도 더 모으려고 기를 쓰고 움직였답니다.”
“기자들이 실망한 기색이던데, 직원들한테 한소리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건 아닐걸. 그래도 마지막에 민수가 폭탄 하나 던져 주고 왔잖아.”
설아는 민수가 기자 회견을 하면서 한 말들과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하면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히히…. 민수 오빠 대놓고 지르고 오셨던데요.
그 여자는 눈이 잘못됐는지 내 얼굴도 못 알아보고 고소장을 던졌으니, 이제 너도 고소당해서 조사를 당해봐야지. 네가 무죄라면 너도 나처럼 금방 풀려날 거야. 이렇게 말씀하신 거잖아요.
남자들은 통쾌해하면서 민수 오빠 보고 민수 형이라네요.”
설아의 말에 민수는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한숨을 쉬었다.
“하….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리고 남자들이 이 정도 일로 저한테 형이라고 하진 않을 겁니다.
인터넷에서 남자들이 형이라고 부르는 건 나름 대단한 업적이 있는 사람들뿐이거든요.”
“글쎄…. 그럴까요?”
민수는 설아와 수연 사이에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는 소희를 슬쩍 바라보았다. 어쨌든 자리를 마련했으니 소희에게 말할 기회를 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친해지지 않겠는가.
“소희 씨에게도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인터넷에 오르내리게 생겼네요.
소희 씨랑 이야기하던 시간이 범행시간인 데다가 시간이 급해서 모자이크 처리도 하지 못했다고 하네요.
게다가 화질이 너무 좋아서 소희 씨 모습도 그냥 그대로 나가 버리고 말았어요.”
민수가 솔직하게 사과하자 소희는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냥 내보내도 된다고 여사님께 말씀드렸어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소희의 말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도움이 좀 되긴 했을걸. 어떤 놈들은 소속사에 저런 미인이 있는데 엄한데 갈 마음이나 나겠냐? 저 여자가 민수 애인이면 딴 여자가 눈에 안 들어올 거 같은데.
뭐 이렇게 반응하고 있더라고. 원래 물타기에는 미인이 최고긴 하니까.”
“아니에요. 혹시 모자이크가 들어가면 무슨 조작이라도 들어간 게 아닐까 사람들이 의심할 거 같아서 걱정돼서 그런 거였어요.”
그런 소희의 태도를 지켜보던 설아는 조금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소희 씨. 저한테는 말도 안 하고 피하시더니 민수 오빠나 수연 언니한테는 말씀도 잘하시네요. 혹시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설아의 직설적인 태도에 당황해 동공이 마구 흔들리던 소희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입을 살짝 벌리더니,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죄송했어요.
사실 제가 미숙해서 연기하려면 배역에 완전히 집중해야 해요.
그런데 그때 대표님에 저에게 주신 배역이 주인공을 질투하는 악녀 역할이었거든요.
배역에 한창 몰두하고 있는데 너무 예쁜 설아 씨가 다가오니 왠지 주인공 같아 보여서…
죄송해요. 별다른 뜻은 없었어요.”
수줍게 고백하는 소희의 말에 설아는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입가가 조금 올라가기 시작했다.
메소드 방식으로 연기를 하는 소희, 메소드 연기의 가장 큰 단점은 아무래도 배역의 자아와 자신의 자아가 점점 동일시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메소드 연기에 심하게 몰입하는 배우들은 배역을 마치고 다시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설명을 들어보니 그 당시의 소희는 자신의 배역인 악녀와 자신이 혼동된 상태였던 것 같다. 그리고 설아를 보고 자신의 극 중에 나오는 주인공이라는 착각에 빠져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 버린 것이고.
아마 급하게 자리를 피한 것은 그런 마음이 설아에게 표출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배역에 너무 몰입하면 어렵다니까. 연기 할 때는 좋은데 뒤에 너무 힘들잖아.”
“대표님도 가능하면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아직은 힘들지만, 차차 그렇게 해보려고요.”
민수랑 수연도 아는 사실을 윤 대표가 모를 리 없으니 아마 지금 소희가 하는 연습은 배역에 대한 몰입도를 조절하는 훈련일 것이다. 그리고 윤 대표의 성향을 생각해 봤을 때 몰입도를 제어할 수 없다면 아마 소희를 데뷔시키지 않을 것 같았다.
한편 소희의 설명을 들은 설아는 조금 웃으면서 소희에게 다시 물었다.
“소희 씨눈에도 제가 예뻐 보였나요? RD에 아이돌 연습생 중에도 예쁜 분들이 많다고 하던데요”
“거기도 설아 씨 같은 분은 없던걸요. 처음 보고 얼마나 깜짝 놀랐던지…. 진짜 예뻐서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그런데 제 성격이 이래서 무슨 말을 드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머,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제가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서로 예쁘다고 꺄꺄거리며 부산스럽게 친해지는 두 여자를 바라보며 수연은 짜게 식은 눈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민수야, 미안해. 남자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저기 여자들도 그러네. 남자 종특이란 말 취소할게.”
소희가 예뻐서 그랬다는 말 한마디에 마음을 풀어버린 설아를 바라보며, 민수는 한편으로는 기가 막히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설아에게 아름다움에 대한 묘한 집착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봤을 때도 내가 덤덤하게 반응했더니 미묘한 반응을 보였었지. 진짜 무슨 문제가 있나. 공주병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소희 언니는 처음에 수연 언니 보고 존경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맞아. 수연 선배님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저 두 여자는 어느 세 말까지 놓고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난 성격이 이래서 다른 사람들한테 말도 잘 못 하거든, 그런데 우연히 수연 선배님이랑 대표님이랑 이야기하는 걸 듣게 됐어.
나에게는 진짜 무서우신 분이셨는데 수연 선배님은 대표님이 뭐라고 하든 간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시더라고. 그때 진짜 멋있다고 생각했어.”
둘의 대화를 듣던 수연의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변했다.
당연히 예전에 자신이 한 연기를 보고 자신을 존경하고 있을 거로 생각했던 수연은 배우 이수연이 아니라 인간 이수연을 존경한다는 소희의 말에 조금 실망을 느꼈다.
게다가 소희가 온 첫날 민수와 태준에게 으스댔던 것까지 생각나자 순간 민망함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인상을 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웃지도 못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수연의 표정을 보며, 민수는 작게 웃으면서 소희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수연 선배를 존경하는 건 수연 선배의 그 성격 때문이라는 거네요.”
“하긴 수연 언니가 걸크러쉬 뿜뿜 이긴 하죠.”
묘하게 수연을 놀리는 듯한 민수와 설아의 어투, 그리고 실망한 듯한 수연의 모습에서 인제야 자신의 실수를 눈치챈 소희는 두 손을 저으며 애원하는 눈초리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선배님의 연기도 물론 엄청 대단하세요. 성격만 존경한다는 건 아니었는데….”
“연기는 대단하지만, 성격은 존경스럽고. 결국 존경하는 이유는 성격이고”
“걸크러쉬 뿜뿜”
수연은 평소와는 다르게 묘하게 깐죽거리는 어투에, 태준이나 하던 짓을 하는 민수를 보면서 가볍게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살짝 곤란해하던 소희도 그런 민수가 뒤통수를 맞는 모습을 보면서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야. 우리 1절만 하자.”
분위기가 처음보다 훨씬 부드러워지자 민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민수는 이제 서로 말문을 확실히 열었으니 앞으로 저번 같은 오해로 사이가 벌어지진 않겠다는 생각하면서 크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후. 역시 성격답지 않은 짓은 쉽지 않아. 윤 배우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 맞다. 민수 오빠 담당한 검사님이 엄청 젊고 예쁜 분이라고 하시던데 기분이 어떠셨어요?”
난생처음으로 취조실에 들어가 긴장한 상태에서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나온 사람한테 검사가 예쁘냐고 묻는 설아의 얼토당토않은 질문에 민수는 그냥 피식 웃으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네네, 매우 예쁘시더라고요. 제가 또 그렇게 멋진 검사님은 처음입니다. 심문이 조금만 길었으면 제가 확 고백이라도 할 뻔했어요.”
엉뚱한 질문에 엉뚱한 대답이라고 생각한 민수가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자 옆에서 소희가 두 눈을 크게 뜨고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민수에게 물었다.
“진짜요? 제가 듣기로는 선배님 고자라고….”
“풉!”
순간 맥주를 삼키려다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맥주를 뿜어내고 만 민수는 당황으로 얼굴이 붉어진 채로 그런 말을 할 만한 유일한 사람인 설아를 노려보았다.
애써 민수의 눈을 피하던 설아는 슬쩍 소희에게 다가가 소희의 귀에만 작게 속삭였다.
“아뇨, 고자가 아니라 정신적 고자요”
하지만 바로 옆에 민수가 그 말을 못 들을 리가 만무한 상황이라 민수의 얼굴은 알 수 없는 울분으로 불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수연은 고소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고 소희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 사람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볼 뿐이었다.
상당히 소심한 이 여자는 생각보다 상황 파악이 늦고 좋게 말하면 순수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어딘가 조금 맹한 여자인가 보다.
그리고 민수는 자신이 이 세 명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정확하게는 설아와 소희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고민한 것이 정말 쓸데없는 짓이 아니었는지 잠시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사람들은 민수의 기자회견 영상을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성범죄와 무고죄 예전부터 종종 뜨거운 화두가 되었던 이 주제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사람들의 갑론을박은 끊이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논쟁이 계속 이어지자 어느 세 사람들은 왜 이 이야기가 시작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조금씩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묘하게 이득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민수가 CF를 찍은 “준성 식품”이었다.
사람들 중 일부는 민수가 연예인답지 않게 상대를 무고죄로 맞고소했다는 것, 그리고 기자 회견에서도 생각을 전혀 굽히지 않은 것에 큰 호감을 느끼고 속 시원하다면서 민수가 광고하는 “사이다”를 사 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상 참 알 수가 없네”
그리고 그런 시간이 며칠 동안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담당 검사인 김지희 검사의 수사결과 발표만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