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86화 (86/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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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프로젝터가 급하게 설치된 기자회견장에는 오 팀장이 자료를 정리하고 민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민수가 들어서자 오 팀장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민수는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살짝 인사를 한 후 자신을 위해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민수가 들어서는 장면부터 셔터를 눌러대던 기자들은 민수가 자리에 앉자, 먹이 감을 앞둔 하이에나처럼 탐욕스러운 눈으로 민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수는 그 열기를 직접 느끼면서 마음속 깊이 씁쓸함을 느꼈다.

아마 내가 데뷔 초에 괴로움을 호소하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기자들을 모았어도 저렇게 적극적으로 모여들었을 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저들 대부분이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니라 자극적인 소재일 테니까. 아니 어쩌면 신인배우의 울먹이는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서 몇 명 정도는 관심을 두었을 지도.

민수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오 팀장은 빔프로젝터로 민수가 오늘 경찰청에 제출했던 CCTV 영상을 기자들에게 틀어 주었다.

누가 봐도 민수의 무죄가 확실해지자 기자들의 열기는 이내 급속하게 식어 내렸고, 민수는 그들의 그런 모습에서 그들이 원했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질의 응답시간이 되자, 기자들은 민수에게 몇 가지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정민수 씨,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

“기자님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물벼락을 맞고 온몸이 다 젖었다면 무슨 기분이겠습니까?”

“정민수 씨는 무죄를 확신하십니까?”

“제가 확신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검찰은 이미 조사 후 무죄로 결론 지었습니다.”

민수가 조사가 유죄 쪽으로 기울어지기를 기다렸던 기자들은 맥 빠진 질문만 몇 가지 던질 뿐이었다. 그러다 기자 하나가 무슨 정보를 얻었는지 눈을 빛내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고소 여성을 무고죄로 맞고소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순간, 민수는 오늘 아침에 보았던 그 영상이 떠올랐다.

그 영상에서는 자신에 대한 노골적인 악의가 그대로 느껴졌다. 그 영상 하나가 자신의 연기 인생을 완전히 망쳐 버릴 뻔했다는 사실에 민수는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애써 화를 억누른 민수는 최대한 담담하고 감정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민수가 대답하자 질문한 기자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계속 물었다.

“성추행당한 여성에게 너무 과하게 반응하신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민수가 별 표정 없이 짧게만 대답하자 기자는 조금 짜증이 난 얼굴로 캐물었다.

“여성분도 상대에게 속아서 정민수 씨를 고소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CCTV 영상을 봤을 때 주변은 제 옷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밝았으며 도망치는 여성분의 걸음걸이 봤을 때 여성분이 취한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바로 저를 지목해서 고소하셨으니 평소에 저를 전혀 모르시던 분도 아니었겠죠.

누군가를 저로 착각했다는 건 그 사람이 저랑 많이 닮았다는 건데, 제가 그렇게 흔한 얼굴인가 싶군요.”

“그 말씀은 그 여성분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제 생각이 중요하지는 않겠죠. 하지만 그분도 무죄라면 저처럼 바로 무죄 방면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분의 빠른 무죄 방면을 기원하겠습니다.”

“일부에서는 성범죄 신고 여성을 무고죄로 고소하는 것은 성범죄 신고율을 낮출 수도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의 질문에 민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정말 이해 못 한다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기자에게 되물었다.

“무고죄가 무서워 못하는 신고는 허위신고 아닙니까? 허위 신고율이 낮아지는 게 왜 문제가 되죠?”

그리고 그런 기자회견 장면, 그리고 CCTV 영상, 그리고 검찰 조사 후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받은 기사가 대대적으로 유포되었다.

-와 무슨 CCTV 화질이 저래? 저런 것도 있었나?

-비싼건 저런 것도 있어. 고화질 그나저나 이건 반론의 여지가 없네

-정민수는 저기서 무고죄로 고소를 때려 버리네. 저거 생긴거랑 안어울리게 은근히 상남자 아니냐?

-저래뵈도 최전방에서 5년이나 구른 몸이야.

-민수형 응원한다. 남 인생 망치려는 X는 지 인생 조질수도 있다는것도 알아야지.

-그래봤자 벌금 얼마 물고 끝일걸. 무고죄는 입증도 엄청어려울거다.

-언제부터 형이야 대체.

-근데 그 시간에 소속사에 같이 있던 여자가 연기자 지망생이라던데 봤냐? 개이쁘던데.

-그시간까지 민수형 기다린거 아냐? 뭐 혹시 여친이라던지.

-에이 설마 그러면 저 영상을 그냥 그렇게 올렸겠냐? 생각좀 하자.

-ㅋㅋ 제얼굴이 그렇게 흔한가요? 자신감쩌네.

-근데 틀린말은 아니지. 솔까 저게 흔한 얼굴이냐? 애당초 저 얼굴을 착각했다는게 더 웃긴데.

-뭐 진범이 잡힌다면 알게 되겠지.

-범인이 진짜 정민수 닯은 놈이면 개웃기겟는데

-여초 사이트는 또 난리 나겠군.

-정민수씨 그렇게 안봤는데 남자답지 못하네요. 성추행당한 연약한 여성을 보호하지는 못할 망정.

-정민수때메 또 한명의 불쌍한 여성이 마녀사냥을 당하겠네요.

-잡았다 요X

-민수형 말 못들었냐. 그분의 무죄 방면을 기원한다잖아. 무죄면 바로 무죄 방면 되겠지. 무고죄로 처벌받기가 성추행으로 무죄받는거 보다 더 어렵다는거 알고는 하는 소린지. 원

그렇게 인터넷은 다시 민수의 무고죄 고소에 대한 이야기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민수는 기자 회견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민 여사를 찾아 왔다. 민 여사는 그런 민수를 웃으면서 따듯하게 맞이해 주었다.

민수가 이사장실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자 민 여사는 그런 민수에게 따듯한 차를 한잔 내주었다.

“내가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는 했지만, 그렇게 뻔뻔한 줄은 몰랐구나. 그래 네 얼굴이 그리 흔하진 않지. 그리고 여성분의 무죄 방면을 기원한다는 말도 인상적이었어.”

민 여사가 웃으면서 놀리듯 말하자, 민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저도 제가 왜 그랬나 싶네요. 속이 막 끓어 올라서, 조금 막 지른 면이 있었죠.”

“나무라는 게 아니야. 덕분에 사람들의 눈이 완전히 옆으로 옮겨 갔잖니. 사람들은 이제 너의 성추행에는 관심이 없어. 그 여성이 무고죄가 될까 안 될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될까요?”

“글쎄…. 검사의 능력과 의지에 따라 다르겠지. 어쨌거나 저건 대놓고 널 저격해서 고소한 거니까 파보면 분명 뭐가 나오긴 할거란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위기를 잘 넘겼네요.”

“별말을…. 당연히 할 일을 한 거뿐이란다.”

“그래도 조금 걱정은 되네요. 제가 괜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또 다른 분란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한번 지켜보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걱정하는 민수를 부드러운 말로 진정시킨 민 여사는 우아한 표정으로 따듯한 차를 음미하듯 한 모금씩 천천히 삼키고 있었다.

민수가 기자 회견을 하고 있던 그 시간 김지희 검사는 다시 한번 고소인이 제출한 영상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검찰 사무관이 옆으로 지나가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뭐가 이상하신가요? 우선 정민수 씨는 바로 무고죄로 맞고소하고 가셨습니다.”

“이상하지… 솔직히 말이 안 되지 않아? 하필이면 그날 정민수가 입은 옷하고 같은 옷을 입은 남자가 버젓이 CCTV 앞에서 자신이 정민수라고 하면서 여자를 성추행했다네?

그리고 그 여자는 다음날 바로 저 영상을 가지고 고소를 했어. 그런데 진짜 정민수는 그 시간에 자기 소속사에 있었고 말이야. 아주 많이 웃긴 일이야.

게다가 말이야.

원래 성추행이나 성폭행 피해자는 저렇게 바로 신고하러 오는 경우가 아주 드물어.

아무래도 세간의 눈을 신경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 심적 고통을 바로 극복하기 힘들어서이기도 하기 때문이지.

바로 다음 날 신고하는 경우는 대부분 정말 상대에 대한 증오심이 너무 강한 경우가 일반적인데… 저 영상으로는 피해자의 그런 증오를 이해하기 힘들거든.

좋아. 어쨌든 무고죄로 고소까지 들어왔단 말이지. 우선 저 고소인, 아니 이제 피의자지. 계좌부터 수색영장 신청해. 계좌부터 파 보자고. 그리고 성추행 사건도 같이 조사해.

그 남자 잡는 게 가장 빠를 거야. 혹시 그 시간에 그 근처에 지나간 차라도 없나 잘 찾아봐.

블랙박스라도 하나 찾으면 조금 수월하게 잡을 수 있을 거야.

“본격적으로 파보실 겁니까? 지금 인터넷은 시끄럽던데요.”

“인터넷이야 언제나 시끄럽지. 그리고 세간의 눈이 집중된 사건이니까 어쨌든 해결은 봐야 해. 안 그러면 또 어디서 무능한 검찰이니 하면서 수사권 독립 이야기나 나오겠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김지희 검사는 남성이 위력으로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보다 우대받으려고 하는, 세간에서 말하는 꼴페미를 증오했다.

김지희는 진정으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다고 생각했고, 그녀에게 일부 꼴페미의 행각은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남녀평등의 실현을 방해하는 요소일 뿐이었다.

“그럼 너의 실체가 무엇인지…. 한번 파 보자고.”

RD엔터의 대표실

김익수 대표는 자신의 정보원으로부터 근래 정우철의 행각을 비교적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정우철을 쳐낼 명분만 기다리던 김 대표는 민수의 일이 세간을 급격하게 달구자 자신도 이제는 행보에 박차를 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돈은 그 계좌에서 나갔다고?”

“네. 평소에 쓰던 회사의 비밀 계좌입니다.”

“웃기는군. 진짜. 내가 그 계좌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가? 그리고 회사 내의 상황은?”

“정우철의 끄나풀이 접촉하던 직원을 살펴보던 중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연습생 명부에 처음 들어보는 여자의 이름이 하나 올라갔더군요. 그리고 그 여자가 누군지 찾아보니 지금 정민수를 고소한 그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삭제하고, 해당 직원은 보직 대기 지시를 내려놓았습니다.”

“정우철은 자신이 참 그래도 영리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사람은 그저 욕심만 많은 어리석은 사람이야. 차라리 사장님 말씀대로 한 일 년 자숙했으면 내가 진짜 힘들어졌을 수도 있어.

하지만 사장님 말씀을 어기고 이렇게 움직였으니 이제 그 대가를 치러야지.”

김익수는 정우철이 RD 엔터에 피해를 줄 목적으로 행했던 최근에 행적을 기록한 보고서를 조용히 진시첸 사장의 직통라인으로 넣어 전달했다.

이런 일은 자신이 나서서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면 더 모양새가 빠질 테니.

상황을 보면 영리한 사장이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하리라.

“멍청한 놈. 윤 엔터에 피해를 주면서, 동시에 RD도 흔들어서 그걸 나의 관리 소홀로 주장하겠다는 거겠지? 세상을 너무 쉽게 봤어.

그나저나… 혹시 윤 엔터에 피해라도 줄 수 있을까 싶어. 지켜보기만 했지만 역시 그건 무리였나. 사내에 왜 저런 CCTV가 설치되어 있는 거야?

그리고 무고죄라… 윤 엔터도 알고 있는 거군. 저 여자 뒤에 있는 정우철의 존재를.

하긴 어쩌면 나보다 더 정우철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게 윤 엔터 일라나….”

민 여사와의 면담까지 마친 민수는 그야말로 너덜너덜해진 기분으로 자신의 방에 도착했다.

그러자 방에는 설아와 수연, 그리고 소희까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수는 특히 수연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수연 선배가 여기 왜 있어요? 어제 쉰다고 집에 내려가셨잖아요?”

수연은 놀라는 민수를 보면서 인상을 잔뜩 구겼다.

“쨔샤. 걱정돼서 아침부터 동원 씨 졸라서 튀어 온 거야. 나중에 동원 씨에게 미안하다고 해. 아침에 꿀잠 자다가 나한테 전화 받고 미친 듯이 달려왔으니까.”

“하… 고맙긴 한데… 왜 여기에 이렇게 모여 계세요.”

“아까 기자 회견 영상 잘 봤어요. 그건 또 누가 촬영해서 올린 거예요? 누가 보면 실시간 생중계라고 생각하겠어요.”

“생중계는 무슨. 제가 그렇게 유명한 배우도 아니고. 그거 형우가 찍은 거래요. 혹시 또 기자 회견에서 한 말이 곡해된 기사로 나갈까 봐. 민 여사님이 지시하신 거랍니다.”

수연과 설아, 그리고 소희까지 다 모인 조금 드문 상황에 민수는 이 기회를 빌려 저들이 조금 친해지는 계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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