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2
한동안 꿀 같은 휴식을 취하게 된 민수는 쉬는 동안 소희와의 관계를 개선하기로 결심했다.
지금 왠지 조금 동떨어진 소희가 조금 안쓰러워 보였기 때문인데, 적어도 소희가 데뷔를 해서 정 붙일 만한 친구가 생기기 전까지는 소속사 내에 배우들하고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였다.
소희의 생각은 자신과 다를 수 있었지만, 본인이 경험하기에는 적어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동료가 있고 없고는 배우 생활하는 데 큰 차이가 있었다.
자신도 큰일이 있었을 때 주위에 동료들 때문에 큰 힘을 얻지 않았는가. 민수는 적어도 자신이 받은 만큼, 혹은 그 이상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고 싶었다.
며칠 소희를 가만히 살펴보니 강환 선생님하고 수업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정해진 일과는 없어 보였다.
지금 소희를 가르칠 윤 대표가 태준과 함께 중국으로 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소희는 우선 윤 대표가 지시해 놓은 몇 가지를 중점적으로 연습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형우처럼 붙임성이 좋지 않은 민수와 소심해서 다른 사람에게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는 소희, 그 둘이 만난다고 대화가 자연스럽게 흐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민수는 대화보다는 연기의 측면에서 소희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처음 민수가 연기 연습에 상대역이 되어준다고 했을 때 소희는 조금 당황하며 거절했었다. 하지만 민수가 계속 웃으면서 권하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소희도 당장 연기연습을 하는데 상대역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소희가 보기에도 상당히 근사한 연기를 하는 민수가 직접 상대역이 되어준다는 것이 얼마다 도움이 되는 일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민수는 소희와 연기 연습을 하면서 가르치듯이 대하지 않았다. 자신과 스타일이 다른 소희를 가르칠 만큼 자신의 능력이 출중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윤 대표가 자신을 가르칠 때 지적했던 몇 가지를 토론하듯이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조금 거리감을 두던 소희도 그렇게 민수와 연기 연습을 하면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말문이 트이듯 점점 편하게 민수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민수와 소희가 연기연습을 하는 동안, 설아는 뮤직비디오 촬영을 마무리 지었다.
사실 하루 이틀이면 끝날 거 같은 작업이 며칠이나 걸린 이유는 순전히 이카루스 때문이었다.
이카루스는 설아랑 뮤직비디오 촬영이 확정되자, 뮤비에 엄청나게 힘을 주기 시작했다.
원래 한편으로 계획되었던 뮤비는 기존의 뮤비 한편에 각각 멤버 수에 맞춰서 5편을 추가로 제작하게 되었다.
게다가 뮤비용으로 각각 멤버들이 기존의 곡을 조금씩 변형해 자신만의 곡을 만들어 버려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노래 6곡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개인 곡은 후렴구를 제외하고는 그 멤버 혼자 부른 것이라, 이카루스 팬들은 이 소식을 듣고 엄청나게 기뻐했다고 한다.
이카루스 멤버들은 이 기회를 빌려 사심을 확실히 채웠다고 한다. 어차피 사심을 채우기 위하여 시작된 뮤비 촬영이니,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설아를 자신 이상형의 모습으로 세팅하고 개인 뮤비 촬영을 하게 되었는데, 덕분에 설아는 5가지 다른 의상을 입고 5가지 설정에 맞춰서 매력을 선보이게 되는 기회를 얻었다.
뮤비 촬영이 며칠이나 걸리게 된 이유는 바로 이거였다.
애당초 배우가 아닌 이카루스 멤버들은 연기가 저질이었고, 자신의 이상형으로 변한 설아 앞에서 제대로 된 연기를 하지 못했다.
그러니 결국 단독으로 멤버 개인이 4분 동안 설아와 연기하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 개인 뮤비 촬영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설아는 그때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세팅하고 나올 때는 좋아서 방방 뛰다가도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수줍게 작아지는 이카루스 멤버들이 조금 귀여웠다고 이야기했다.
촬영 소식을 전해 들은 민수는 혀를 내둘렀다.
“솔직히 신인 배우 하나 불러 놓고, 5가지 세팅에 5가지 연기를 해달라고 하면 그거 엄청 민폐잖아? 예고한 것도 아니고. 조금 너무한 거 아냐?”
민수가 어이없어하자 설아가 설명하길, 멤버들의 의견에 리온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일축했다고 한다.
하지만 멤버들이 자꾸 우기면서 조르자 감독에게서 한번 시도나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자신이 그 어려운 일을 잘 소화해 버리면서 결국 그렇게 가게 된 거란다.
그렇게 말하면서 자랑스러움에 어깨가 올라가는 설아를 보면서 민수의 입가에는 작은 웃음이 맴돌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결국 “송포유”의 종방연 날이 다가왔다.
민수는 오늘 종방연에 형우와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오늘 종방연을 마치고 수연은 며칠 동안 본가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게 되는데, 본가가 근처인 동원이 수연을 데려다주고 본인도 며칠 동안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연이 복귀하는 시기에 맞춰서 수연을 데리고 회사로 복귀하게 될 것이다.
“자, 가시죠. 배우님”
웃으면서 자신을 맞이하는 형우를 보면서 민수는 실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 올랐다.
민수가 차에 오르자 형우는 조금 심각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형한테 이상한 여자들이 접근할 수도 있다네. 그래서 잘 살펴봐야 한다고.”
형우의 말에 민수는 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스케줄 나갈 때마다 자신의 주변을 살펴보던 동원도 그런 지시를 받았던 모양이다.
아마 회사에서는 자신이 저번에 겪은 일 때문에 과도하게 신경 쓸 것을 염려해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스케줄 중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은 매니저 차원에서 충분히 커트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종방연은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만나야 하니 매니저가 일일이 제지할 수 없을 테고 그래서 동원도 형우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 역시 그런가. 또 무슨 일이 있나 본데…”
“연예인들은 원래 그렇게 피곤하게 사는 거야? 저번에도 엄청 짜증 나는 일이 있었잖아?”
“글쎄…. 그거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내가 재수가 없는 게 아닐까?”
형우의 투덜거림에 민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도착한 종방연 모임에는 이미 많은 스텝과 배우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민수는 피디님과 작가님께 인사를 건네고 바로 리온과 수연, 그리고 진주가 앉아 있는 자리로 이동했다.
배우들은 민수를 웃으면서 반겨 주었다.
“하하하. 형님이 소개해 주신 분 덕분에 좋은 뮤비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윤 엔터에는 그런 분밖에 없나요? 정말 대단하시던데요.”
리온은 민수를 보자마자 설아의 칭찬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연은 리온의 말에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면서 민수를 바라보았다.
민수가 쉬는 동안에 수연은 바쁘게 움직이면서 소속사를 거의 찾지 않았다. 기존의 우아한 수연의 이미지에 이번 드라마에서 보여준 발랄한 이미지, 거기다가 효녀라는 긍정적인 이미지까지.
사실상 이번 드라마의 가장 큰 수혜자인 수연은 짧은 시간 동안 굵직한 CF 몇 건을 계약하게 되었다. 본인도 자신이 축낸 소속사의 자금을 충당하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해 민 여사도 그녀의 행보를 막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설아가 이카루스의 뮤비에 촬영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나 보다.
민수와 리온이 설아가 이카루스 뮤비를 촬영한 사실과 그 경과를 설명하자 수연은 작게 탄성을 내지르고는 아련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하… 그 녀석이 벌써 그렇게 컸구나. 그렇게 연기를 잘했어?”
이미 수연보다 더 커진 지 오래인 설아지만, 수연의 기억 속에는 작은 소녀일 때에 설아만 남아있었는지, 설아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는 이야기에 수연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하…. 그 망할 놈들이 정말…. 설아 씨 본 날부터 영감이 뿜뿜 피어오른다고 하면서 각자 개인 곡 만들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사달이 나 버리고, 대표님도 갑자기 뮤비 촬영비용이 몇 배나 늘어 버려서 며칠 동안 한숨만 쉬셨어요.
이번 엘범 잘 안되면 진짜 우리 대표님한테 쫓겨날지도 몰라요.”
그렇게 한숨을 쉬면서 장난스럽게 말하는 리온을 진주가 부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와… 이카루스 뮤비 출연이라니. 그거 엄청 부러운 일이네요.”
이번 드라마에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 진주는 요즘 가수보다는 배우로서 더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클럽에서 춤추는 장면이 제법 매력적으로 방송되었고, 오늘 방송될 에필로그에서 솔로 가수로 활동하는 모습이 방송되겠지만 그게 진주네 그룹인 “레이디밤”에 도움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그에 비하여 톡톡 튀는 그녀의 연기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긍정적으로 기억이 되었으니, 앞으로 진주의 행보는 어떻게 될지 예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는 중에 리온이 민수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드라마도 끝났는데, 저를 조금 편하게 대해 주실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데요. 저도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부르고 싶어서요. 앞으로도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고요.”
리온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 민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수가 생각하기에도 리온 같은 녀석을 또 보기는 힘들 것 같았다. 성격도 좋았고, 가식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한 명이라도 마음 터놓고 지낼 사람을 늘리고 싶었던 민수는 흔쾌히 리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 그냥 필수라고 부르면 되지? 앞으로도 연락하고 지내자.”
민수가 웃으면서 말을 놓자 리온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죠.”
의리를 다지는 듯한 민수와 리온을 바라보면서 수연은 민수와 태준이 소속사에서 자기들끼리 평가하면서 흐뭇해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저건 남자들 종특이야? 아니면 민수 주변에 웃긴 놈만 모이는 거야? 참 웃긴 놈들이라니까.”
작게 중얼거린 수연은 고개를 저으면서 지금 방영 중인 “송포유”의 마지막 회를 바라보았다.
계속 고른 시청률을 보였던 “송포유”는 마지막까지 비슷한 시청률은 24.2%를 기록하면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루었다.
전반기에 최고 작품이라는 “태풍” 후반기를 휩쓸었던 “별에서 온 당신” 보다는 낮은 시청률이었지만 투입된 예산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가장 효율적인 성공을 기록한 드라마일 것이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에서 인기 있는 리온이 좋은 연기를 선보이게 되자 중국과 일본에서도 수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 수출은 거의 확정적이었고, 중국은 논의 중이라고 피디님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셨다.
종방연까지 마친 민수는 이제 조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처음으로 드라마에 출연하여 끝까지 연기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수연이 자신의 집으로 출발하자 민수는 자신의 차 앞에서 작게 한숨을 쉬면서 잠시 차오르는 감동과 벅찬 가슴을 진정시키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감격하고 있던 민수는 자신에게 경종을 울리는 묘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자 저 멀리에서 왠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민수는 서둘러 차 안에 있던 형우를 불렀다.
“조형우 잠깐만. 고개 돌리지 말고 듣기만 해봐. 저쪽에 저 검은 차 보이지? 저기서 왠지 나를 지켜보는 거 같은데.”
조금 다급한 민수의 말에 형우는 옆 눈으로 슬쩍 차량 쪽을 바라보았다.
“어. 그러네! 무슨 카메라 같은 것도 들고 있고….”
형우의 말에 민수는 서둘러 차량에 올라탔다. 민수는 지금 자신이 서둘러 돌아가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형우야. 지금 여기서 소속사까지 최대한 밟아 봐. 왠지 최대한 빨리 가야 할 거 같아.
느낌이 조금 안 좋아.”
부대에서도 민수는 감이 좋은 편에 속했다.
지금처럼 특별한 감각을 느끼진 못했지만 그래도 직감한 것이 얼추 맞곤 했다. 형우는 민수가 저런 반응을 보일 때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남는 일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좋아 그럼…. 딱지나 이런 거 신경 안 쓰고, 최대한 빠르게 달려 볼게.”
심각한 표정을 지은 형우는 서둘러 소속사로 출발했다. 그리고 평소보다 아주 빨리 소속사에 도착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속사에 도착하자 아까 느껴졌던 이상한 불안감이 사라졌고, 민수는 웃으면서 한숨을 쉬며 형우와 헤어져 소속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이 오지 않아, 밤늦게까지 연습하던 소희와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