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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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날이 밝기 무섭게 윤 대표와 박 실장, 그리고 태준은 첫 비행기로 북경을 향해 날아갔다.
확실한 협의가 있기 전에 태준까지 움직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지만, 때마침 휴식을 위하여 한국 스케줄도 다 미룬 상태였고, 어차피 서로 밀고 당기고 할 상황은 아니니 우리 쪽에서도 최대한의 성의를 보여주자는 박 실장의 의견을 따른 것이었다.
예고에 없던 태준의 출국을 뒤늦게 알게 된 언론사들 때문에 홍보팀 전화기만 한동안 불을 뿜었다고 한다.
“당분간, 윤 배우 얼굴은 보기 힘들겠구먼. 이거 조금 서운한 걸…”
형우는 어제 민수의 전화를 받고 날뛰면서 기뻐했었다.
그리고 오늘 바로 찾아오겠다고 말하였다. 때마침 민수도 오늘이 촬영을 쉬는 날이니 바로 그러라고 했다. 그래도 첫날인데 자신이 민 여사님께 소개해 드리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형우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서 민수는 동원과 함께 건물 앞으로 나갔다.
“요 앞에 그냥 나가는 거라 안 따라오셔도 되는데요.”
“하하, 그건 그렇지만…. 저도 월급 받는 값을 해야죠. 가뜩이나 정 배우님이 소속사 건물에만 계셔서 제가 마땅히 할 일이 없잖습니까.”
이제 시간이 지나다 보니 처음에는 매우 딱딱했던 동원과 민수의 사이도 어느 정도 부드러워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동원과 이야기를 해가며 건물 현관을 지나는데 저쪽에서 방검복을 입은 박춘섭 어르신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차로만 이동해서 어르신은 또 오랜만이네.’
춘섭이 다가오자 동원은 조금 굳은 얼굴로 고개를 90도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민수가 그 모습을 조금 놀라서 보고 있는데 춘섭은 자연스럽게 동원의 인사를 받았다.
마치 항상 그렇게 인사를 받는다는 것처럼 말이다.
“아.. 이봉성이 아들내미지? 동원이였던가? 요즘 저 녀석 매니저로 일한다지?”
“네, 어르신.”
“안녕하세요. 어르신. 오랜만이네요.”
조금 얼어있는 동원을 뒤로하고 민수는 반갑게 춘섭에게 인사를 건넸다. 춘섭도 평소에 딱딱한 태도 대신에 조금 부드러운 얼굴로 민수를 맞이했다.
“반갑네. 오랜만이야.”
그렇게 인사를 한 춘섭은 민수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그래… 자네가 생각보다 된 녀석이더군. 기사로 다 봤네. 그래. 남자라면 돈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요즘 아리 빌딩을 뛰어다니는 그 귀여운 녀석이 자네가 도와준 녀석이라지?
참 좋은 일을 했구먼”
민수는 춘섭의 태도가 조금 변해서 의아한 기분이었는데, 말을 들어보니 자신에 대한 기사를 좋게 보았구나 싶어 그냥 웃음만 지었다.
그리고 이제 나가서 형우를 기다려야 하기에 춘섭에게 인사를 건네고 동원을 끌고 밖으로 나섰다.
밖에 나오자 동원은 깁게 한숨을 쉬면서 다시 어깨를 폈다.
그 모습에 민수는 동원이 춘섭 어르신에게 너무 얼어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춘섭 어르신한테 무슨 잘못한 거 있으세요? 왜 그렇게 얼어있어요?”
“아…. 정 배우님은 모르시는구나. 박 어르신이 아리 재단의 최고 원로 분이세요. 박 이사님의 아버님이기도 하시고요.
원래 고문으로 계셔야 하는 분인데, 자신은 그냥 건물 입구나 지키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셔서 저렇게 계시는 거예요.”
동원이 설명했지만 민수는 그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동원은 윤 엔터에서 일하는 매니저지 아리 재단에서 일하는 사원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궁금한 마음에 동원에게 그 사실을 물으니 동원은 조금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 이거 참…. 사실은…. 지금 아리 재단에서 일하는 사람들하고 우리 윤 엔터에서 일하는 사람들하고 다 한 식구예요.
저도 매니저 일하기 전에는 아리 재단 보안 실에서 일했었고요. 이번에 외부에서 들어온 박 실장님 팀이랑 이수연 씨가 들어올 때 같이 들어온 팀 빼고는 다 그렇죠.”
문득 민수는 예전에 윤 대표가 인력만 남아도는 소속사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리 재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을 다 끌어서 쓸 수 있으니 대표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나 보다.
민수는 동원의 설명을 듣고 보니 춘섭 어르신이 조금 달리 보였다.
맨날 볼 때마다 엉뚱한 소리나 하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민 여사님도 춘섭 어르신을 원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렇게 아리 재단과 춘섭 어르신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자니 저편에서 형우가 뛰어오고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밝은 표정으로 뛰어오는 형우를 보니 민수는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실소가 피어올랐다.
형우는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평범하고 크게 거슬리지 않는 얼굴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게다가 표정이 원체 밝은 편이라 남에게 호감을 주기 쉬운 얼굴이었다.
민수는 형우를 보면서 차라리 저런 얼굴이 악역이나 선한 역이나 모두 잘 소화하는 얼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야! 뭐가 신난다고 이렇게 뛰어와?”
“하하하. 신날 수밖에! 드디어 사장님이 사표를 수리해 주셨거든.”
“에휴….”
형우는 밝게 웃으면서 달려와 민수에게 인사를 하고 주위를 둘러보다 민수 옆에 서 있는 단단한 체구의 동원을 보더니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넸다.
“조형우입니다. 반갑습니다.”
“정민수 배우님 매니저 이동원이라고 합니다.”
형우는 자신을 민수의 매니저라고 소개한 남자를 살펴보았다. 자신 못지않게 단단한 체구를 보니 조금 얼빠진 민수형을 잘 돌봐주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선배가 될 이 남자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제 선배님이 되시겠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군요.”
웃는 얼굴의 형우를 향하여 간단하게 대꾸한 동원은 민수와 형우를 데리고 빠르게 건물 안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건물 안에 도착하자 민수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조용히 멀어졌다.
“와… 안으로 안내해주려고 나온 거였어? 완전 과보호인데….”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사라지는 동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형우가 중얼거리자 민수는 피식 웃으면서 설명했다.
“그냥 FM을 추구하는 거지. 원래 배우를 밖에 혼자 두면 안 되긴 하거든. 너도 나중에 저래야 할지도 몰라.”
“윽…. 그래도 건물 밖에 서 있는 거까지 간섭하면 너무 답답하잖아.”
계단을 따라 이사장실로 이동하는 동안 형우는 민수에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아니, 그냥 퇴사하려고 해도 사장님이 다른 곳에 일자리가 확정되기 전에는 못 보내준다 그러시더라고.
이게 억지 이긴 한데 다 나 잘되라고 그러시는 거라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그냥 다른데 일자리 나 빠르게 알아보려고 했었거든.
원래 그런 건 인맥 따라가는 게 제일 빠르잖아.
그래서 친구 놈들한테 쫙 전화를 돌렸는데 이놈들은 다 나 못 믿겠다고 일자리는 못 알아봐 주겠다는 거야.
도대체 사고만 치는 너를 뭘 믿고 소개를 해주냐면서 얼마나 뭐라고 하던지… “
왜 자신에게까지 연락이 왔는지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었던 민수는 형우가 어릴 적에 사고를 어지간히 쳤나 싶었다.
그 시간 4층 이사장실.
민 여사는 최 이사가 건넨 새로운 직원들과 박 실장, 진소희에 대한 보고서를 살펴보고 있었다.
“박찬수 실장은 생각보다 더 유능한 사람이었어요. 서류를 보니 더 잘 알겠군요. 다행히 가족관계나 교우 관계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군요.”
박 실장에 대한 보고서를 다 살펴본 민 여사는 이어서 다른 직원들에 대한 보고서를 하나둘씩 살펴보았다.
그리고 별다른 특별한 문제가 없자 마지막으로 진소희에 대한 보고서를 살펴보았다. 그렇게 내용을 모두 읽은 민 여사는 살짝 인상을 쓰면서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하…. 달링이 눈이 돌아가면서 받으려고 한 배우라 별 반대는 안 했는데…. 대체 왜 우리 소속사에는 정상적인 배우가 오지 않을까요? 혹시 여기 터가 안 좋은가요?”
그렇게 중얼거린 민 여사는 다시 서류를 펴고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진소희의 이력을 다시 읽어 본다.
“매사에 주눅이 들어 보이는 이유가 있었네요.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네요. 민수보다 낫다고 하기도 힘든 환경이었네요, 이 아이는… 심지어 여자아이고… 이 아이 지금 머무는 곳은 어디죠? “
“근처에 작은 원룸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박 실장이 얻어다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확실히 박 실장은 책임감이 있네요. 자기를 따라왔다는 거겠죠. 그래도 그러면 안 되죠. 서둘러 집부터 알아봐 주세요.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오피스텔로. 아, 그래요 청림 쪽은 비어 있죠? 거기가 좋겠네요.”
민 여사가 회사에서 5분 거리의 청림 오피스텔을 이야기하자 최 이사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민 여사의 지시를 받아 적었다.
“후… 이 아이 문제는 윤 대표님 돌아오시면 상의해 봐야겠군요. 아 그리고 혹시 정우철이 쪽은 어때요?”
“지금 따로 자기를 따르는 애들 몇 명하고 만 접촉하고 있습니다.”
최 이사의 말에 민 여사의 미간에는 작은 주름이 들어섰다.
“혹시 무슨 다른 수작이 있는 건 아닌가요?”
“그 사람들한테도 사람을 붙이긴 했는데, 일부는 RD 엔터의 직원들이랑 간혹 만나는 듯했고, 나머지는…. 술집에 다닌다고 합니다.”
“술집이요?”
“네, 여자들 끼고 노는 질이 좀 안 좋은 술집 말입니다.”
최 이사의 설명에 민 여사는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대의 행동에 짜증이 난 민 여사는 이마를 다시 짚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 진짜. 대체 진룡은 왜 그 자식을 그냥 내버려 두는 거죠? 당연히 횡령 배임으로 최소한 몇 년은 안 볼 줄 알았는데. 아무튼 좋아요. 혹시 특별한 사항이 있으면 수시로 보고해 줘요.
원래 더러운 놈은 끝까지 더럽게 구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오늘 민수가 친구를 하나 데리고 올 거예요. 그 아이에 대하여도 빠르게 알아봐 주세요.”
그렇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민 여사는 인상을 펴면서 최 실장에게 말했다.
“왔나 보네요. 나가보세요. 최 이사님. 그리고 오 팀장님 오시라고 전해 주시고요.”
최 이사가 고개를 숙이고 문을 나서고 민수와 형우가 이사장실에 들어왔다.
형우는 재단 이사장이란 분이 너무 젊어 마음속으로 매우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웃으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조형우라고 합니다.”
민 여사가 형우를 보니 어제 민수가 설명한 데로 호감 가는 인상에 목소리가 맑은 것이 사람이 솔직해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형우를 살피고 있는데 부름을 받은 오 팀장이 헐레벌떡 이사장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민 여사님”
급하게 들어온 오 팀장을 바라보면서 민 여사는 웃으면서 형우를 소개했다.
“이 친구가 새로 들어온 매니저예요. 아마 오 팀장 밑에서 배우게 될 거에요. 그러니 오 팀장이 잘 가르쳐 주세요”
민 여사의 말에 형우가 활짝 웃으면서 오 팀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 팀장은 형우를 보더니 웃으면서 악수를 하고 형우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민수 씨는 잠시 나 좀 봐.”
그 모습을 본 민수는 웃으면서 자신도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민 여사의 제지로 잠시 이사장실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오 팀장과 형우가 나가고 민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민 여사는 한숨을 쉬면서 민수에게 소희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민수의 얼굴이 조금씩 찌푸려졌다.
민 여사에게 소희에 대하여 몇 가지 부탁을 들은 민수는 한숨을 쉬면서 휴게실 쪽으로 이동했다.
“전생에 RD에 있을 때는 진소희는 별다른 문제 없이 연기자로 잘 살았지. 그렇다는 건 RD에서 확실히 잘 관리해 주었다는 거겠지? 다른 건 몰라도 RD의 그런 면은 배워야 하는 거군.”
그리고 소희가 어떤 배우가 되는지 아는 민수는 소희가 민 여사가 걱정하는 그런 약한 사람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환경이 어려웠다고, 소심해 보인다고 해서 사람이 약한 건 아니야. 그랬으면 진소희가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여배우로 살진 못했을 거야. 주위에서 적당히 잡아 줄 수만 있으면 별 문제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민수는 천천히 휴게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래도 소희 씨가 우리들하고 관계를 조금 개선할 필요는 있겠군. 설아 씨 하고의 오해도 좀 풀긴 해야겠고.
그리고 그런 것은 그냥 대화가 직방이지. 소희 씨도 이제 겨우 21살이고, 아직 때 묻지 않았으니 지금이 중요해.”
민수는 가능하면 빨리 자리를 한번 마련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휴게실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이미 데친 미역처럼 푹 퍼진 수연이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런 수연에게 민수가 천천히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