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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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가서 많은 학교에 포트폴리오를 제출했어요. 물론 크게 기대를 하지는 않았죠. 어쨌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느라 몇 년은 디자인을 쉬었으니까요.
그런데 한 교수님이 제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으셨다고 하더군요.]
[그럼 혹시 그분이…]
[네, 제 은인이자 은사이신 자닛 켈리슨 교수님이셨어요. 그리고 그분이 강력하게 밀어붙여서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 몸을 담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었어요. 수업은 수준이 높았고, 아무리 유학생이 많은 학교였어도 아시아 인에 대한 편견은 작지 않았으니까요.
그럴수록 전 더 이를 갈고 공부하고 또 공부했어요. 그렇게 몇 년 동안 공부에만 몰두하자 예전의 상처는 조금씩 흐려져 가고 있었어요. 그리고 저의 디자인 역시 조금씩 인정을 받기 시작했죠.
그리고 그때 한 친구를 만났어요. 제 디자인을 특히 마음에 들어 하던 친구였는데, 자신의 디자인은 느낌이 없다고 말하면서 자기는 차라리 디자이너보다는 경영자가 어울린다면서 훗날 자신이 디자인 스튜디오를 만들면 저보고 수석디자이너가 되어 달라고 하더군요.
전 그때 그 친구가 그냥 농담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래 알았다고 훗날 잘 부탁한다고 하고 넘어갔죠.
그리고 그 친구가 지금 유니의 CEO인 게리슨 이에요.]
윤희의 말에 MC는 흥미로운 얼굴이 되었다.
[정말 게리슨은 엉뚱한 친구였죠. 물론 사업수완이 좋기도 했고요.]
그리고 윤희는 게리슨과 유니를 처음 만들고 훗날 유니가 이름을 날리기까지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런 성공이 있기까지 윤희의 인생에는 오직 디자인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민수는 윤희에 인생에 대하여 조금의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유니의 성공은 저에게 큰 부와 명예를 동시에 가져다주게 되었어요.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윤희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하지만… 저의 주변에는 정작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전 임종을 지키지 못했어요.
남은 친지들도 저를 그냥 돈 많은 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부와 명예… 그것들이 절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어요.
어느 날 주변을 살펴본 저는… 큰 허무감에 따져 들었어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죠. 그리고 디자인마저도 손에 전혀 잡히지 않았어요.
전 게리슨에게 말해서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후배에게 넘겨주었어요. 그리고 무작정 그냥 한국으로 출발했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많은 것을 가졌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은 저 자신이 이해할 수가 없어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정신과였어요.
전 제가 그냥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의사에게 진단을 받게 되었죠 “도피성 몰입 증후군”…그리고 극심한 “우울증” 이었어요.]
민수는 윤희의 말에 매우 놀라게 되었다. 조 선생님이 자신과 같은 병을 앓고 있었다니.
조윤희 선생님과 대화 할 때마다 느껴졌던 이유를 알 수 없는 묘한 동질감은 비슷한 경험을 하고 같은 정신적 문제를 가진 사람끼리 느꼈던 어떤 교감 같은 것이었나보다.
[“도피성 몰입 증후군”이라면.. 어떤 병인지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쭈어봐도 될까요?]
[음…쉽게 이야기하자면 그냥 너무 힘들었던 자신의 과거에서 도망쳐서 그것을 잊기 위해서 어떤 일 한 가지에만 몰입하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것이 저에게는 디자인이었던 거고요.]
MC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자 윤희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님은 저에게 어떤 커뮤니티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을 권해 주셨어요.
그곳에는 저와 같은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누는 공간이었죠.
그리고 전 그곳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듣고 여러 가지 인생에 대하여 조금씩 알게 되었어요.
한 가지만을 생각하며 살아오던 저에게는 아주 생소한 경험이었죠.
그러다가 한 가지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되었어요. 어떤 한 아이의 이야기였죠.]
윤희의 말이 이어질수록 민수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졌다. 그리고 설마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점점불안한 기분에 휩싸였다.
[어떤 아이가 심장병에 걸려 죽을 상황이었어요. 그리고 치료를 위해서는 정말 많은 돈이 드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전 그냥 그 이야기를 흘려 넘겼어요. 저에게 그 이야기는 그냥 그런 일이 있구나 하는 정도의 감흥밖에 주지 못했던 거죠.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는 했지만, 선뜻 손을 내밀지는 못했어요. 그만큼 큰 돈 이였거든요.
그때 한 청년이 나서서 자신의 거의 전 재산을 다 들여서 결국 그 아이를 살렸어요. 그리고 전 매우 놀랐고 그 청년에게 묘한 이끌림을 느꼈어요.
왜냐하면… 그 청년은 저와 같은 “도피성 몰입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전 정말 돈이 많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타인에게 무감각했죠. 그래서 제가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청년은 저랑 달랐어요. 그가 다른 사람을 위해 쓴 그 돈은 그의 거의 전 재산이었어요. 심지어… 그 돈에는 자신의 부모님이 남긴 마지막 보험금까지 포함되어 있었죠.
전 저 자신을 돌아볼 수 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알게 되었죠. 왜 제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를… 전 그날 사고 이후로 저 자신만을 생각하는 그런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결심하게 되었어요. 나도 이제는 주변을 보면서 살아야겠구나. 그리고 가장 먼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되었어요.
먼저, 게리슨에게 이야기해서 “유니 스튜디오 코리아”를 세웠어요. 그리고 저처럼 상황이 어려운 상황의 디자이너 지망생을 받아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어요.
또, 미혼모 재단과 아동복지 재단에 주기적으로 기부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정말 억지로 잊고 살았던 남편과 아이의 봉안묘를 찾아갔죠.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계속 보고 있자니 눈에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무심한 저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고요.
아마… 제가 변하고자 마음먹지 않았다면 계속 이곳을 찾지 않았을 거로 생각하니…]
여기까지 말한 조윤희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살짝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MC는 그런 윤희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건네었다.
손수건을 받은 윤희가 눈물을 닦고 조금 진정이 되자 MC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그렇군요. 그럼 그 청년이 선생님에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계기가 되었군요.]
MC가 질문하자 윤희는 그때야 조금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렇네요. 아, 그 청년도 공인이니 누군지 말해도 상관은 없겠네요. 요즘 유명한 사람이거든요. 바로 “송포유” 에서 연기 중인 배우 정민수 씨에요. 저에게 새로운 인생의 길을 보여준 저의 멘토는.
그 당시에는 배우 지망생이였지만요.]
윤희가 말을 마치자 방청객들은 조금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윤희는 그 모습을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뒤이어 앞으로 윤희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고 그렇게 프로그램은 서서히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민수는 숨을 크게 쉬면서 근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태준은 그런 민수를 바라보면서 좋은 일인데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냐고 물었다.
“하… 혜민이 이야기가 안 나오기를 바랐는데…. 기자들이 혜민이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걱정하지마…. 정 배우. 내일 바로 혜민이의 대한 기사부터 나갈 거야. 이미 인터뷰 마쳤고. 먼저 기사가 크게 나가 버리면 사람들도 혜민이에 대한 관심을 서서히 거둘 거야.”
이미 혜민이의 인터뷰까지 끝났다는 소리에 민수는 조금 답답함을 느꼈다.
“하…. 나 모르게 그렇게까지 진행되었구나…. 나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민수의 말에 태준은 조금 인상을 쓰면서 말을 꺼냈다.
“그랬으면…. 당연히 정 배우가 반대했겠지. 안 그래?”
“그거야, 당연히…”
그런 민수의 태도에 태준은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했다.
“이봐. 정 배우. 왜 그렇게 자기 생각만 해? 지금이 상황에서 혜민이의 기분을 생각해 봤어? 과연 혜민이가 정 배우가 자신을 보호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을까?
혜민이가 어리다고 해도 자기 생각이 있어. 정 배우 기사가 나올 때마다 혜민이가 얼마나 안타까워 했는지 알아?
이거 혜민이가 직접 요청한 거야. 어떻게든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정 배우. 혜민이는 예전의 혼자 남아 있던 정 배우와는 달라. 든든한 오빠도 있고 할머니도 있어. 그리고 요즘 연예계에서 이 정도 이슈는 그냥 하루 이틀이면 흘러갈 이야기고.
그러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마.
혜민이에게 고맙다고 하고 그냥 받아들여.”
“하… 혜민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태준의 말에 민수는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생각해준 많은 사람들은 정말 고마웠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흘러가는 상황이 크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게 비록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일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또 한곳 민수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장소가 있었다.
적호사단 사단장실.
적호사단 사단장 백경호 소장은 사단 정훈장교가 자신 앞에 내려놓는 수백 장은 되어 보이는 서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뭔가?”
“제가 며칠 전 말씀 드렸던 예비역 하사에 대한 이야기 혹시 기억하십니까?”
정훈장교의 말에 사단장은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기억하네. 자네가 군 차원에서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난 거절했지.”
“여기 그에 대한 탄원서입니다. 정민수 예비역 하사가 근무했던 부대의 선 후임들이 그의 명예를 위하여 군 차원에서 움직여 달라는 탄원서입니다.
정확히 632장입니다. 같은 부대원부터 같이 훈련했던 병사들까지 모두 협조하여 탄원서를 작성해 주었습니다.”
이제 겨우 전역한 지 1년 남짓, 아직도 적호 부대의 부대원들은 민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비록 말수가 적고 사람들과 좀처럼 잘 어울리지 않아 같은 부대에 있을 때는 민수를 조금 경원시했었지만, 그래도 항상 자신의 임무에 철저하고 자신의 자리를 확실히 지켰던 그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비난받는 상황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게다가 전역한 지 얼마 안 되고 부대 내에 친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형우가 동기 선배들에게 계속 하소연하자 부대원들은 별말 없이 정훈 장교가 내미는 탄원서를 작성하게 된 것이다.
정훈장교의 말에 사단장은 크게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하… 며칠 조용하다 했더니 이런 걸 받고 다녔나? 대체 이유가 뭐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 말이야.”
사단장의 말에 정훈장교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서 있기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작게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했다.
“제게 딸이 있습니다. 그 딸은 저에게 항상 제가 군인으로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을 자랑스럽다고 이야기 했죠.”
“나도 그렇네. 내 딸도 나를 항상 자랑스러워하지.”
“그 딸이 며칠 전에 제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군에 입대할 때 정신검사나 심리검사를 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전 당연히 실시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랬더니 한참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저 기사는 거짓말로 전역병을 모함하고 있는 건데 왜 군에서는 저걸 말리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때 전 무슨 말로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
“그리고 마지막에 제 딸이 덧붙였습니다. 만약 아빠가 전역한 뒤에 저런 말을 들어도 군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해주지 않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기가 막히는군… 딸이 몇 살이지?”
“이제 8살입니다. 제 자랑입니다.”
“하하하… 정말 똑똑한 녀석이구나.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군이 그런 일에 일일이 나서봤자 좋은 소리도 못 들어. 그건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크게 움직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경고문 한 장이면 됩니다. 요즘 군에 대한 안 좋은 기사들이 주기적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군을 이용하는 언론사들에 경종을 한번 울릴 필요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그런 계기로 삼자?”
“네. 항상 요리조리 잘 피해 가면서 기사를 썼지만 이번에는 예외적으로 특정 부대의 이름을 기사에 언급하였습니다. 다시는 이런 기회는 없을 것입니다.”
정훈장교의 말에 사단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정을 내린 사단장은 바로 국방부 홍보처로 전화를 넣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홍보처와 이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한 장의 경고문이 “천지일보”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