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75화 (75/325)

#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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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 “송포유” 9화가 방영되는 날이 되었다.

민수와 일당들은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티브이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먼저 나온 이야기는 역시 며칠 앞으로 다가온 예능 촬영이었다.

처음 출연한 드라마로 바로 스타덤에 올랐던 수연과 태준은 인터뷰 경험은 많았지만 정작 예능 촬영을 해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태준은 예능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기껏해야 홍보 차원으로 한두 번 나갔다 온 게 촬영의 전부였고 그마저도 별다른 말 없이 병풍 역할만 하고 왔단다.

하긴 탁월한 외모를 가진 태준이었으니 꽃 병풍 역할은 아주 훌륭하게 해냈으리라.

“그래? 그래도 벌써 배우로서 5년이나 활동한 거잖아. 예능 경험이 제법 있을 줄 알았는데…”

“솔직히, 예능에 나가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워낙 산만하게 진행되는 프로그램이 대부분이었거든.

다행히 홍보 목적으로 나갈 때는 예능 경험이 많은 다른 배우들이 같이 나갔으니까 난 그냥 옆에서 웃어 주기만 해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

반면 수연은 아예 예능 출연 경험이 없었다.

“RD에서는 내 성격 아니까, 그런데 나가서 내가 하고 싶은 소리 다 할까 봐 그런지, 아니면 그냥 쌓아 놓은 이미지 망칠까 봐 그런지 아예 소속사 차원에서 커트하더라고.

뭐 나도 특별히 관심이 있던 건 아니니까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민수는 두 사람의 말에 새삼스레 두 사람이 데뷔부터 지금까지 예능 출연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꽃길만 걸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생의 자신은 소속사에서 나갈 때까지 예능에 출연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었다.

그리고 다른 무명배우가 예능에서 출연함으로 사람들에게 더욱 친근한 이미지를 쌓았고 그에 따라 연기의 기회를 보장받는 것을 보며 많이 속이 쓰렸었다.

전생에 예능에 나가 본 경험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지금 연기에만 집중하고 있어서인지 예능에 대한 생각은 전혀 못 하고 있었는데, 오늘 박 실장이 예능에 나갈 것이니 나가서 있는 그대로만 이야기하고 오라는 말에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그리고 특히 바로 다음 주에 방송될 거라는 소리에 박 실장을 다시 보게 되었다.

분명 다음 주에 방송 나갈 분량이 편집까지 끝났을 텐데, 이렇게 갑자기 촬영을 하고 바로 방송을 약속 받다니.

“그래도 나 때문에 팔자에 없는 예능에 나가게 됐네. 기분은 어때?”

민수의 말에 태준은 고개를 저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 아니 그전에 왜 그런 간단한 것을 생각 못 했을까 그런 생각 뿐이야. 내가 루머가 시작되는 시기에라도 방송에 나가서 촬영했으면 지금쯤은 벌써 방송을 탔을 거야.

그랬으면 지금처럼 곤란한 상황은 아니었을 텐데… 그냥 옆에서 발만 구르고 있었어. 후….”

“원래 드라마 촬영 마치고 스케줄이 엄청나게 많이 잡혀 있었잖아.

아마 생각했어도 방송 출연은 쉽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특히 그 시기에는 CF 촬영이 며칠 동안 줄줄이 있었으니 아마 지금쯤은 됐어야 출연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민수와 태준을 보며 설아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나저나 거기 MC들이 좀 독하던데요. 예능 경험도 없는 예능 베이비들이 과연 잘하고 올지 걱정이에요.”

“흥. 그냥 있는 그대로만 말해 주고 올 거야. 무슨 질문이 나올진 모르겠지만.”

민수는 수연이 있는 그대로 말하고 오겠다고 선언하자 오히려 더 불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시청자들이 자신이 알고 있던 수연의 이미지를 떠올리다가 진짜 수연의 모습을 보고 환상이 깨지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이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송포유” 9화는 세 주인공이 관계가 정립되는 회차였다.

위험한 행동을 하면서 최준을 구한 미주는 자신이 최준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위험한 행동을 한 자신에게 화를 내는 준성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그렇게 최준에 대한 자신의 속마음을 준성에게 먼저 말한 미주는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준성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왜 네 옆에 있는 사람이 나 일수는 없는 것이냐고 소리 없이 울면서 이야기하는 준성에게 미주는 쓸쓸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자신이 처음에는 준성에게 설레었던 시간도 있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너무 지나버렸고 이제는 거의 가족같이 느껴지는 준성을 남자로 볼 수 없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으로도 우리는 좋은 친구일 수밖에 없으니, 이제 자신 말고 더 좋은 사람 찾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

미주의 진실한 말에 준성은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일동은 미주와 준성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수연의 연기를 보며 매우 놀라게 되었다.

“와… 준성은 울고 있고 미주는 그냥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미주가 더 눈에 들어와요.”

“그러네. 원래 저런 구도면 준성에게 눈이 더 가야 정상인데… 수연이가 감정표현을 섬세하게 잘했네. 담담하게 말하는 중에 준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눈빛으로 너무 잘 표현한 거 같아.”

“맞아, 솔직히 저 장면은 나보다는 수연 선배의 연기가 더 돋보였지.”

모두가 자신을 칭찬하자 수연은 조금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애써 기분 좋은 기색을 숨겼다.

“흥…. 갑자기 왜 이래. 새삼스럽게. 나 이수연이야. 저 정도는 기본이라고.”

그리고 그런 수연의 반응을 보면서 태준은 피식 웃으면서 다시 드라마에 집중했다.

준성에게 자신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말한 미주는 이제 조금 편한 기분으로 미안한 표정의 최준을 맞이한다.

왜 그런 짓을 했냐고 추궁하는 최준에게 미주는 최준을 똑바로 보면서 내가 너를 좋아해서 그랬다고 돌발적으로 고백하고 최준은 너무 놀라 어버버 하면서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미주는 그런 최준의 뒷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고만 있었다.

이제 세 사람의 관계는 조금 변하였다. 미주와 최준은 조금씩 서로에게 더 다가가게 되었고 준성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하나둘씩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드라마 중에 한 씬, 두 씬 쌓여가면서 9화가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9화가 끝나자 설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민수에게 물었다.

“생각보다 삼각관계를 빨리 정리해 버렸네요?”

민수가 대답하려고 하는데 수연이 먼저 입을 열어 설아에게 대답했다.

“작가님이 원래 저 삼각관계를 드라마의 메인 포맷으로 두지는 않을 생각이셨데.

준성은 최준의 사랑의 라이벌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최 엔터와의 싸움에서 확실한 조력자가 될 거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더라.”

평소라면 그렇게 드라마가 끝나면 사람들이 떠나가는데 오늘은 계속 자리에서 떠나려는 기색이 없자 민수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민수를 보면서 태준은 웃으며 티브이를 가리켰다.

“오늘은 다음 것까지는 보고 갈 거야. 오늘 너에게 이걸 꼭 보게 하라고 하시더라고.”

태준이 가리킨 티브이에서는 “명사 초대석”이 방송되고 있었다.

“명사 초대석”은 이름 그대로 이 시대의 명사를 초대하여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하여 심도 있게 이야기하는 교양 프로그램이었다.

교양 프로그램 중에서는 시청률이 상당히 높았는데 그 이유는 이곳에 나오는 명사들은 그야말로 진짜 유명한 분들뿐이었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가감 없이 그 명사들의 인생에 대하여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민수는 이 영문 모를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화면 속에서는 MC가 등장하고 오늘의 명사가 누군지 방청객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오늘 모신 분은 국내 방송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분이군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유니(Yuni)의 전 수석 디자이너, 유니 조, 조윤희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MC에 소개에 맞추어 화면에는 윤희의 이력이 하나씩 자막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수십 개의 이력과 수상경력, 그리고 업적들이 다 지나가자 한 여성이 무대 뒤에서 걸어 나왔다.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단아한 중년 여성, 저분이 자신과 메시지로, 쪽지로 이야기를 나눈 조윤희 선생님이라는 사실에 민수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평소에 말씀하시는 단정한 어투와 문체가 저런 단아한 외모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유명하신 분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명사 초대석에 나오실 만큼 유명한 분이시라니…”

민수가 중얼거리자 수연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설아와 태준도 묘한 표정으로 민수를 바라보았다.

“너의 그 무지막지한 무심함은 도대체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야, 인터넷에 유니 조 라고 이름만 쳐도 나오는 기사가 뻥을 좀 보태면 한 오천 개는 되거든?”

수연의 타박에 민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민수도 그 사실을 알긴 했다.

요즘 세상에 유명한 사람들은 인터넷에 검색만 하면 어떤 사람인지 바로 나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민수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조 선생님의 지위, 그리고 주변 환경을 떠나 그냥 단순히 조 선생님 자체만을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민수에게 조윤희는 디자이너 조윤희가 아니라 그냥 자신에게 따듯한 말을 건네고 서로 고민을 이야기하는 “힐링 멘토”의 조윤희일 뿐이었다.

그러는 중에 화면 속 조윤희는 MC의 환대를 받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한국 시청자 여러분에게는 조금 생소한 분일 수도 있겠네요.]

말을 시작한 MC는 방청객들에게 조윤희가 어떤 사람인지 하나둘씩 소개하기 시작했고, 방청객들은 다들 놀란 얼굴이 되었다.

[미국에서 활동할 때도 패션 잡지나 매거진에서만 선생님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는데요. 한국에서는 그보다 더 언론과의 관계를 끊고 지내셨어요. 혹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디자이너는 자신의 옷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죠. 자신의 옷이 자신이 있다면 굳이 언론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시간에 하나의 디자인을 더 구상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죠. 솔직히 그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매우 피곤한 일이었거든요.

그리고 한국에서는 조금 다른데… 사실 한국에는 쉬려고 들어 온 거였고 활동을 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그러니 특별히 언론과 접촉할 이유가 전혀 없었죠.

아마 그 이유는 뒤에 차차 이야기 할 수 있겠지요.]

시간이 조금 지나고 조윤희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민수는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고 그 일당들도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예전에 전, 그냥 평범하게 디자이너를 꿈꾸던 소녀였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운명과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죠.

그렇게 아주 어린 나이에 그 사람의 아내가 되었고, 그렇게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어요.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은…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 중에 가장 평온했던 날들이었던 거 같아요. 하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죠.

아주 우연한 사고였어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일어난다는 교통사고였으니까요.

그렇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어요. 그리고 전 제정신이 아니었죠.

전 저만을 버리고 떠난 그 사람을 원망하기도 했고, 저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준 하늘을 저주하기도 했어요.

점점 미쳐가는 저를 보면서 부모님들은 차라리 유학을 하라고 권유하셨어요.

예전부터 꿈꾸던 디자이너의 꿈을 다시 꾸어보라고.

전 거절할 수 없었어요. 그때는 진짜…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거 같았으니까요.”

윤희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화면 속 방청객, 그리고 MC, 화면밖에 민수와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윤희의 입이 다시 열리고 그녀의 이야기가 계속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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