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73화 (73/325)

# 73

2

그 시간 RD 엔터에서는 강도 높은 내부 감사가 진행 중이었다.

중국의 미디어 그룹인 진룡 미디어 ‘친워우롱’ 회장의 3남이자, 진룡 미디어의 한국 사업부를 총괄하고 있는 “친시첸” 사장이 그 마지막 보고를 받기 위해 RD 엔터 대표실을 방문해 있었다.

마지막 보고 서류를 다 읽은 친시첸은 한숨을 쉬면서 정우철을 바라보았다. 정우철은 아무런 감정이 들어 있지 않은 친시첸의 눈을 바로 마주 보지 못한 채 살짝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후… 다 좋아. 쓸데없는 기사를 내기 위해서 생각 이상의 돈을 지출한 것도, 중요한 배우 하나를 재계약에서 잡지 못한 것, 그리고 직원들 관리를 잘못해서 직원들이 뒷돈을 챙기고 있던 것, 그 모든 것들이 사실 뭐 별거 아니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한 친시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고 정우철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미동도 하고 있지 않았다.

“만약 그 모든 것이 까발려져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만 않았으면 말이야. 도대체 내가 이 변두리 소국에서 왜 이러고 있다고 생각하지?

내가 너한테 돈을 벌어 오라 그랬나?

가수 하나 제대로 키우고, 배우 하나 제대로 키워. 그래서 본국에까지 이름을 날리게 되면 잘 포장해서 본국으로 데려가고, 그런 가수, 배우들을 하나하나 모아서 본국 내 미디어 그룹 간의 경쟁에서 승리한다.

이거, 내가 널 RD 엔터의 대표에 앉힐 때 내가 분명히 설명했을 텐데!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거지 같은 계약서는 또 뭐고. 내부 고발이라니. 이제 RD의 이미지는 어쩔 거야? 유망한 배우나 가수들이 RD 쪽으로 눈길 돌리기나 하겠어?

후… 좋아. 그래도 지금까지 판타즘이나 릴리걸즈 같은 아이돌 얘들을 육성한 공을 생각해서 특별히 다른 조처를 하진 않겠어.

대신, 대표 자리에서는 내려오도록 해. 그리고 자숙하고 있어. 나가봐.”

친시첸의 말이 끝나자 정우철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나섰다.

그리고 나가면서 대표실에 들어오고 있는 김익수 이사를 성난 눈으로 노려보고는 RD엔터를 떠났다.

김익수 이사는 그런 정우철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대표실 안으로 들어섰다.

친시첸은 김 이사가 들어오자 깊게 한숨을 쉬더니 조금 아쉬운 목소리로 김 이사를 질타했다.

“김 이사, 꼭 이런 식이어야 했나?”

조금 두서없는 말이었지만 김 이사는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송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차분하게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예상한 것보다 일이 너무 커졌습니다. 여러 번 연락을 드렸지만… 별다른 답을 받을 수 없어서…”

김 이사의 말에 진시첸의 인상이 급격하게 구겨졌다.

RD 엔터가 잘 돌아가나 감시하기 위하여 이사의 자리에 앉혀 놓은 김익수가 상황이 이렇게 커지는데도 보고를 하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더니 어느 놈들이 중간에서 보고를 차단했나 보다.

분명 장우철과 배를 맞추고 있는 간부들이 김익수의 보고를 의도적으로 빠뜨렸을 터, 초기에 진화할 수 있는 문제를 이렇게 커지게 만든 누군가에게 친시첸은 격한 분노를 느꼈다.

“배때기에 기름기가 잔뜩 낀 돼지 새끼들이 있었구먼… 하… 결국 김 이사에게 직통라인을 뚫어 놓지 않은 내 잘못이었군 그래.”

그리고 한숨을 크게 쉬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후… 많은 직원이 자리에서 쫓겨나서 어수선한데, 아직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장우철을 바로 처리하면, 많은 직원이 동요할 거야.

장우철이가 버림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나올 거고, 특히 가수 중에 정우철을 아직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당분간은 정우철을 그대로 둘 거야.

그리고 RD는 당분간 김 이사가 맡아.

정우철이 방식으로 가지 말고, 좀 더 제대로 육성할 방법을 찾아. 이 작은 시장에서 치고받고 싸워봤자 나오는 것도 없잖아. 좀 크게 봐.”

정우철을 그대로 둔다는 말에 김 이사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지만, 아무런 반박 없이 그냥 고개를 숙이기만 했다.

“그리고, 내부 단속부터 하고 이 일의 내막을 상사하게 조사해서 보고해. 아, 그리고 폭탄 터트린 애는 어떻게 처리했어?”

“아까운 사람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정리했습니다.”

진시첸은 김 이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RD는 김 이사에게 맡기겠어. 날 실망하게 하지 마.”

그렇게 말하고 진시첸은 대표실을 나섰다. 진시첸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 이사, 아니 김 대표는 나지막하게 한 숨을 쉬고는 대표석에 몸을 기댔다.

일은 대부분 김 대표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시야가 좁고 욕심이 많은 정우철은 결국 자멸의 길을 걸었고, 본사에서는 결국 자신에게 RD를 맡기게 되었다.

다만 박찬수 실장의 내부고발은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돌발 사태였다.

결국 그 때문에 일이 자기 생각보다 너무나 커져 버리게 되었다.

또한 울며 겨자 먹기로 능력 있는 박찬수 실장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고, 그를 따르는 직원들도 줄줄이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정우철… 김 대표는 진시첸이 정우철의 손을 완전히 놓아 버리고 배임 횡령으로 완전히 보내 버릴 길 바랬다.

하지만 그는 정우철에게 여지를 두었다. 어쩌면 지금 진시첸의 마음속에는 정우철과 자신을 저울질 하는 중 일지도 모르겠다.

그 점이 불만이었지만 김 대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진시첸이란 남자는 아랫사람이 토를 다는 것을 경멸하는 남자고, 자신의 결정을 절대 바꾸지 않는 남자였으니까.

“정우철이… 그냥 가만히 있진 않겠군…”

김 대표는 정우철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의 생각과 수법까지.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면 이를 갈고 있을지 훤히 보였다.

“어차피 움직일 테니… 그때 기회를 보는 수밖에.”

생각을 마친 김 대표는 자신을 따르는 직원들에게 몇 가지 자세한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잠시 정우철에 대한 생각을 접어뒀다.

이제는 어수선한 분위기의 RD 엔터를 추스를 시간이었다.

RD 엔터의 내부감사를 통해 정우철 대표가 해임되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사람들은 RD 의 신속한 조치에 놀람을 느꼈다.

그리고 판타즘의 팬들도 소속사의 사과와 멤버들에게 추가 정산이 이루어지자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하고 물러섰다.

그밖에 RD 엔터의 모든 연예인에게 추가정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RD 엔터에서 신속한 내부 감사 후 대표 해임, 그리고 대대적으로 추가 정산하는 모습에서 RD 엔터에 대한 신임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윤 엔터의 배우들과 윤 대표, 그리고 민 여사는 제1 연습실에 다 모였다. 오늘 박찬수가 데리고 오겠다는 배우를 소개받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민수와 태준 설아 그리고 수연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왜 저희까지 부르셨어요?”

“그러게, 저 녀석들… 뭐 보면 아나?”

윤 대표의 강권을 못 이겨 오랜만에 소속사를 찾은 강환은 민수 패거리들을 바라보면서 장난스럽게 비웃음을 날렸고, 그런 강환을 보면서 윤 대표는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사람이 많으면, 보는 시각도 다양해지겠지. 게다가 다 연기는 어느 정도 하는 사람들이니. 난 너희들이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발견해 줬으면 좋겠구나.”

윤 대표가 진지하게 배우들을 부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박찬수가 한 여성을 데리고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윤 엔터의 배우인 설아와 수연은 기본적으로 대단한 미인들이었다.

성격은 다소 다혈질이지만 단아한 자태와 전형적인 강아지상의 귀여운 얼굴, 그야말로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진 동안 미녀 수연, 탈아시아급 매혹적인 라인에 묘하게 친근한 고양이상, 즉 전형적인 개냥이상의 얼굴과 다양한 표정을 가진 설아.

하지만 지금 들어오고 있는 배우는 둘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여성이었다.

키는 160대 중반 정도였지만 쭉쭉 뻗은 팔다리에 모델처럼 늘씬한 체형 때문에 실제보다 살짝 더 커 보였고, 살짝 올라간 눈초리와 오뚝한 콧날, 그리고 날렵한 턱선을 포함한 얼굴은 혈통 좋은 고양이처럼 고고하고 도도해 보였다.

그렇게 도도한 외모와는 다르게 머뭇거리면서 걸어 들어온 여성은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당황하며 여러 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사방으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는 저 여성, 민수는 저 여성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아… 메소드의 귀재 진소희… RD 연습생 출신이었지…’

훗날 메소드의 귀재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배우 진소희는 RD의 연습생 출신이었다.

배우와 가수의 사이에서 제법 길게 방황했던 진소희는 조금 늦은 나이로 배우로 데뷔하게 되었다.

자신의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이 배우는 가장 성공적으로 중국에 진출한 배우 중 하나였는데 그 성공의 바탕에는 중국인 어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는 점과 중국 시장에 넓은 영역을 구축하고 있던 RD 엔터의 착실한 뒷받침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진소희에게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는데…

‘성격이 너무 내성적이야… 지나치게…’

진소희는 전형적으로 오해를 사는 타입이었다. 도도해 보이는 외모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녀가 까다롭고 신경질적이라고 짐작했다.

그런 외모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접근을 못 하는데 본인의 성격이 너무 내성적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붙이지 못하니, 결국 사람들과 소통이 적어지고 사람들은 건방지다거나, 혹은 까칠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성격 때문에 예능에도 나가지 못했으니, 사람들의 오해는 계속될 수밖에 없고…아마 훗날 경력이 한참 쌓이고 나서야 예능에서 제대로 속마음을 이야기해서 그런 오해들을 풀게 되었지’

아직도 확실히 그런 성격인지, 진소희는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연기 하나는 확실했는데… 지금은 과연…’

우선 매력적인 진소희의 외모에 조금 놀란 윤 대표는 그녀에게 몇 가지 연기를 지시했다.

하지만 그녀는 떨면서 조금 어색하게 대사를 몇 마디 내뱉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연기에 윤 대표가 실망하고 있을 때쯤 박찬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끼어들었다.

“저, 대표님. 소희는 그렇게 연기를 시키면 못합니다.”

찬수의 말에 윤 대표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소희를 쳐다보자 찬수는 소희에게 웃으면서 지시했다.

“소희야, 준비한 거 해봐.”

찬수의 말에 소희는 굳게 결심한 얼굴로 작게 숨을 여러 번 내쉬더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였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눈은 뜬 소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초롱초롱 맑은 눈망울이 습기로 가득 차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소희는 민수에게 다가왔다.

“그래… 왜냐고?

내가 너에게 손 내미는 게 이상하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지금의 최준이 그냥 예전의 미주 같아.

반가워하던 이 아무도 없는 외로운 얼간이 미주.

그래서 결국 다시 도망쳐 올 수밖에 없었던 나.

그때 내 옆에 응원해 주던 사람 하나라도 있었으면 나도 잘 이겨낼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아직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

그래서 난 그냥 최준 씨에게 그 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거야.

그냥.. 이겨낼 수 있고 .. 견뎌낼 수 있게 옆에서 힘을 주는 그런 사람이 말이야.

그럼 안 되는 거니?

그게.. 그렇게 못마땅해?”

소희가 선택하여 연습한 연기는 바로 “송포유”에서 수연이 연기하는 미주였다.

소희가 대사를 말하며 점점 다가오는 모습에 민수도 그 당시 연기하던 수연의 모습이 떠올라 조금 놀라게 되었다.

입장 할 때부터 조금 어두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했더니, 그게 긴장해서가 아니라 미주의 감정에 완전히 몸을 맡겨서 그랬나 보다.

‘벌써부터 메소드 스타일로 연기를 하는 건가…’

소희가 연기를 마치자 민수 패거리의 입에서는 자동으로 감탄이 튀어 나왔다.

그리고 윤 대표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

“즉흥 연기는 어색하고, 준비한 연기에 감정이 완벽하게 살아 있는 것을 보니… 메소드 스타일인가 보네요?”

윤 대표가 보기에 소희는 마치 처음의 민수 같이 모든 것이 어색했지만, 그 특유의 느낌이 살아 있었다. 이런 배우, 바로 윤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의 배우였다.

소희를 흡족하게 바라본 윤 대표는 바로 소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윤 엔터의 윤강철입니다. 꼭 계약하고 싶군요. 혹시 저희 소속사의 계약 조건에 대하여 들으셨습니까?”

소희는 윤강철의 손을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는 아주 작고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대답했다.

“네… 박 실장님이 말씀해 주셔서… 연기도 가르쳐 주신다고…”

소희의 말에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윤 대표는 강환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환아. 또 손님 하나 늘었어. 수고 좀 해줘라.”

“아이고, 저 형님 또 눈에 불이 들어오셨네, 네네, 제가 힘이 있나요. 시키는 대로 합죠. 네네”

강환이 너스레를 떨자 윤 대표는 웃으면서 찬수와 소희를 데리고 대표실로 올라가 계약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런데 연습실을 나가던 소희가 잠깐 수연에게 다가왔다.

수연에 앞으로 다가온 소희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다가와서는 고개를 넙죽 숙이면서 말을 꺼냈다.

“이수연 선배님. 뵙고 싶었습니다.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자기 할 말만 하고 후다닥 윤 대표를 따라 나가는 소희의 모습에 민수와 그 패거리들은 조금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 와중에 어깨가 잔뜩 올라간 수연은 태준에게 뻐기듯 자랑했다.

“내가 그래도 RD에서는 이 정도였어. 영광이라잖아.”

기가 한껏 산 수연의 모습에 태준은 조금 묘한 표정이 되었고 설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방금 연기도 미주였잖아요. 저 사람, 수연 언니 진짜 좋아 하나 보다.”

설아의 말에 어깨가 더 올라가 내려올 줄 모르는 수연을 보면서 민수는 그냥 실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