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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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씬 하나를 촬영하고 오늘 가장 중요한 장면의 촬영을 앞두고 민수는 감정을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씬 6-3-2 GO!”
피디의 사인이 떨어지자 미주와 최준 쪽부터 촬영이 시작되었다.
(씬 6-3-2)
미주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다시 손으로 마우스를 잡아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단발머리가 귓가를 덮고 있었다. 미주의 그런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최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귀 뒤쪽으로 넘겨 가지런히 정돈해 준다.
최준의 그런 행동에도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미주는 집중한 표정으로 작업에 몰두한다.
자신의 작업물을 보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미주의 눈동자,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과 꾸미지 않았지만, 잡티 하나 없이 뽀얀 미주의 뺨.
그런 미주의 얼굴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며 최준은 작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렇게 얼마 동안 미주만 바라보며 있었을까.
미주가 활짝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순간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최준과 눈이 마주친다.
당황한 미주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고 미주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애써 말을 돌리며 모니터를 가리켰다.
“자! 작업이 끝났어요. 어때요? 최준 씨와 맴버들이 쓸 복면이에요. 가면은 움직이기가 불편하니까 아예 편하게 복면으로 제작했어요.”
미주가 신나는 목소리로 설명하고 있지만, 최준의 눈은 미주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예쁘네…”
최준이 툭 던지듯이 말을 꺼내자 미주는 신나서 말을 받았다.
“그렇죠? 예쁘죠? 헤헤”
“그거 말고, 너.”
최준의 말에 미주의 동작이 멈칫한다.
둘 사이의 분위기는 점점 더 어색해졌다.
그런 분위기 안에서 미주가 부끄러운 듯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한다.
“뭐..뭐에요. 이걸 봐야죠.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예요? 어..어쨌든.. 복면은 이걸로 제작될 거에요.”
미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뻣뻣한 동작으로 서둘러 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최준은 묘하게 웃으며 그런 미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카메라가 이동하며 근처에 있는 준성을 비추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준성의 눈빛이 애처롭다.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는 것일까? 묘하게 몽롱한 눈빛의 준성은..
“NG”
피디에 사인에 몰입에 들어가던 민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몰입에서 벗어난 민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피디를 바라보았다.
피디는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민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민수씨.. 뭐라고 할까.. 슬픔이 너무 진하게 느껴져요. 슬픔 보다는 애틋함으로, 지금은 완전히 떠난 연인을 보는 거 같았어요.
평소에 하던 느낌대로 그렇게 해주세요.
하하하.. 제 요구가 너무 과한 거 같아서 미안합니다. 지금까지 너무 잘해주셔서…”
준성이 미주를 바라보는 눈빛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나 보다. 세심하게 지적하는 피디를 보면서 민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피디와 스텝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럼 민수 씨 파트부터 이어서 갑니다. 자 준비되셨죠. GO”
민수는 최대한 집중하며 예전의 자신이 표현한 애틋함을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준성의 눈이 멀어져 가는 미주를 향하고 눈빛은 아련해진다. 그렇게 애틋하게 미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준성은 작게 한숨 지으며 뒤로 돌았다.
순간 그런 준성의 팔을 최준이 잡아챘다.
“역시 맞았네…”
최준은 준성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하도 스토커들에게 시달려서 누가 내 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익숙하거든.
그런데 소속사 안에서 자꾸 누가 내 쪽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보아하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거 같긴 하지만…
미주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는 이유가 뭐지?”
최준의 말에 준성의 얼굴은 예의 그 냉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최준에게 말한다.
“그건 최준 씨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죠. 최준 씨는 자신에 일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군요.
다른 사람의 일에는 관심 끄고.”
냉정하게 말하며 준성은 뒤로 돌아 자신의 작업실로 이동했다.
최준은 그런 준성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OK!”
피디의 사인에 민수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주위 스텝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서둘러 자신의 대기실로 이동했다.
대기실에 도착한 민수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이마에 손을 얹었다.
“후….”
오늘 촬영 중에 민수는 묘하게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유는 자신의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 그래도 내가 정신적으로는 어른스럽다고 믿었는데 말이야…”
RD 쪽에서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신경 쓰지 않고 연기에 집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공격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시작될 조짐만 느껴졌음에도 이렇게 흔들리다니.
“내가 불안해하고 있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엇이 그리 두려운 걸까..”
민수의 기억 속에서 문득 전생에 자신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당시에는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참 외롭고 괴로운 삶이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두려운 것이 있다면 전생의 자신처럼 다시 그렇게 사는 것이리라.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수연이 대기실을 찾아왔다.
“요… 건방진 민수군. 처음이네, NG 내는 건…”
묘하게 흥분한듯한 표정의 수연을 바라보며 민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온갖 건방을 다 떨더니, 너도 아직 햇병아리가 맞긴 하구나.
이제 조금 사람같이 보이네. 난 요즘 네가 그냥 연기하는 기계인 줄?
하긴, 얘가 너무 나이 같지 않게 차분하다 했지.
이만큼 촬영하면서 NG도 안내는 건 사람도 아니지, 암암.
인제 보니 제 나이처럼 보이네.
야, 너무 걱정하지마. 선생님이 어떻게 해주시겠지.”
민수는 수연이 말하는 내용은 은근히 핀잔 조인데, 목소리는 너무 해맑아서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짧은 머리에 자신보다 더 어려 보이는 외모를 한 주제에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달래자 차라리 그냥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돼서 오신 거예요? 촬영 이후 처음으로 선배가 진짜 선배처럼 보이네요.”
수연의 모습을 보고 조금 기분이 나아진 민수는 평소와 같은 어투로 수연을 슬쩍 까 내리자, 수연은 흥하고 고개를 돌리며 투덜거렸다.
“하여간, 저 건방은.. 흥, 어쨌든 정신이 좀 든 것 같으니 이제 간다? 정신 잘 챙겨.”
민수는 자신이 걱정되어 찾아온 수연이 고마워 작게 미소 지었다.
그 뒤에 몇 개의 씬을 더 찍고 오늘의 촬영이 끝이 났다.
집중력이 다소 흐트러진 민수는 최선을 다해 정신을 다잡았고 다행히 이후에는 별다른 NG 없이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속사로 돌아온 민수는 자신을 기다리던 윤 대표와 대면하게 되었다.
윤 대표는 얼굴은 평소에 부드럽고 다정한 얼굴이 아니라 조금 표정이 굳어 있었고 한편으로는 조금 초조해 보였다.
조금 머뭇거리고 있는 윤 대표를 바라보면서 민수는 그가 지금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윤 대표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언론을 통하여 너의 이야기가 흘러나가고 있단다.”
“네, 들어서 알고 있어요”
민수는 오늘 있었던 리온과의 일이나 수연의 말을 천천히 윤 대표에게 설명했다.
윤 대표는 민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구나.
이제 앞으로 너에 대한 좋지 않은 기사가 나오기 시작할 거다.
대량으로 뿌려질 기사를 당장 막을 방법은 없구나.”
윤 대표의 설명에 민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도 움직일 것이고 그 기간도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잠시 말을 멈춘 윤 대표는 손을 뻗어 민수의 손을 잡았다.
“민수야, 난 네가 좋은 배우가 될 재목이라고 확신한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흔들리지 말아라.
그냥 너 자신을 믿고, 그리고 나를 믿어다오.”
단호한 목소리의 윤 대표를 바라보며 민수는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이 싸움에서 우리는 무조건 이길 것이고, 넌 날개를 펴게 될 거다.
하지만 분명 괴로운 시간이 될 거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기도 할 테고, 널 알지도 못하는, 그리고 네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 없이 너를 비난하고 모욕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같이 이겨 나가자 꾸나. 넌 혼자가 아니야. 많은 사람이 널 위해 움직이고 있단다.”
진중한 윤 대표의 말에 민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가 아니라는 윤 대표의 말이 민수의 가슴속 한 부분을 작게 울리고 지나갔다.
윤 대표의 말에 걱정하지 말라고 웃으며 안심시킨 민수는 차분한 마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이동했다.
“응?”
하지만 자신의 방은 이미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
이미 맥주 캔을 따고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는 수연과 설아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태준이 점거한 지 오래였다.
기막힌 모습에 어이없는 표정의 민수가 방으로 들어오자 설아가 상큼하게 웃으며 민수를 반겨 주었다.
“오~여기 방 주인님이 오셨습니다. 박수박수!”
너스레를 떨며 손뼉을 치는 설아를 보며 민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태준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 민수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버린 태준은 크게 웃으며 민수에게 맥주 캔 하나를 건네었다.
“그래, 정 배우. 쟤 저거 감당 안 된다니까. 킥킥.. 게다가 저 녀석 이젠 나보다 힘도 세졌어. 손은 또 얼마나 매운지…”
신나서 설아를 흉보는 태준의 모습에 얼굴이 붉어지는 설아, 그리고 그런 태준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차고 있는 수연, 다시 그런 수연에게 비꼬며 말하는 태준.
이 정겨운 모습을 바라보며 민수는 진짜 이젠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건 좋지만… 어쨌든 이 아수라장은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 거 같은데..’
민수까지 가세하여 잠시 소란이 일고, 그렇게 신나게 떠든 네 명은 이제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방안에는 다소 차분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맥주를 한 모금 삼킨 태준이 입을 열었다.
“정 배우, RD에서 작업이 들어온다며? 벌써 정 배우가 이 정도로 받다니 대단해..”
민수는 태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고, 태준은 그 모습에 실소를 지으며 민수에게 계속 이어서 말하였다.
“생각해봐, 그런 작업이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그렇게 작업을 해서 널 흔들려고 하는 거야. 아, 물론 걔들이 무슨 짓을 해도 우리 정 배우가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하여간 정 배우가 가치 없는 배우라면 상대편에서도 그렇게 많은 수고를 들여서 작업에 들어가지 않겠지. 안 그래? 지금 넌 그만큼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야.”
태준의 설명에 민수는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라 조금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무슨 근거로 자신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윤 배우. 무슨 자신감으로 내가 흔들리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거야?”
태준은 민수의 물음에 어깨에 손을 얹고 작게 속삭였다.
“에이.. 선수끼리 이러지 말자고, 정 배우. 너처럼 생각이 확고한 녀석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 흔들릴 리가 있나,그리고 주변을 봐.
여기 너에게 필요한 것들이 다 있잖아.
좋은 선생님과 좋은 동료, 그리고 좋은 친구와… 예쁜 여자! 이런 곳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데 그런 작은 일에 흔들려서 쓰겠어?"
태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민수는 마지막으로 태준이 설아를 가리키자 쓴웃음을 지으며 태준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이봐, 친구. 그렇게 은근슬쩍 이상한 단어 끼워 넣을래? 왠지 짐 덩이를 넘겨받는 기분이거든?”
민수의 반응에 태준은 웃음을 터트렸고 설아는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고는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어쨌든 태준의 말은 대부분 옳았다.
이곳은 민수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에게는 과분한 곳이었으니까.
'윤 배우, 넌 나를 너무 과대평가 하고 있는 거 아니냐?'
민수가 흔들린 건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였다.
이렇게 대중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하고, 결국 예전처럼 그렇게 외롭게 죽어 갈거라는 공포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았다.
'확실히... 이번일이 있기 전까지는 내가 확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아니었다. 자신도 그냥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힘들고 두려울 때는 의지할 곳을 찾는 보통 사람,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조금 후련한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태준의 말에 민수는 자신을 조금 믿어 보기로 했다. 자신이 가치가 있는 배우라는 말, 그 말이 민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민수는 여러 사람의 위로를 받으며 의지를 굳게 다질 수 있었다. 이제 다시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민수는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윤 엔터의 홍보팀에서 같이 기사를 살펴보던 민 여사의 눈초리가 매섭게 빛났다.
“이제.. 시작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