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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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가 촬영에 집중하고 있던 그 시간.
민 여사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인상이 다소 험악하고 다부진 체격의 남성 4명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단조로운 색상의 롱 원피스를 입고 허리를 꼿꼿이 편 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민 여사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단정한 모습이었다.
다만 단호하고 굳건한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만이 민 여사의 생각을 잘 드러낼 뿐이었다.
“어제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이제 우리도 조금씩 움직여야 할 때가 왔어요.
우선 최 이사님, 내부부터 확실히 단속하세요. 먼저 각 배우님의 현재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주시고요.
그 다음으로 윤 엔터 내부에 상주하는 직원들 신상부터 다시 확실히 조사해 주세요.
민 여사의 말이 끝나자 정면에 다소 짧은 머리에 터질 듯 두꺼운 팔뚝을 가진, 눈꺼풀 위에 미묘한 상처가 길게 난 남자가 살짝 고개를 숙인다.
“네, 아가씨”
대답을 들은 민 여사의 눈은 최 이사 옆에 앉은 날렵해 보이는 체형에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박 이사에게 향하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민 여사의 눈빛을 보며 박 이사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박 이사님은 지금 가장 급한 일을 해 주셔야 할 거 같아요. RD의 정우철 대표와 그 측근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는 일이에요.
정우철 대표의 행동은 물론 이거니와 그와 직속으로 연통하는 직원들, 그리고 오른팔 격인 김인수 이사를 중점으로 살펴보세요.
어쩌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 가능하면 최근의 행적부터 조사 할 수 있는데 까지 조사해 보세요”
민 여사가 지시를 마치자 박 이사는 살짝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그리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민 여사는 찻잔으로 손을 뻗어 따듯한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반대편에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서울 한복판을 걸어가면 비슷한 사람 두서너 명은 볼 거 같은 평범한 인상의 남자였다.
대한민국 평균 신장에 가까운 키, 특징 없는 눈매, 밋밋한 인상, 아마 어떤 사람이라도 이 남자를 보고 바로 한 번에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런 남자를 바라보며 민 여사는 부드럽지만 나직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조 이사님이 하실 일이 조금 까다로울 것 같군요.
조 이사님은 RD 쪽 내부를 파보세요. 조금의 꼬투리라도 잡을 수 있는 일이면 어떤 것이라도 좋아요.
문제가 될만한 것 하나하나 모두 파악해 오세요.”
민 여사가 말을 마치자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조 이사가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평범한 이 남자는 목소리조차 특징이 없었다. 조 이사는 길가에서 한두 번은 들어 봤을 목소리로 민 여사에게 대답했다.
“생각보다 많은 인력과 자금이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조 이사의 말에 민 여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예요. 자금은 아끼지 마세요. 인력도 쓸 수 있는 인력을 다 동원해도 좋아요. 일만 확실하게 처리해 주세요”
민 여사의 단호한 말에 조 이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아가씨.”
자신이 할 말을 모두 마친 민 여사는 부드러운 눈으로 세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한동안 단순한 일만 하면서 좀이 쑤셨을 거예요. 이제 재미있는 일을 좀 해보겠네요. 사정이 긴박하게 흘러갈 수 있어요. 가능하면 빠르게 움직여 주세요”
민 여사의 말에 고개를 숙은 세 남자가 일어나서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밖으로 나갔다.
민 여사는 그런 남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쉰 후 다시 찻잔을 들어 다시 목을 축였다.
그런 민 여사를 바라보며 남은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테 없는 안경을 쓰고 단정하게 정돈된 머리에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은 이 남자는 민 여사를 예전부터 모셔오던 한중경비서였다.
“이사장님, RD랑 적대 관계로 돌아선다면 우리가 RD를 완전히 무너뜨리든지 아니면 RD를 인수할 것이 아니라면 별다른 실익이 없습니다.”
한 비서의 말에 민 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 끝으로 찻잔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게다가 RD가 중국의 진룡 미디어 쪽 계열사이니만큼 진룡하고의 관계도 고려하셔야 할 테고요. 진룡하고 척을 지는 건 배우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될 겁니다.”
한 비서의 우려 섞인 직언을 들은 민 여사는 다시 차를 한 모금을 입에 머금는다. 천천히 음미하듯이 입을 적신 민 여사는 찻물을 목으로 넘기고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진룡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예상하기 힘들지. 완전히 척을 질 수도 있고, 어쩌면 어느 정도의 선에서 타협을 볼 수도 있고.
하지만 세상에 어떤 사람도 자신이 확실히 제압할 수 있는 상대랑 타협하진 않아.
그건 그냥 잡아먹을 대상이지, 타협할 대상이 아니니까.
지금 RD는 우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어. 그럴 때는 알려줘야지. 우리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전쟁이냐, 타협이냐. 그건 그 뒤에 이야기일 뿐이야.”
민 여사의 목소리에 한기가 서리자 한 비서는 마름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잠깐 동안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 여사는 피식하고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아까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닌 평소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 비서에게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런 거 다 그냥 핑계일 뿐이야…
사실 난 그냥 정우철이가 재수가 없어.”
민 여사의 말에 한 비서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딴 수작으로 수연이 데려간 것도 마음에 안 들고, 데려가서는 거지같이 키운 건 더 마음에 안 들어.
그런데 진짜 마음에 안 드는 건 그딴 놈 때문에 우리 달링이 몇 년이나 괴로워했었다는 거야.”
민 여사의 말이 이어질수록 한 비서는 묘한 눈으로 민 여사를 바라보았다.
“진룡 산하라 RD를 무너뜨릴 수도, 인수할 수도 없지만 적어도 정우철을 날려 버릴 순 있어.
그놈은 그냥 진룡으로부터 위임받은 대표이사에 불과하니까 말이야.
5년간 괴로워하는 달링을 보면서 사실 난 많이 참았어.
내가 나서서 움직이면 자존심 상해 할 것이 불 보듯 뻔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참을 필요가 없지. 그이가 나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했으니까 말이야.”
결국 민 여사가 행동하는 이유가 남편 때문에 기분이 나빠서라는 결론에 도달하자 한 비서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래도 일이 아주 커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우철.. 넌…아주.. 그냥 부숴버리겠어”
그러는 동안에도 민 여사는 5년간 쌓인 정우철에 대한 분노를 불태웠다.
민수가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자신의 방.
민수의 방에는 어제처럼 설아와 태준이 민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처럼 맥주를 들고 민수를 반겨주는 두 사람의 모습에 민수는 기가 막혀 한숨을 쉬었다.
“아니, 이젠 완전히 내 방이 아지트가 되어버렸어. 윤 배우 자꾸 이럴 거야?”
민수가 배시시 웃는 설아에게 차마 뭐라고 하지 못하고 옆에서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준만 애꿎게 타박하자 태준은 억울한 표정으로 한마디 하였다.
“내가 무슨 힘이 있나. 설아가 가자면 가야지…”
태준의 말에 민수는 작게 한숨 지었다.
태준의 한마디로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설아의 강짜에 태준은 그냥 끌려 올 수밖에 없었으리라.
반면 설아는 민수의 말에 볼을 풍선처럼 부풀리고는 민수에게 투정을 부렸다.
“어차피 혼자서 외롭게 볼 거, 다 같이 보면 좋잖아요”
그렇게 설아가 말하는 순간 민수의 방문이 열리면서 가벼운 복장의 수연이 방으로 들어왔다.
가볍게 화장만 지우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바로 온 듯한 수연은 방안을 슬쩍 둘러 보더니 민수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니? 넌. 방이 변한 게 거의 없네. 아무리 남자라도 그렇지 좀 꾸미고 살아라. 그리고 번호도 그냥 그대로고.”
수연이 등장하자 설아는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 수연을 감싸 안았다.
수연은 이제는 자신보다 더 커져 버린 설아가 자신에게 달려들자 버거운 듯 살짝 밀려났지만, 가까스로 겨우 몸을 지탱했다.
“어후.. 이 녀석아. 그렇게 튀어나오면 어떡하니?”
부드럽게 핀잔 주는 수연을 설아는 마냥 웃으며 반겨 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민수는 두 미녀의 모습이 참 보기 좋기는 했지만 점점 자신의 방이 공공재로 변하는 느낌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선배는 웬일이에요? 여기까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민수가 묻자 설아는 민수를 날카롭게 째려보았고 수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민수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아의 머리만 계속 쓰다듬어 주었다.
“제가 불렀어요. 언니도 분명 혼자 외롭게 계실 게 분명하니까요.
무슨 남자들이 어쩜 이렇게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을까?”
설아의 설명에 애당초 혼자 있을 계획이었던 민수는 뭐라고 대꾸하려고 했지만, 그냥 포기하는 것이 편하다는 생각에 공허한 얼굴로 자신 앞에 놓여있던 맥주 캔을 따서 한 모금 길게 들이켰다.
설아의 말은 묘한 억지이긴 했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수연과 우리들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빠르게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자리를 자주 가지는 것이 현명하긴 할 테니 말이다.
아마 설아가 억지를 부리며 수연을 초대한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맥주만 들이켜는 민수 옆에서 태준은 그런 설아와 수연의 모습을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수연은 태준이 자신을 바라보는 듯 하자 태준의 시선을 피하는 듯 슬쩍 몸을 피해 설아의 뒤로 숨었다.
설아는 수연이 자신의 뒤로 몸을 숨기자 허리를 펴고 수연을 지키는 파수 견처럼 ‘쓱쓱’하고 고개를 흔들며 주변을 살폈다.
그런 일련의 행동들을 바라보며 민수는 그냥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냐.. 대체 이 어색함은…’
민수는 이런 어색함이 되도록 빨리 해결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렇게 모였고 시간이 되었으니 다 같이 “송포유” 2화나 시청하죠.”
다 같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수는 웃으며 티브이를 켜고 채널을 SBC로 돌렸다.
2화의 내용은 간단하게 흘러갔다.
준성과 앨범을 제작하지 못하게 된 최준은 외부 프로듀서의 힘을 빌려 엘범을 제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소속사의 힘을 전혀 밀리지 않으려고 하면서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는 최준을 보며 미주는 안타까운 마음에 끝까지 최준을 따라다닌다.
최준은 자신을 끝까지 따라다니는 미주의 모습에 귀찮기도 하지만 조금씩 묘한 감정과 믿음이 싹트는 것을 느끼며 당황한다.
한편 최엔터의 최 대표는 최준이 엘범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최준을 방해할 준비를 단단히 한다. 블랙 미스트 팬클럽을 선동하여 최준의 첫 방송을 망칠 계획을 세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최준의 컴백 날짜에 맞춰 블랙 미스트의 미니 엘범 발매 계획까지 세운다.
그리고 방송가 곳곳에 최준에 대한 루머를 퍼트렸다.
드디어 최준의 엘범이 발매되고 노래를 들은 최 대표는 노래의 수준이 너무 낮아 안심하게 되고 최준은 첫 방송 리허설에서 최 대표의 사주를 받은 블랙 미스트 팬들에게 달걀을 맡고, 본방송에서는 침묵시위를 당하며 쓸쓸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결국 최준의 엘범이 대 실패로 돌아가자 최 대표는 크게 웃으며 최준을 기억에서 지운다.
한편, 준성은 최준이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자신의 일에만 집중한다. 게다가 진주까지 최준이 망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최준의 실패에 큰 손해를 보게 된 정 대표만 절망하는 가운데 최준은 자신의 집에 칩거하게 된다.
자신의 방에서 절망하고 있는 최준의 모습으로 드라마가 마치자 설아는 얼굴 가득 호기심과 궁금증을 담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는 설아의 진지한 표정이 조금 우스웠던 민수는 작게 웃으며 설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2화가 내용 자체로 보면 엄청 진지하고 다소 무거운 내용인데 왜 그런 느낌이 별로 안 들죠?”
설아의 질문에 민수는 웃으며 대답하려 했지만, 그보다 태준의 대답이 좀 더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