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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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민수는 자신의 차에 몸을 실었다.
나름대로 원하는 바를 얻은 만남이었지만, 민수는 그저 뒷맛이 씁쓸하기만 했다.
‘하.. 당당하고 새침하게 말하던 수연 선배가 그렇게 순수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었다니….
배우라는 사람들이 감정이란 것 자체를 자신의 무기로 다루다 보니 감성이 예민하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도 민감하다더니 그것이 저런 식으로도 나타나는구나’
미움 받고 있는 것을 인정하기 두려워 오 년간 찾지 못했다니
민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긴 했다.
그런 수연과 자신의 본질적인 차이가 민수로서는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결국, 난 그냥 세상 풍파 다 겪다가 데뷔한 50대 배우랑 마찬가지란 것이군.
그래서 감정 연기도 자신의 겪은 경험을 토대로 나오는 거고.
그러니 사랑 연기가 그렇게 늘지를 않지.
반면 수연 선배 같은 본 투 비 (Born to be) 배우 같은 사람들은 저렇게 기본적으로 풍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저런 감성이 윤 대표님이 보고 한 번에 반했다는 그런 감성이겠지’
어쨌든 수연 선배도 영리한 사람이니 자신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는 생각한 민수는 이제 그들의 관계에서 자신이 할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 대표님은 진짜…’
수연의 입장을 듣고 보니 대표님의 입장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누가 봐도 배신이라 생각될 만한 흐름 속에서 대표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분명 민 여사님은 사정을 알아보고(비록 뒷조사이긴 했지만) 수연이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대표님이 아시게 되었다고 민수에게 말했었다.
하지만 진짜 그랬을까?
민수는 만약 자신이 윤 대표의 입장이었다면 사정을 듣고도 바로 수연이 배신하지 않은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봐 왔으니까.
친척인 배우의 모든 것을 강탈하고 도주한 매니저.
친하게 지내는 연예인의 전 재산을 사기 치고 사라진 친구.
심지어 딸의 재산을 처분하고 바람나서 도망친 친모까지.
민수가 기억하고 있는 기가 막힌 사건들만 해도 몇 가지가 더 있다.
아마 윤 대표가 보고 들은 일들은 그것보다 적어도 수 배는 많으리라.
저런 모든 관계가 분명 신뢰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아마 윤 대표는 수연의 이적을 듣고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떠 올랐을 것이다.
당황함, 배신감, 걱정스러움.
그리고 그 후 사정을 듣고 나서는 당연히 안심했겠지.
내가 정을 준 이 아이가 사정이 있어서 떠났구나.
이 아이가 나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 금액이 과연 우리 소속사를 떠나야 할 만큼 치명적인 금액인가.
일반적으로 큰 금액이지만 체감적으로는 크지 않은 돈에 윤 대표는 고개를 갸웃거렸겠지.
그러면서 의심이란 놈이 고개를 들었을 테고.
원래 이 단계에서 확인을 했어야 했다. 만약 민수였으면 확인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윤 대표가 선택한 것은 회피였다.
그냥 새로운 소속사에서 잘 적응하고 좋은 배우가 되기를 바라겠다.
새로운 소속사에서 적응하는 것을 방해하면 안 된다.
정말 허울 좋은 핑계였다.
하지만 그 기저에 묻혀있던 진심은 아마도...
‘두려움..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윤 대표 정도 되는 사람은 아마 수연을 만나보기만 했어도 그녀의 진심을 파악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민수도 수연 정도의 사람은 만나만 봐도 진심을 짐작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처음 보자마자 반해 버린 재능, 그래서 소속사를 설립하고자 마음을 먹게 만든 제자.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나가며 가족처럼 되어 버린 제자.
그렇게 정을 주며 맏딸처럼 생각하던 아이가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에 돈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 때.
진심을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심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만약 진짜 돈 때문에 떠난 거라면? 지금까지 보아온 그 아이의 모습은 그냥 다 가식이었던 거라면? 그냥 그 아이는 나를 비즈니스 파트너라고만 생각하고 있다면?
아마 윤 대표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문제는 윤 대표님이 수연 선배를 너무나도 아꼈다는 것. 정을 너무 많이 주었다는 것이겠지.
수연 선배가 배신했다는 것을 알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그래서 자꾸 확인을 미루고 결국 지금 같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민 여사도 이것은 몰랐으리라.
자신의 남편이 비즈니스 관계에 대하여는 정통한 사람이라도.
정작 인간관계를 이어가는 데는 다소 서툰 사람이란 것을.
결국 일명 “이수연 사태”라고 불릴 만한 저 문제는 서로에 대한 과한 정을 가진 두 사제 간의 오해가 해결되지 않아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두려워만 하고 있던 사태라고 간략하게 정의 할 수 있었다.
민수가 한 일은 그냥 벽을 제거하고 서로를 마주 보게 해 준 것뿐이고.
민수는 그리고 이제 수연이 소속사로 들어오게 되면 RD 쪽에서 무슨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민수의 그냥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대표님이 알아서 하실 문제이지. 자 내가 할 몫은 이걸로 끝.”
그리고 민수는 이제 오늘 첫 방송만을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그 시각 RD 엔터 대표실로 올라가고 있던 김익수 이사에게 그가 다루는 정보원 하나가 급하게 다가왔다.
“김 이사님, 조사를 명하신 것들 여기 있습니다.”
남자는 김 이사에게 서류철 하나를 내밀었다.
“하지만.. 정민수 씨의 거주지 파악은 실패하였습니다.”
남자의 말에 김 이사는 의아함을 느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설명을 해보세요”
남자는 김 이사에게 자신이 조사한 바를 자세히 설명했다.
“우선 정민수 씨가 기존에 머물 던 숙소는 찾아냈습니다.
전역 후부터 계속 머물던 집이고 그 방에 장기적으로 머무는 것을 숙소의 주인을 통하여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정민수 씨가 며칠 동안 숙소에 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정민수 씨가 그 집에 살고 있다는 확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민수 씨의 밴이 소속사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것만 확인 가능하고 그 이후 행적을 알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소속사가 속한 건물 자체가 보안이 너무 뛰어나 접근이 힘듭니다.”
남자의 보고에 김 이사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함구하세요.”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떠나자 김 이사의 입가에 맺혀있던 미소가 사라지고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만이 남았다.
그리고 김 이사는 서둘러 대표실로 이동했다.
RD엔 터의 대표인 정우철 대표의 대표실.
정 대표는 김 이사의 보고를 듣고 다음 계획을 지시했다.
“흥, 어차피 20대 애송이에 불과하지. 첫 화가 방송되고 관심이 쏠리기 시작하면 바로 계획 실행해.
여기저기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필시 당황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리고 그런 찌라시 루머들의 문제에는 어떤 소속사도 명확한 해답을 내려주지 못하지.
그러면 당연히 배우는 심리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어.
우린 그냥 흔들린 배우 하나 주워오면 되는 거야.
혹시 효과가 미비할 경우에는 바로 2타 준비하고.”
정 대표의 지시에 김 이사는 고개를 숙여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저... 대표님, 아무래도 이수연은 윤 엔터로 갈 거 같습니다.”
김 이사의 보고에 정 대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허, 결국 자기가 떠난 둥지를 다시 찾아가겠다고? 이 바닥에서 그게 그리 쉬울까.
이수연이 소속사 확정되면 계획했던 기사 풀어.
내가 못 먹는 감이니 찔러서 상처라도 줘야지 덜 억울하지.”
말을 마친 정 대표는 몸을 돌린 후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윤 엔터, 당분간 많이 바빠지겠어….”
그리고 그런 정 대표의 모습을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눈으로 잠시 바라본 김 이사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대표실을 나섰다.
민수는 자신의 보금자리 윤 엔터에 도착하여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오랜만에 윤 엔터를 찾은 태준을 만날 수 있었다.
“이게 누구야? 요즘 휴식 중이라 때깔 좋은 윤 배우 아니야?”
민수가 웃으며 반겨주자 태준도 민수를 보며 웃으며 인사했다.
“하하, 정 배우 요즘 수고가 많던데.
정 배우가 바빠져서 내가 덩달아 우리 집 소악마를 상대하느라 점점 피곤해진다고.
내가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야.”
태준의 엄살에 민수는 그냥 조용히 웃으며 태준을 달랜다..
“그러잖아도 며칠 전에 설아 씨를 만났었지.
나중에 드라마 촬영 끝나면 다시 운동하기로 약속했어.”
그렇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둘은 천천히 민수의 집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민수는 태준에게 지나가듯 말하였다.
“아, 윤 배우 어쩌면 소속사로 선물 하나가 날라 올 수도 있겠어.”
태준은 민수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민수에게 물었다.
“선물? 무슨 선물?”
의아해하는 태준에게 민수는 의뭉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 기대하라고. 내가 움직였거든.
너무나 대단한 선물이라 놀랄지도 모르니까.”
민수의 말에 태준은 혀를 차며 웃었다.
“하.. 이거.. 왠지 이 장면이 익숙한 기분이 드는데…”
그런 태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민수는 자신의 집 문을 열었다.
자신의 방에는 이미 설 아가 도착하여 간단한 과일에 맥주 캔 3개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태준은 기가 막혀 설아에게 핀잔을 주었다.
“야, 여기가 우리 집이냐? 왜 주인보다 네가 먼저 와있어?”
태준의 말에도 설아는 당당했다.
“아무도 준비를 안 하니까! 내가 했어.
다들 오랜만에 모였는데 가볍게 맥주라도 한잔하면 좋잖아. 자자. 이제 곧 시작이니까.
그런 쓸데없는 것은 신경 쓰지 마시고요.
드라마나 신경을 쓰는 게 어떨까요. 바보 오라버니”
설아의 말에 민수도 그냥 웃으며 태준의 편을 들었다.
“윤 배우 말이 맞아요, 설아 씨.
어디 다 큰 처자가 남자 혼자 사는 방에 그렇게 막 들어옵니까?
오빠로서 윤 배우가 걱정하는 게 당연한 거 같아요.”
민수의 말에 설아는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민수를 바라본다.
“은근히 꼰대 마인드 시라니까. 바보 오라버니는 전혀 그런 걱정이 아닐걸요”
설 아가 투덜거리자 태준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게, 우리 정 배우가 참 요즘 사람 같지 않아요.
내가 왜 인간 흉기를 사서 걱정할 까, 상대방을 걱정하면 몰라도.
다만 그냥 다른 사람 방에 허락 없이 들어가는 것이 무례한 일이라 그런 건데..”
태준의 말에 설아가 억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 내가 인간 흉기면 민수 오빠는 그냥 생체 폭탄인데.
나 민수 오빠한테 잘못 걸리면 뼈도 못 추릴걸.
그런데 바보 오라버니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조금 서운하지.”
설아의 말에 태준은 민수를 다시 봤다는 듯 쳐다보고는 활짝 웃었다.
“호.. 설아를 가볍게 제압할 정도의 용사였다니. 역시 정 배우, 내가 아주 존경해.”
태준의 말에 설아가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내밀었고 그 모습에 태준은 움찔하며 설아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퍽 익살스러워 민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남매의 너스레를 오랜만에 보고 나니 민수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냥 내가 있을 곳에 있다는 느낌과 소속감.
이런 감정은 전생의 민수로써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같은 시간 대표실에서는 민 여사와 윤 대표가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벽에 걸린 티브이에서는 여러 가지 광고들이 한창 방송되고 있었다.
“생각보다 광고가 많이 붙었네요.”
민 여사의 말에 윤 대표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하, 여러 가지 이슈가 많은 드라마라 그래. 광고 단가는 이제 시청률을 까봐야 알겠지.”
순간 로비에서 연결된 내선 전화가 울리고 전화를 받은 윤 대표는 순간 멈칫하게 되었다.
[대표님 이수연 씨가 찾아 왔습니다.]
윤 대표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누구라고요?”
[네, 대표님 이수연 씨입니다. 배우 이수연 씨]
잠시의 정적 후에 윤 대표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올리세요.”
그런 윤 대표를 민 여사가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