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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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송포유”가 촬영에 열을 올리고 있는 시기.
“송포유” 같은 시간대에 방송되는 “신데렐라의 남자”는 1화 2화에 유의미한 시청률인 9.8% 과 10.3%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남자주인공인 이성진의 연기는 역시 나무랄 데가 없었고, 첫 주 진행도 생동감 있고 빠르게 잘 진행되었다는 기사들이 줄을 이었다.
민수도 물론 “신데렐라의 남자”의 1화 2화를 보긴 했지만 만수는 그저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었다.
“이거… 분명 재미있긴 한데.. 너무 분위기가 다른 거 아닌가?”
민수가 든 생각은 딱 그러했다.
인기 소설이 원작인 드라마라고 했는데. 드라마의 시선이 너무 남자에게만 집중되어있다.
거기다 원래 소설의 주인공인 여주의 느낌이 소설과 드라마가 체감될 정도로 달랐다.
민수는 이 두 가지를 생각하며 제작진이 생각보다 큰 실수를 저질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게 “신데렐라의 남자” 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는 가운데 “송포유”에 대한 기사들도 계속 오르내리고 있었다.
기대와 우려로 가득한 “송포유”의 기사를 보며 민수는 그냥 빙그레 웃음만 나왔다.
“다른 건 몰라도 연기로는 깔 데가 없을걸…”
하지만 첫 방이 다가옴에 따라 민수는 다른 부분에 대한 걱정이 조금씩 피어났다.
“하, 수연 선배와 대표님 … 괜찮겠지? 시간이 지났지만, 그 두 사람 사이에는 신뢰가 있었잖아. 지금은 서로 오해를 하는 것 뿐이고..”
그리고 또 한가지, RD 엔터에 대한 걱정이었다.
자신이 RD 엔터를 거절하고 만약 수연 선배까지 윤 엔터로 자리를 옮긴다면 분명 RD 엔터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사실은 민수로 하여금 걱정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하… 그거야말로 정말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지. 윤 대표님을 한번 믿어보자”
그리고 첫 방이 나가는 날.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송포유”식구들은 촬영에 매진 하고 있었다.
첫 방이 나가는 날이니만큼 촬영장 분위기도 어느 날과는 다르게 다소 날카롭게 흘러갔다.
하지만 다행히도 배우들의 연기는 안정되어 있었고 오늘 하루 동안 소화해야 할 씬들은 빠르게 촬영되어 갔다.
그런 배우들을 보면서 제작진들은 배우들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들의 초조함을 애써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물론 문제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새로 합류한 네 명의 배우들은 어느 정도 자신의 몫을 해 나가고는 있었지만 종종 실수로 상대 배우의 맥을 끊곤 했다.
원래 민수나 리온 그리고 수연이 날카롭게 벼린 칼처럼 연기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번 템포를 죽여 버리면 다시 집중력을 끌어 올리는데 시간이 조금 필요했고 결국 그에 따라 촬영이 다소 지연되는 상황에 부닥친 것이었다.
스탭들은 원래 이 정도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애써 배우들을 위로하고 자신들의 마음도 다잡았지만, 불행히도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문제가 된 씬은 최준의 친구 네 명이 최준을 은근히 무시하는 것을 미주가 평소에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중 친구 한 명이 최준이 허락 없이 최준을 위하여 미주가 만든 의상을 입은 것을 본 미주의 분노가 토로하는 씬 이었다.
이 씬에서 수연의 상대역은 현승이었다. 민수가 보기에도 네 명 중에 현승의 연기가 가장 나았으니 상대역을 적합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씬을 준비하는 현승의 표정을 본 민수는 왠지 문제가 발생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승이 수연을 너무 쉽게 봤는지 상대의 감정을 받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의 수연이었으면 그걸 바로 눈치챘겠지만 오늘의 수연은 날카롭되 서서히 여유를 찾아가던 그런 평소의 수연이 아니었다.
왜인지 전체적으로 매우 초조한 느낌의 수연은 시작 사인이 나자마자 감정 레벨을 거의 최고조로 올려서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얼마나 날카롭던지 멀리서 바라보던 민수조차 수연이 연기하는 미주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
당연히 상대역 현승은 당황하며 조금씩 대사 실수를 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NG가 계속 쌓여갔다.
NG란 녀석이 참 웃긴 게 한번 발동이 걸려 버리면 이 NG의 늪에서 도무지 헤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민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던 현승 씨도 문제지만.. 수연 선배.. 그거 지금 감정 과잉이잖아요.’
민수가 보기에는 이 상황은 딱 수연이 과하게 연기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면서 민수는 수연도 지금 자신처럼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구나 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오늘 수연 선배하고 만나는 거, 나만 긴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군. 수연 선배가 나보다 더 긴장하고 있어.’
민수가 생각하는 중에도 NG는 계속되었고 결국 참다못한 수연이 현승에 한마디 하게 되었다.
흥분하지 않고 낮은 어조로 조곤조곤 말하는 수연의 말은 결국 사족을 다 때고 나면 “그따위로 할 거면 꺼져라” 였다.
그리고 결국 그 씬은 뒤로 넘기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4인방은 정신을 좀 차렸는지 건방진 눈으로 수연을 보지 않기 시작했고 촬영은 차라리 좀 더 부드럽게 진행되게 되었다.
‘아, 이런 게 기 싸움의 바람직한 사용법, 혹은 기 싸움의 순작용, 뭐 그런 건가?’
수연의 분노 폭발 이외에 별다른 큰 문제 없이 끝난 촬영 후 민수는 수연과 1:1로 대면하게 되었다.
매니저들 없이 SBC 근처 한 커피숍에서 마주친 둘은 누가 봐도 확연히 긴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수는 자신처럼 긴장한 수연을 보며 애써 웃으며 말을 건넸다.
“하하, 선배님. 궁금한 것 있으면 먼저 물어보세요”
수연은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조심스럽게 민수에게 묻는다.
“그.. 선생님은.. 잘 계시지?”
당연히 RD 쪽에 관계된 질문을 할 거로 생각했던 민수는 너무나 함축적이고 다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수연의 질문에 순간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와.. 선배님 엄청나게 똑똑하시네요… 전 그냥 RD 쪽 이야기나 물으실 줄 알았는데..”
민수의 말에 수연은 조금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흥, 너 하는 꼴을 딱 보니 RD 쪽에서는 바늘도 안 들어갈 거 같더라.”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뜸을 들이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조금 부러워. 나도 그때 지금의 너처럼만 세상 물정을 알았으면..”
수연의 태도와 표정, 행동을 보고 민수는 수연이 과거를 너무나도 후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을 돌리지 않고 솔직하게 말해 주고 싶었다.
“선배님. 솔직하게 제 생각을 말씀드릴게요.
우선 아까 물으신 거부터 선생님은 잘 지내세요.
다만 가슴에 한가지 아리는 상처를 가지고 있으시긴 하지만요.
그리고 아리는 상처의 주인공 이수연 배우님.
다시 윤 엔터로 돌아가세요.
제 발로 걸어 나간 것처럼 다시 자기발로, 그래서 윤 대표님께 사과를 하던 석고대죄를 하던 직접 해결하세요.
이 것이 제가 선배님께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민수의 말에 수연은 조금 두려운 표정으로 민수의 눈을 피하며 다른 곳을 바라본다.
“안돼. 난 너무 무서워. 선생님이 날 안 보면 뭐라고 하실지 너무 두려워…”
그런 수연의 모습에 민수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럼 선배님은 어쩌고 싶으신데요?”
민수의 말에 수연은 계속 민수의 눈을 피하면서 나지막하게 이야기한다.
“이 드라마 끝으로 연예계 은퇴할 거야.
그리고 선생님이 볼 수 없는 곳에서 잊으면서 살 거야. 그러면 선생님도 나 같은 거 잊으시겠지. 그럼 내가 준 배신의 상처도 서서히 아물어 가실 거야”
수연의 말에 민수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와, 진짜 과격한 선배네.. 이거였군.
내가 수연 선배를 몰랐던 이유. 이렇게 은퇴해버렸다고?
지금 시기에 은퇴를 해버렸으면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리고 무슨 금분세수(무협에서 원한을 뒤로하고 강호를 떠나는 행위)라도 하겠다는 거야?
진짜 만나보길 잘했네.
만약 진짜 은퇴라도 한답시고 사라졌으면 윤 대표님 정말 넘어 가셨겠어…’
정신을 차린 민수는 수연에게 나직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하였다.
“선배님, 그건 진짜 너무 이기적이시네요.
결국 옛날처럼 또 도망가겠다고요?
전 선배님이 윤 대표님께 최소한의 예의는 지킬 거로 생각했는데…”
민수의 말이 끝나자 수연은 순간 몸이 굳은 듯 움직임을 멈추고 미동도 없이 그냥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수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 최소한의 예의.. 그것조차 지키지 않고 있었나.. 나… 하…. 난 대체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
그렇게 입을 연 수연은 민수가 묻지 않아도 주절주절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집에 나도 모르는 빚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어린 나에게는 그 돈이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어.
그리고 나 때문에 선생님께 피해가 가게 될까 두려워졌어.
그래서 결국 RD를 선택했어.
그리고 선생님께 연락하지 않았지.
혹시나 선생님이 내 빚에 대하여 알아 버리시고 그게 선생님에게 부담이 될까 봐.
그런데 얼마나 웃기는 일이 벌어진 줄 알아?
내가 그 빚을 갚고 아버지 치료비를 마련하는데 걸린 시간이 고작 1년이야.
그렇게 큰돈이라고 생각했던 그 돈이 그냥 1년만에 생겨 버렸다고.
그리고 RD에서 생활 한 1년 동안 난 이 빌어먹을 쇼 비즈니스 세계에 대하여 철저하게 알아버리고 말았어.
돈 때문에 소속사를 얼마든지 바꾸고 또 소속사와 배우의 관계는 그냥 돈 관계뿐이라는 것을 말이야.
그래. 연예계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란 것이.. 내가 윤엔터에서 봐왔던 그런 관계들이 아니었던 거야.
그러자 문득 깨닫게 된 거지.
내가 1년전에 했던 행동.. 그냥 밖에서 보면 돈 때문에 자기 키워준 선생님을 배신한 거로 밖에 안 보인다는 것을.. 차라리.. 아예 처음부터 솔직하게 이야기 했더라면.
하지만 지나버린 1년의 세월이 날 점점 두렵게 만들었어.
선생님이 내가 배신했다고 날 미워하면 어떡하지? 그렇게 걱정하면서도 그래도 희망이 없진 않았어.
내가 진짜 좋은 배우가 되어버리면 당당하게 선생님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발버둥 쳤지만 RD에서 난 그냥 반쪽짜리일 뿐이었어.
그곳에서는 내가 한 가지만 하기를 원했으니까.
난 그냥 여기서 그저 그런 배우가 되어가고 있었어.
난 절망했지만 마지막 기대를 버리지 않았어.
선생님이 날 믿고 날 다시 찾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일 년을 열심히 일했지.
위약금을 내야 했으니까 선생님이 날 찾으면 바로 위약금을 내고 돌아가자.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는데 선생님은 날 찾지 않으셨어.
그리고 난 느꼈어. 선생님도 결국 나를 믿지 않으시는구나.
당연하겠지.
그건 누가 봐도 그냥 배신이었으니까.
이 세계에서 수십 년을 경험한 선생님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셨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 아무런 희망이 없더라고.
어때, 후배. 네가 보기에도 내가 너무 한심하지 않니?”
처연하게 웃는 수연의 눈가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민수는 이 순간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한 민수는 그냥 솔직하게 권유했다.
“선배님. 은퇴하던 연기를 계속하던 그건 선배님의 뜻이에요.
그건 누구라도 막거나 강요할 수 없는 거고요.
다만 선배님.
무조건 빠른 시간 안에 대표님부터 만나보세요.
그리고 그 뒤에 무슨 일을 해도 하세요”
민수가 재차 권유해도 수연의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에 민수는 그냥 웃으며 수연에게 덧붙였다.
“좋아요, 선배님. 제가 선배님께 좋은 힌트를 하나 드릴게요. 윤 대표님은 아직도 선배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고 계세요.”
민수의 말에 수연의 몸이 잠시 움찔했다.
그리고 민수는 수연에게 다가가 수연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윤 엔터 옥상에는 집이 한 채 있더군요. 몇 달 전부터 제가 그곳에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그때까지 그 방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어요.
마치 방 주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리고 그 방을 손수 청소하신 분이 바로 윤 대표님이십니다”
말을 마친 민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제가 해드릴 말은 이것이 끝. 나머지는 윤 대표님께 직접 들으세요. 그리고 그 시간은 가능하면 빨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선배님.
요 며칠 재미있지 않았어요?”
그렇게 말을 마친 민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수연은 민수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