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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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일정에 아침 일찍부터 부산스럽게 시작된 촬영은 점심시간이 되면서 잠시 소상 상태에 접어들었다.
특별히 오늘은 이카루스의 팬클럽에서 조달한 도시락이 제작진 측에 배달되었다.
이카루스의 팬클럽 명은 “태양”이었는데 원래 이해하기 쉽고 이카루스에게 힘이 되겠다는 의미로 “이카루스의 날개” 라고 지으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원자체가 별로 좋지 않은 의미였고 이카루스의 회사명이 날개 엔터이다보니 다소 겹치는 부분도 있어서 포기하고 소행성 이카루스가 가장 가깝다는 “태양”으로 이름을 정했다.
최초에는 소수로 시작했지만 이카루스가 탑급에 오르면서 규모 자체도 엄청나게 커진 데다 데뷔 시절부터 이러저러한 이슈로 시끌벅적했던 이카루스이니 만큼 수많은 전투(?)를 겪어온 백전노장들이 즐비하게 보유한 “태양”은 여러모로 살펴 보아도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존재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도 민수가 있던 전생에서 “서쪽 해변”이란 드라마를 시작부터 날려 버리지 않았던가.
민수는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하여 도시락을 들고 리온의 방으로 이동했다.
리온은 팬클럽의 임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달하고 같이 사진 촬영을 마치고 자신의 대기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당연히 팬클럽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할 것으로 생각했던 민수는 인사만 하고 나가려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잡혀서 리온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원래 팬클럽들과 같이 식사를 하지 않나요?”
민수가 도시락을 뜯으며 묻자 리온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하, 아니에요. 태양 애들의 모토가 “우리 스타는 멀리서 바라보고 가까이서 지켜주자” 에요.
스타들이 사생팬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팬이랑 교류하는 거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제법 있잖아요.
그래서 애당초 식사 같은 사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에는 절대 접근하면 안 된다는 내규를 정해 놓았다고 하네요.
혹시 우연히 외부에서 만나도 밥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주더라고요.
저희로서는 참 고마운 일이죠.”
“서쪽 해변”사건 이후로 조금 꺼리는 기분이 들었던 이카루스 팬덤이었는데 생각보다 질서 정갈한 모습에 민수는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
그렇게 생각 없이 도시락을 꺼내는데. 도시락 위에 하나의 쪽지가 있었다.
[정민수 배우님, 우리 리온님이랑 잘 지내 주세요.
리온님께 옷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주 눈 호강 했습니다.
민수님, 잘생기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리온님이 더 멋있습니다.
연기도 우리 리온님이 더 잘 하실거에요! 뿌뿌]
동글동글한 귀여운 글씨로 쓰여진 쪽지를 보면서 민수는 작게 실소를 머금고는 쪽지를 리온에게 보여 주었다.
“이건... 잘 지내 달라는 건지 싸워달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하하”
리온은 쪽지를 보자마자 기가 막힌 듯 웃음을 지으며 조금 난처해했다.
도시락의 퀄리티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갈비구이에 회까지 포함된 도시락 대체 가격이 얼마일지 민수로서는 잘 짐작이 안 갔다.
어쨌든 응원 차 도시락이 날아왔으니 맛있게 먹고 열심히 촬영해서 드라마가 성공하면 그 값은 톡톡히 한 것이 되리라.
민수가 천천히 도시락을 음미하며 먹고 있는데 리온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하하, 오늘 수연 선배님이 포스가 남다르시던데요.
아까 저랑 찍은 씬 있잖아요.
거기 마지막 지문이 “최준이 반한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미주를 바라본다.” 이거였는데.
그냥 마지막에 멍하게 바라보기만 했어요.
거기에 제 연기가 전혀 들어가지 않아 버린 거죠.
솔직히 그렇게 예쁜 분이 제 앞에서 정면으로 그렇게 사랑스럽게 웃는 모습은 처음 봤거든요.”
리온의 말에 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러네요. 수연 선배가 유별나게 예쁘긴 하죠.
그러니 꽤 오랜 시간 CF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거기도 하고….
게다가 오늘 기합이 잔뜩 들어가시기도 했으니…”
리온은 민수의 말이 찬동한다는 듯이 손뼉을 치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게다가 민수씨랑 찍은 씬.
와. 전 솔직히 수연 선배가 연기를 크게 잘한다고 느낀 적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씬은 진짜…”
민수는 리온의 말에 작게 미소 지으면서 리온에게 자기 생각을 말해 주었다.
“하하, 앞으로 계속 보게 될 겁니다.
수연 선배의 진짜 연기를.
그분이 정말로 연기 제대로 배우신 분이시거든요”
리온은 민수의 평에 다소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했지만 민수는 그냥 웃기만 했다.
같은 시간 수연의 대기실
수연은 신경질적으로 도시락을 뜯어서 한입 한입 꾸역꾸역 밥을 삼키고 있었다.
그런 수연의 모습을 보며 매니저는 살짝 혀를 차며 수연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뿔이 났어? 생각대로 안 된 거야?
장면은 정말 좋게 잘 뽑혔던데.”
매니저의 의문에 수연은 인상을 쓰고 한숨을 푹 쉰다.
“아, 그 씬 내가 완전히 먹은 건데.
갑자기 손을 올려서. 아우 약 올라.”
약 올라 하며 방방 뛰는 수연의 모습에 매니저는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수연에게 웃는 얼굴로 말하였다.
“오랜만이네. 이수연의 이런 모습 보는 거… 한동안 그냥 물에 술 탄 듯 그렇게만 했었잖아.
열정을 가진 이수연을 보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지는 몰랐네.”
매니저의 말에 수연은 잠시 멈칫하고 매니저를 바라봤다.
웃는 얼굴의 매니저를 바라보며 수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작게 한숨만 쉬었다.
그런 수연을 바라보며 매니저는 계속 말하였다.
“좋아, 좋아. 그냥 이렇게만 가자. 이수연”
매니저의 말에 수연이 가까스로 겨우 말을 내뱉는다.
“그래…. 그럴지도”
그런 수연의 모습에 매니저는 실소하며 말을 돌렸다.
“참, 그나저나 그럼 정민수 씨는 연기 잘하고 있는 거야?”
매니저의 물음에 수연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것도 굉장히 솔직히 말하자면…. 저 나이 때에 저렇게 연기하는 배우가 있을 줄은….
아... 그 윤태준 말고 말이야.
저거 아직 음 조금 농담조로 말하면 풀파워 100%가 아니야.
아직 그런 씬이 없었거든.
캐릭터 자체가 냉정한 편이라 저렇게 자제하고 있는 거지.
후반부에 캐릭터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끝에 가면 한 번쯤은 폭발하는 씬이 나오지 않을까?
하, 역시 선생님이야.
저런 배우를 키워 내시다니”
조금 몽롱한 눈으로 말하는 수연에게 매니저가 줄 수 있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다시 휴식시간이 끝나고 오후 촬영이 시작되었다.
오후 촬영은 리온과 민수가 주가 되는 씬들이 촬영되는데 이제 마음을 다잡은 최준이 준성에게 자신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고 최준과 준성이 해결책을 모색하게 되는 씬들이었다.
“준비되셨죠? 4-1-1 GO!”
(씬 4-1-1)
결국 최준은 이를 악물고 준성을 찾아온다.
준성은 자신의 작업실을 찾아온 최준을 멍하니 바라본다.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이른 시간에 최준이 찾아오자 준성은 조금 짜증이 몰려왔지만, 미주와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애써 침착하게 최준을 맞이한다.
“최준 씨가 제 작업실에 따로 찾아올 줄은 몰랐네요”
준성의 말에 최준의 표정이 천태만상으로 변해 간다. 그리기를 잠시. 결심한 듯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최준은 준성에게 고개 숙여 사과한다.
“미안해. 지금까지 널 무시했던 거 사과할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반말을 유지하는 최준의 모습에 준성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어차피 도와주기로 한 거 길게 끌지 말고 빨리 끝내자는 생각에 준성은 선선히 사과를 받아 주었다.
“뭐, 좋습니다. 우선 앉으세요”
준성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든 듯 부드러워지자 최준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미주가 너라면 날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했어.
날 도와줄 수 있겠어?”
밑도 끝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최준에게 준성을 따로 말을 돌려 설명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솔직히 장담은 못 하겠네요.
하지만 최선의 방법은 찾아보죠.
…그래야 당신이 더 빨리 미주를 떠날 테니까요”
마지막 말은 미묘하게 최준이 들을 수 없게 작게 중얼거린 준성은 고개를 들어 최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항상 냉정하게 가라앉은 눈이 아닌 조금 이글거리는 눈이 최준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다.
“OK! 자자 바로 다음 씬으로 이어서 갑니다.”
(씬 4-1-2)
마주 앉아 있는 최준과 준성
준성은 최준에게 조금 가벼운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좋아요. 최준 씨. 우선 이야기를 좀 해보죠.
지금까지 경력이나 이런 거 다 무시하고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음악이 무엇입니까”
준성의 말을 들은 최준은 심각하게 그리고 골똘히 생각의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고 천천히 준성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록, 내가 제일 자신 있는 건 록이야”
최준의 말에 준성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하.. 최준 씨. 자신이 하고 싶은 거 말고. 잘하는 걸 말해 보라고요.
예전에 한 아이돌 멤버가 어쭙잖게 록을 한다고 설쳐서 얼마나 많은 안티가 늘어났는지 최준 씨도 잘 알고 있잖아요”
준성의 핀잔 섞인 말에 최준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항변한다.
“아니야. 진짜 록 이라니까.
원래 내가 록 밴드에 있었다고.”
최준의 강한 주장에도 준성의 얼굴은 펴지지 않는다.
계속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자 최준은 벌컥 화를 내며 준성에게 소리쳤다.
“야, 좋아 한번 들어나 봐.”
최준의 말에 준성은 실소를 지으며 최준을 비웃었다.
“좋아요. 그 말대로 들어나 봅시다.”
준성의 말에 최준은 벌떡 일어서서 녹음실로 들어가려 하다가 잠시 멈칫하더니 준성을 바라본다.
“아, 잠깐 기다려”
말을 마친 최준은 쏜살같이 작업실 문을 열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OK! 컷! 민수 씨 대기하고 바로 수연씨 리온씨 들어갑니다.”
리온이 이동한 곳은 미주의 작업실이었다. 이미 그것에 카메라와 수연이 대기 중이었다.
민수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중얼거렸다.
“하…. 장소가 좁고 카메라가 많으니 저렇게 촬영할 수도 있구나”
리얼버리이터티 출신 조우명 피디는 정말 카메라의 수를 중시하는 피디였다.
하긴 자신이 예능 할 때면 십여 대의 카메라를 동반하여 촬영하였으니 지금 촬영하고 있는 드라마의 제작환경이 조금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으리라.
조우명 피디는 PPL 광고의 수가 늘어나며 조금씩 예산이 추가로 편성될 때마다 카메라와 스텝의 수를 늘렸다.
무수한 촬영 영상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걸 충분히 이용하겠다는 계산이었다.
덕분에 반사판을 드는 스텝의 수도 늘어났고 민수는 문득 어쩌면 초유로 배우들 개런티보다 제작진 채용비용이 더 늘어나는 드라마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그런 조우명 피디의 생각 때문에 민수는 자신의 자리에 기다리며 옆 스튜디오에서 리온과 수연이 씬을 촬영하고 다시 오는 것을 기다릴 수 있었다.
즉 두 스튜디오에서 배우와 카메라가 대기하고 피디가 옮겨가며 두 씬을 촬영하게 되는 것이다.
“낭비이긴 한데…. 어떤 면에서는 그래서 참 편하기도 하네… 그리고 가능하면 극의 진행대로 촬영하니 감정 제어하기도 좋아지고.. “
민수가 생각하는 동안 저쪽 스튜디오에서 촬영이 시작되었다.
(씬 4-1-3)
작업하는 미주의 옆으로 최준이 들어왔다.
“야, 가자”
느닷없는 최준의 말에 미주는 최준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뭐해? 내 유일하게 남은 관객이잖아. 니가. 나 지금 노래 할 거야. 어서 따라와”
“어…. 어~~”
손을 잡아끄는 최준에 미주는 속절없이 끌려갔다.
“난 네가 없는 곳에선 노래 안 할 거야. 그러니 내가 노래하는 곳에선 네가 있어야 해”
단호한 최준의 말에 미주 입가에 조금 미소가 맺힌다.
“OK!! 자자 바로 이동 이동”
씬을 찍은 리온과 수연은 다시 서둘러 준성의 작업실로 이동했고 다시 촬영이 이어졌다
씬 (4-1-4)
미주의 손을 잡고 들어온 최준 미주의 손을 계속 잡은 채 숨을 잠시 헐떡인다.
“하…. 하 숨만 좀 고르고”
그 모습을 인상을 쓰고 바라보던 준성은 최준에게 묻는다.
“뭡니까? 미주는 왜 데리고 왔어요?”
준성의 말에 최준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쟤가 내 마지막 팬이야. 나의 노래를 끝까지 들어줄 유일한 한 사람.”
최준의 말에 준성은 어이가 없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이 미주를 바라 보기만했다.
준성의 강한 눈빛에 미주는 슬쩍 준성의 눈을 피한다.
“하…참 기가 막혀서…”
결국 준성이 한마디하고 다음 말을 이어가려는 데 최준이 심호흡을 하며 녹음 부스로 이동했다.
녹음 부스로 들어가 잠시 마이크를 체크한 최준은 미주에게 살짝 윙크하고는 노래를 시작한다.
곡명은 노래 좀 한다는 록 가수들이 다들 부른다는 She’s gone 거칠게 긁히는 저음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고음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날카롭게 나오는 고음을 보면서 준성도 조금 당황하며 바라본다.
미주는 두 손을 모으고 그 노래를 듣고 있고 최준은 점점 열창한다.
문득 그 모습을 보던 준성의 머릿속에 악상이 떠오른다.
남자의 애절한 노래를 들으며 기도하는 한 소녀.
준성은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악상을 정리하여 노래를 만들어 간다.
노래가 끝나고 최준은 땀을 닦으며 부스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준성은 순식간에 작곡이 완성된 노래를 보며 한숨을 쉰다.
“어때? 나 쓸만하지?”
최준은 웃으며 말했고 그 모습을 본 준성은 쓴웃음만 지었다.
“OK! 컷!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