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46화 (46/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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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인상을 한껏 구기며 자신의 대기실로 돌아왔다.

“하.. 진짜 미치겠네..”

신경질적인 모습의 수연을 보며 매니저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수연에게 물병을 내밀었다.

근래 수연은 조금씩 날카로워 지고 있었다.

정말 집중해서 연기해 본 지가 벌써 3년이나 지난 상황.

근 3년 동안 설렁설렁 연기하던 기억 때문에 연기 감각이 완전히 일그러진 상황.

그런 상황에서 상대역인 민수와 리온은 좋은 배우였지만 좋은 상대역은 아니었다.

상대방의 상황에 맞춰서 연기를 해 줄 만큼 경험 있는 배우가 아닌 둘에게는 완급조절이란 것이 없었다.

끝없이 존재감을 뿜어 대는 둘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결국 그만큼 수연도 존재감을 뿜어내야 했다.

게다가 경험 없는 제작진들은 이 상황이 마냥 좋은 줄 알고 계속 롱테이크로 장면을 뽑아내고 있으니 수연으로서는 정말 기가 찼다.

이처럼 피디에게 항의하는 것은 월권이 될 일이고 그렇다고 핏덩이 같은 신인 배우 두 명에게 사정설명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하는 이 상황에서 수연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이를 악무는 것뿐이었다.

예전처럼 그냥 대충 넘기자고 했으면 이 정도로 힘들진 않았을 텐데 스스로 진짜 열심히 해보자 결심한 상태니 죽을 둥 살 둥 따라붙고는 있지만 그 피로도는 하루가 다르게 누적되어 가기만 했다.

게다가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상대역 정민수.

수연이 보기에 정민수는 호흡 발성은 강환의 방식을 따고 있고 표현하는 스타일, 그러니까 표정 연기의 디테일이 윤강철과 흡사하다.

게다가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애타게 흔들리는 눈빛이 누군가를 너무 상기시켜서 그때마다 수연은 흐트러지는 집중력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러니 민수랑 연기하는 씬 하나하나가 수연에게는 어마어마한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그래서 결국 매니저와 수연의 대화 속에서 민수는 “후배님” 에서 “저 자식”으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그래도 잘 견뎌내며 연기 감각과 자신감을 조금씩 찾아가고 서서히 나아지고 있는 이때 갑작스레 예민하게 구는 수연을 보며 매니저는 무슨 이유가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하지만 물어보든 안 물어보든 자신이 기분 내켜야 대답해 줄 테니 굳이 물어볼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물병을 받아 든 수연은 바로 그 자리에서 물 한 병을 끝까지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 오빠 김팀장이 찾아왔네? 그것도 나 말고 민수씨한테..”

수연의 말에 매니저의 얼굴빛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캐스팅팀 김주성이?”

매니저의 반문에 수연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수연을 바라보며 매니저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눈을 크게 뜨고 수연을 바라보았다.

“하.. 새로운 타깃을 잡은 거네.

너 버리고 말 잘 들을 만한 신인으로”

매니저의 분석에 수연은 그냥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걱정되네…”

걱정스러운 표정의 수연을 보며 매니저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그래도 쉽게 흔들리는 사람 같이 보이지는 않던데.

그리고 나이도 25살이나 되었다며?

믿기진 않지만, 연기경력도 1년밖에 안 되었고 그러면 사회경험도 좀 해봤다는 건데.

그리 쉽게 속겠어?”

매니저에 말을 듣고도 수연의 표정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그래. 그건 나도 그럴 거 같아.

문제는 혹시 또 나처럼 무슨 약점이라도 잡혀 있을까 싶어 그렇지.”

수연의 말에 매니저의 표정도 조금 심각해진다.

“하.. 이제 진짜 더는 안 되는데.. “

수연은 이 사태를 그냥 보아 넘기진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민수의 대기실.

대기실에 대기하던 이동원 매니저는 민수가 처음 보는 남자와 대기실로 들어오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동원을 바라보며 민수는 잠시 자리를 피해 달라고 부탁했고, 동원은 김주성 팀장을 한번 쓱 하고 훑어보다니 대기실 밖으로 나섰다.

동원이 완전히 나가자 김주성 팀장은 자리에 앉아 민수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하하, 원래 저렇게 매니저가 배우를 혼자 두고 나가면 안 되는 거예요.

민수 씨가 아직 잘 몰라서 그렇지.

원래 제대로 된 회사에서는 저런 것 하나도 징계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민수는 주성의 말에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민수의 반응을 본 주성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저희 RD가 비록 배우 풀은 작아서 배우들 사이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체 컨탠츠를 생산 할 수 있을 만큼이 방면에 큰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말을 시작한 주성의 자랑은 대략 5분의 시간이 지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민수는 당장 말을 끊고 본론을 듣고 싶었지만, 자신도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잠시 참고 기다렸다.

“이게 저희가 민수 씨에게 제시할 계약서입니다.

우선 계약 당시 드릴 계약금만 5억입니다.

계약 기간 5년에 수입 배분은 5:5이지만 사실 신인배우들은 다 이 배분으로 계약을 합니다.

하하, 수입배분 보다 역시 얼마나 버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배분이 8:2이라도 일억밖에 못 벌면 8000만 원밖에 못 가져가지만 5:5라도 4억을 벌면 2억을 가져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희 RD는 그런 영세 소속사보다 충분히 많은 기회를 제공 할 수 있는 회사입니다.”

민수는 역시 캐스팅 팀장답게 말을 잘한다는 생각을 하며 계약서 다른 조항들을 살펴보았다.

‘하…. 역시 인가…’

작품 선택권을 박탈하는 내용과 소속사가 지정하는 작품을 촬영해야 한다는 조항 그리고 계약 내용 엄수 조항에 손해 배상이 계약금의 2배라는 내용까지.

‘이거.. 그냥 딱 봐도 수연 선배가 사인 했던 그 계약서 같네..’

얼토당토않은 계약서에 바로 거절을 하려 했지만 그래도 조금 시간을 끄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계약서를 뻔뻔하게 내미는 인간들이 제대로 된 인간 일리가 있나.

바로 거절하면 뒤 수작부터 들어 올 텐데.

수연 선배 건도 있고 준비할 시간을 좀 끌긴 해야겠어.’

생각을 정리한 민수는 웃으며 김 팀장을 바라보았다.

“하하,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지금 작품 촬영 중이기도 하고요.

중요한 일인데 바로 결정할 수는 없을 거 같아요.

조금 생각을 해보고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민수의 말에 김 팀장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럼요. 신중하게 판단하셔야죠.”

일어서는 김 팀장이 민수를 보며 넌지시 말하였다.

“하하, 신인 배우가 데뷔하게 되고 사람들의 눈에 들기 시작하면 참 이상한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별 괴상한 루머들부터 별별 찌라시들까지 말이죠.

그런 것들을 막아주는 게 바로 소속사가 할 일이거든요.

민수 씨도 아무쪼록 조심하시길…”

대기실을 나서는 김 팀장을 보면서 민수의 인상이 조금 찌푸려졌다.

‘아주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라..’

김팀장이 나서자 바로 동원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동원이 인상을 쓰며 뭐라고 하려고 하자 민수가 잽싸게 말을 가로챘다.

“하하, 거지 같은 계약서 하나 들고 와서 자기네랑 계약하자네요.

동원 씨 협조 해줘서 고마워요.

저 사람이 찾아온 덕분에 좋은 떡밥 하나 던진 샘이 되었어요.

이 떡밥이 우리에게 좋은 선물이 되길 기대해 봐야겠네요”

생뚱맞은 민수의 말에 동원은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고 그냥 눈을 감아 버리는 민수의 행동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사실 민수도 잠시의 휴식이 필요했다.

민수 역시 수연과 한 씬 한 씬 연기하는 것에 피를 말리고 있었다.

수연을 빠르게 각성시키기 위해 수연에게 미친 듯이 존재감을 내뿜는 작업이 쉬운 일 일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연을 볼 때는 작가가 요구하는 애틋한 눈빛을 계속 쏴줘야 했다.

애틋함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별로 없는 (민수의 기억에는 아파하는 혜민이를 본 것이 유일한 애틋한 감정이었다.) 민수가 애틋함을 연기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민수가 선택한 것은 남의 연기를 모방하는 것, 결국 이중으로 연기를 해야 하는 민수는 배로 피곤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민수의 예리한 검과 부딪치며 수연의 검에 낀 녹이 조금씩 벗겨지는 느낌이라 보람은 느낄 수 있었다.

잠시 쉬는데 동원이 조금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껴지자 민수는 피식 웃으며 동원에게 말을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동원 씨,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어요?”

민수가 눈을 뜨자 동원은 민수를 답답해하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민수 씨, 설마 다른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니시겠죠?”

걱정하는 동원에게 민수는 크게 웃으며 동원을 쳐다보면서 대답해 주었다.

“와..저 못 믿으세요?

소속사가 망해서 없어질 때까지 전 여기서 나갈 생각이 전혀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동원은 민수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믿죠, 민수 씨. 하지만 혹시나 해서요. 확답을 들어야 안심이 되니까요”

민수가 동원을 바라보며 실소를 지을 때 코디인 조수정이 대기실로 들어섰다.

“와, 우리 배우님 아까 연기도 너무 멋있었어요. 그 눈빛이…”

수정의 너스레에 민수는 조심스레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하소연하였다.

“하, 그런데 수정 씨 이런 거 괜찮은 거야? 대본이 계속 나오는데 난 이거 준성이 엄청 바보 같아 보이는데..

아니,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바라만 보고 애끓는 감정을 가진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고백도 못 하고 지켜보기만 하고 뒤에서 도와주기만 했다니..

세상에 이런 바보가 어디 있어?

이런 게 사람들한테 먹힐까?”

민수의 말에 동원이 동의한다는 듯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수정은 인상을 팍 구기면서 반론했다

“하, 배우님 이게 로맨스에서 가장 잘 먹히는 캐릭터라니까요.

뒤에서 나만 지켜주는 기사 같잖아요.

자신만 애틋하게 바라봐 주는 기사!

대부분 로맨스에서 이런 캐릭터들이 최애 캐릭터로 사랑받는다고요.

게다가 그 기사가 배우님처럼 잘생겼는데 다소 냉정하면서 시크하다면 카~!

우리 작가님은 진짜 너무 잘 쓰신다~”

민수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성인 수정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니 그래도 여자들한테는 통하는 거 싶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래도.

남자들은 다 나를 바보 같다고 생각할 거 같은데. 만약 저라면 저 같은 캐릭터가 드라마에 나오면 확 채널을 돌려 버릴 거 같아.”

민수의 걱정에 진주는 웃으며 민수에게 설명했다.

“걱정하지 마시라. 우선이 방송이 나오는 시간대에는 대부분 남성 보다는 여성들이 채널권을 가지고 있죠.

그리고 우리 드라마에는 배우님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 분도 나온다는 말씀.

특히 수연 배우님이 중년 남성들에게 아직도 상당한 인기가 있어요.

젊은 남자들이야 수연 배우님이 연기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까고 있지만, 막상 중년 남성들은 단아하고 귀티가 나는 수연 배우님 얼굴이 호감형으로 먹고 들어가거든요.

지금 수연 배우님 스타일리스트들이 수연 배우님 전혀 안 꾸민 듯 꾸민 모습을 유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애쓰고 계신데요.

그러니 우리 배우님은 걱정하지 말고 연기만 하시면 될 거 같아요.

드라마 애청경력 10년이 넘는 저로서는 이 드라마가 소기의 성공을 거둘 것을 자신해요”

동원은 다다다 연속으로 쏘아대듯 말하는 수정을 감탄하는 얼굴로 바라 보았다.

“와, 수정아 나보다 네가 진짜 매니저 같다.”

감탄하는 동원을 잠시 보던 수정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민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헐, 그러고 보니 우리 배우님도 사람이었구나.

그런 걱정을 하고 계시다니.

언제나 확고해 보이셨는데..”

수정의 말에 민수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난 그냥 배우일 뿐이잖아.

배우들이 연기 잘한다고 드라마가 마냥 잘되는 건 아니니까.

이번 드라마 꼭 잘 되었으면 좋겠거든.

그냥 애착이 가네 왠지..."

이제 시간이 되어 촬영하러 가는 민수는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몰아쉬고 촬영장으로 이

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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