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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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민수는 고단한 몸을 침대에 기대며 오늘 촬영에 대하여 잠시 되새겨 보았다.
촬영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가장 걱정하던 수연 선배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각성한 듯 신들린 연기를 선보였고 자신이 예상한 대로 리온은 일관되게 좋은 연기를 선사했다.
진주는 초반에는 조금 흔들리는가 싶더니 수연 선배의 맨탈 케어를 받은 이후에는 본인의 역할을 충분히 잘 수행해 주었다.
민수가 생각하기에 이대로만 진행되어도 좋은 드라마가 나올 거 같았다.
하지만 불안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민수에게 가장 심각하게 다가온 불안 요소는 역시 리온의 행사 참여였다.
“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안 되네.
날개 엔터가 그렇게 빡빡하게 운영하는 곳이었나.
아무리 그래도 리온이 신인 배우로 데뷔하는 시기에 행사라니.
상식적으로 너무 이해가 안가.
수연 선배의 건이 예상외로 무난하게 해결되나 했더니 생각지도 못한 고민이 생겨버렸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민수는 전문가에게 문의해 보기로 했다.
때마침 자신이 생각해도 전문가인 윤배우가 오늘 낮에 혜민이랑 놀아준다고 소속사에 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마음을 정한 민수는 몸을 일으켜 당장 윤태준의 아지트인 연습실 옆 휴식 소파로 이동했다.
민수가 그곳에 도달했을 때 소파 위에는 태준과 설아 그리고 혜민이가 즐거운 대화를 하고 있었다.
밝게 웃고 있는 혜민이의 모습을 보니 민수는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 저 녀석이 진정한 보배일세…’
민수가 다가오자 이야기 중이던 3인은 민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아니, 시간이 몇 시인데 혜민이가 아직도 있어?”
혜민이를 보는 것이 반갑긴 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까지 혜민이가 집에 가지 않은 것을 걱정한 민수의 말에 설아가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이제 곧 갈 거 거든요. 오빠 그렇게 빡빡하게 구시면 여자들한테 인기 없어요?”
민수는 설아의 말에 코웃음 치면서 대꾸했다.
“네네.. 다음 모쏠…”
“씽…”
한방에 설아를 침묵시킨 민수를 보며 태준이 웃음 짓는다.
“와… 정 배우 어떻게 알았어.. 역시 직감이 예리한 남자.”
태준의 말에 민수는 실소를 머금고 태준을 바라본다.
“아, 그거야 그냥 보면 알지. 그보다. 윤 배우 잠깐 물어볼게 있는데 시간 되나?”
태준은 민수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시간이 충분하다며 자리에 앉으라고 의자를 가리켰다
그런 태준과 민수의 모습에 설아는 혜민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그럼 혜민이 집으로 슝슝 해드리고 오겠습니다.”
“민수 오빠, 다음에 뵙겠습니다.”
배꼽 인사하는 혜민의 모습에 민수는 미소로 설아와 혜민을 배웅했다.
“설아야, 수고해. 혜민이도 다음에 또 보자”
혜민과 설아가 떠나가자 민수는 태준의 옆에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민수의 모습에 태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자자, 무슨 일로 정 배우가 나를 찾아 친히 출두하셨는가?”
민수는 태준에게 오늘 있었던 리온과 날개 엔터의 기행에 대하여 차분하게 설명했다.
민수의 설명을 다 들은 태준은 크게 웃으며 의자 바닥을 두드렸다.
“하하하.. 미치겠네.. 이걸 귀엽다고 해야 하나.. 발칙하다고 해야 하나… 참 어디서 본 건 있어서..”
태준의 격한 반응에 민수는 의아해하며 태준에게 물었다.
“윤 배우는 확실히 집히는 바가 있는 모양인데… 나한테도 좀 이야기 해주지. 혼자 재미있어하지 말고.”
태준은 그런 민수를 조심스레 살펴보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딱 보아하니 그 자식 혼자 헛발질한 거구만.”
그리고 민수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자 서둘러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정 배우, 오늘 리온이 늦게 와서 어떤 기분이 들었어? 덕분에 정 배우 대기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잖아. 퇴근도 좀 늦어졌고.”
자기 생각과는 전혀 다른 태준의 말에 민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냥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 그거? 뭐 촬영하다 보면 사정이 생길 수도 있는 거고.
원래 그럴 때 당연히 관리가 어려운 주연 여배우랑 경력 높은 원로배우 순으로 씬 순서 변경하는 거 당연한 거잖아.
거기에 대하여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민수의 말에 태준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원래 연예인이란 족속들은 기본적으로 기 싸움이 생활화 돼 있어.
아이돌이든지 아니면 배우든지 말이야.
그 원래 인간이란 족속들이 세 명 이상만 모여도 서열이란 게 생기잖아.
이 좁은 연예계에서 앞으로 계속 부딪칠 사람들이니 서열에 민감할 수밖에 없지.”
태준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민수는 더욱 이해가 안 가는 기분이 들었다.
“흠.. 맞는 소리이긴 한데 그게 이번 일이랑 무슨 상관이야?”
민수에 반응에 키득댄 태준은 계속 설명을 이었다.
“크크, 그 원래 급이 좀 높은 주연배우 들이 조연이나 신인배우 기죽이거나 기 싸움을 할 때 쓰는 방법인데 그냥 드러눕는 거야.
몸이 아프다. 혹은 컨디션이 안 좋다.
이런 핑계 대면서 촬영 진행을 늦추는 거지.”
태준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민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런데 리온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급 아닌 신인배우지.
경력이 높지만 그건 아이돌로서의 경력이고.
그래서 아이돌임을 이용해서 행사라는 방법으로 기 싸움을 건 거야.”
태준의 말에 민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천천히 태준에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윤 배우님은 지금 리온이 기 싸움을 하고 있다?”
태준은 민수의 말에 대답 없이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즐겁게 웃으며 민수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랑?”
민수의 물음에 태준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랑요 정 배우님”
어이없는 표정의 민수를 보며 태준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리온이 불쌍하다.
대체 자기 혼자 심각하게 기 싸움 들어갔는데 상대는 아무 생각 없이 딴생각하고 있으니 혼자 벽에 대고 박치기한 것밖에 더 되냐.”
태준의 말에 기가 막힌 민수에게는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에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스타가 아닐 뿐 연예계가 돌아가는 것 정도는 훤히 알고 있는 민수도 당연히 배우들이 기 싸움을 한다는 것 자체는 알고 있었다.
특히 두 배우가 급이 비슷한 경우에는 당연히 어느 정도의 서열정리 정도는 필요했다. 그래야 촬영이 더 부드럽게 흘러갈 테니까.
하지만 민수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리온과 자신은 서로 기 싸움을 할 상대조차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리온이 나한테 기 싸움을 하는 거지?… 걔가 나랑 같은 신인배우라고 쳐도 시작점이 완전히 다르잖아.
그 녀석은 아이돌로는 거의 탑급이고 주연배우인데…”
태준은 민수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런 리온이 긴장 할 만큼 우리 정 배우가 굉장했다?”
실실 웃은 태준을 보며 민수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뭐야. 그 마지막에 올라가는 억양은.. 가만있어보자… 설마 그 기사 때문인가?”
민수의 말에 태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그 양아치 찌라시? 아마 그것 때문만은 아닐걸.
그 녀석도 연예계 밥을 몇 년이나 먹었는데 그런 걸로 기분 나빠할까..
약간의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그건 아닐 거야.
그 기본적으로 배우들 중에 조금 우월의식 가지고 아이돌들을 아래로 보는 애들이 좀 있어.
아이돌이라면 시작부터 좀 아래로 보는 거지.”
태준에 말에 민수는 조금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리온이 내가 그런 부류라고 생각해서 기죽기 싫어서 기 싸움에 들어간 거다?”
태준은 민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가장 정답에 근접한 거 같은데.
원래 이카루스 애들이 아이돌치고는 솔직담백하고 성격 좋은 애들이라고 들었거든.
한두 해도 아니고 6년 동안이나 그렇다고 알려진 거 보면 일부러 꾸민 것은 아닐 거고 아마 사실일 건데.
너를 깔아뭉개자고 그런 짓 했을 거 같진 않네.
그냥 무시 받기 싫어서 그러는 거 같아.
내가 이렇게 만만한 놈은 아니니까 나 무시하지 마라
뭐 이런 거지.
그래도 발상은 다소 기발하네.
행사로 시간 미뤄서 너에게 피해를 주려고 하다니.
너무 기발해서 상대방이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랄까.”
태준의 말에 민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는 허탈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거참.. 나는 리온이랑 잘 지내고 싶었는데 젊은 연기자치고 그 정도 연기하는 배우도 사실 드물기도 하고..일이 이상해지네..”
민수의 모습을 본 태준은 계속 웃으며 자기 생각을 말했다.
“그런데 아마 저 짓도 한두 번이지.
소속사에서 그걸 두고 볼 리도 없고.
아마 금방 제자리로 돌아올 거야.
솔직히 이런 경우에 가장 빠른 방법은 그냥 네가 가서 기사에 대하여 사과 비슷하게 하고 잘 지내자고 하는 게 제일 직접적인 방법이지.
일반적으로 배우들은 저렇게 행동하면 자신이 숙이고 들어간다고 생각해서 절대 하지 않겠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 정배우는 그런 거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은 거 같으니까.”
태준의 말에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렇지.
난 기 싸움이나 서열 다툼 이딴 거 별로 관심 없어.
이러나저러나 리온도 대단하네.
기 싸움에서 밀리기 싫다는 이유로 촬영 중에 행사를 가버리다니.
이런 제 살 파먹기를 대체 뭐라고 생각해야 할지..허허”
민수의 말에 태준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정 배우, 잘 들어봐.
이 바닥에 있는 애들은 연기 잘하고 성격 좋은 또라이이거나 연기 잘하고 자기성격 잘 숨기는 또라이 이거나.
어쨌거나 또라이들 뿐이란 거야.
이말 잘 기억해둬.
정 배우도 언젠가는 분명 느끼게 될 테니까.
아이돌 애들은 그게 더 심할걸.
아주 어려서부터 소속사 연습실에서만 살다가 이제 데뷔해서는 연예인으로만 살았으니 살아가는 세계가 얼마나 좁겠어?
그러니 애들이 작은 거 하나에도 다소 맹목적이고 한편으로는 유치하고 극단적일 수 있는 거지.”
태준의 설명에 민수는 짜게 웃으며 태준에게 물었다.
“참 좋은 말이긴 한데, 우리 윤 배우는 어떤 또라이에 속하시는가?”
민수의 말에 태준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후 나 정도 되면 잘생기고 성격 좋고 연기 개 잘하는 또라이라고 할 수 있겠지.”
태준의 넉살스러운 태도에 민수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네네, 서술어가 조금 늘긴 했지만 결국 또라이란 거네.
참, 윤배우 오늘 수연 선배랑 연기 했는데 연기 잘하시더라고.
분명 예전에 연습 영상보다는 다소 미진한 점이 있지만 쌓인 경력만큼 노련함이 늘었다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좋은 연기였어”
민수의 말에 태준은 애써 말을 돌렸다.
“에이,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시나.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민수는 태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좋은 상담에 대한 보답.
왠지 윤 배우가 조금 궁금해하고 있을 거 같아서 말이야.”
웃으며 떠나는 민수의 모습을 보던 태준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 수연 선배.. 그래도 정신 차린 거 같아서 다행이네”
씁쓸하게 웃은 태준은 천천히 집으로 출발했다.
다음날 촬영장으로 출발한 민수는 오늘의 촬영스케줄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오늘의 가장 중요한 촬영은 역시 음악 여행 무대를 빌려 촬영하는 씬이 었다.
씬 자체는 길지 않지만 다른 프로그램의 무대를 빌려야 하는 장면이라 스텝들도 긴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실감 나는 장면 촬영을 위하여 실제 음악 여행 관객리허설 전에 빠르게 촬영하고 떠나야 하는 만큼 제작진들의 부담감은 적지 않으리라.
오늘도 리온은 행사 후 음악 여행 촬영 전에 돌아오기로 되어있었다.
민수가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 민수는 예상하지 못한 인물인 서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와! 민수 씨! 반가워요! 잘 지내셨어요?”
한껏 들뜬 서 작가의 모습에 민수는 약간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지만 원체 텐션이 좋으신 분이니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다 싶어 같이 기분 좋게 인사했다.
반갑게 인사한 서 작가는 민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저, 민수 씨. 음.. 이런 말 하기는 좀 미안한데요. 그 이번에 PPL 들어온 의상이 있어요.”
방송에서 빼놓을 수 없는 PPL 드라마에서 PPL은 숙명이라 할 만큼 당연하였다.
어차피 광고만으로 제작비를 완전하게 충당하지 못하는 만큼 PPL을 못 받으면 드라마를 촬영하지 못하리라.
원래 제작사가 외주로 만드는 드라마의 경우 제작이 시작되기 전 PPL을 다 받고 그 돈을 제작비에 합쳐서 제작을 시작하지만 민수가 찍는 “쏭포유”는 SBC 자체 제작에 배우들 출연료가 많지 않아 넉넉하게 시작해서 PPL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었다.
조심스레 말을 시작하는 서 작가의 모습에 민수는 자신이 따로 신경 써야 할 PPL이 있나 보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