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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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RD 엔터의 대표실에는 정우철 대표와 김익수 이사 그리고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뽀얀 피부와 큰 눈망울을 가진 미녀의 얼굴에는 오로지 권태감만을 담고 있었다.
“결국 이번에도 제 출연 소식을 기사로 먼저 알게 되었네요.”
조금 느리면서도 나직한 어조로 말하는 이수연의 말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뭘,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하시나 수연씨.
어련히 수연씨에게 어울리는 배역을 결정했을까.”
능글맞게 말하는 정우철 대표를 보며 이수연의 얼굴에 작은 비웃음이 깃들었다 사라진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금까지와는 많이 다른 배역이네요”
수연의 물음에 정 대표는 과장되게 웃으며 대답한다.
“하하, 그건 그렇지요. 이제 수연씨도 연기에 변화를 줘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다른 결정을 해 봤어요”
잠시 정 대표를 바라보던 수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정 대표가 주는 대본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요.”
아무런 군말 없이 대본을 들고 나서는 수연을 바라보며 정 대표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대표실의 문이 닫히고 이수연이 사라지자 정 대표의 입에서 욕지기가 튀어 나왔다.
“건방진 년. 이제 저년 건방 떠는 건 안 봐도 되겠구나. 저 작품 끝나기 전에 계약 기간이 종료되는 거지?”
정 대표의 말에 옆에 있던 김익수 이사가 재빨리 대답했다.
“네 대표님. 정확히 첫 방이 들어가기 직전에 계약 기간이 만료됩니다.”
정 대표는 음침하게 웃으며 김 이사에게 지시했다.
“저년 팀에 소속사 내 처리하기 애매한 반골들만 넣어 놓은 거 맞지? 저년 계약 종료와 동시에 그 사람들 다 퇴사 처리시켜.
담당 배우 관리 소홀하고 이유 이것저것 섞어 넣어서.”
김 이사에게 지시를 내린 정 대표는 담배 하나를 꺼내 물더니 길게 연기를 뿜어내고는 말을 이었다.
“건방지게 어딜 배우가 시키는 거나 열심히 할 것이지 배역에 토를 달아.
제 주제도 모르는 년이”
김 이사는 그런 정 대표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대표님 그래도 이수연 배우가 생각보다 배우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있습니다.
배역 끼워 넣기를 하기도 좋고 썩어도 준치라고 아직 이수연 배우를 좋게 생각하는 감독이나 작가들이 많습니다”
정 대표는 그런 김 이사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거야 그렇겠지. 한가지 연기는 그래도 기가 막히게 하니까.
큭큭, 역시 내 선견지명은 뛰어났지.
딱 그년을 보는 순간 고급스러운 배역이 딱 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깐.
그렇게 캐릭터를 확고히 고정해 놓으니깐 거기에 맞춰 비싼 CF들이 그렇게 들어오는 게 아니겠냐 말이야.
그런데 저년이 은혜도 모르고 배역하나 맡을 때마다 거부 하니..”
말을 멈춘 정 대표는 다시 한번 연기를 뿜어 내고 말을 이었다.
“이번에 드라마 망치고 나면 어차피 저년 받아줄 만한 소속사가 없을 거야.
우리랑 척지고 받는 것도 부담스러울 거고, 받는 다 해도 가치가 폭락했을 테니 제 가격 주고 데려가기는 수지가 안 맞을 테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다시 돌아 내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어.”
정 대표를 바라보던 김 이사가 걱정스럽게 반문했다.
“혹시 이번 드라마가 잘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차라리 케이블 드라마에 넣으시는 게 어땠는지요.”
김 이사의 정 대표는 유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크크, 세상에 아이돌 둘에 첫 출연 신인 그리고 한가지 연기밖에 못 하는 이수연. 작가는 등단작이고. 피디는 예능만 찍던 피디야.
대체 방송국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드라마를 편성 해 준 거지?
그냥 이카루스 팬들한테 비벼서 묻어가려는 건가?
그런 드라마가 어떻게 성공을 해? 자네도 알지 않나.
아이돌 애들한테 아무리 연기 가르치려고 해도 별로 늘지 않는 거.
연기는 춤이나 노래랑은 달라.
춤이나 노래처럼 죽어라 연습해서 적정 수준에만 오르면 데뷔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춤이랑 노래만 죽어라 파던 리온이 연기를 해 봤자 얼마나 하겠어?
그리고 사람들이 기억도 못 하는 케이블 드라마에서 망해 봤자 누가 망했다고 생각이나 하겠나?
공중파에서 망해야 진짜 망한 거고 기억도 오래가는 거지.
그렇게 망한 이수연을 우리는 다시 값싸게 줍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정 대표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대표실 문을 박차고 들어 왔다.
“대표님, 이수연 씨가 재계약 없이 새로운 드라마에 투입된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입니까?”
배우들을 관리하는 박 실장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것을 보며 불쾌한 표정을 지은 정 대표는 박 실장을 쏘아보며 대답했다.
“왜 그게 문제가 되나. 어차피 망해서 제 발로 다시 걸어 들어 올 건데.”
정 대표의 말에 말문이 막힌 박 실장은 한숨을 쉬며 정 대표에게 말했다.
“대표님. 배우는 앨범이 죽 쓰면 망하는 가수랑은 다릅니다.
드라마가 망해도 연기만 잘 해내면 배우 가치는 올라가는 거라고요.
그리고 실제로 망한다고 해도 수연씨가 다시 돌아온다는 건 무슨 근거입니까?”
인상을 쓴 정 대표는 박 실장의 말에 정색하며 대꾸한다.
“아니, 제가 무슨 수로 한 번도 안 해본 연기를 잘한다는 거야?
그리고 받아 줄 곳 없으면 당연히 다시 돌아오는 거지 그게 무슨 근거가 필요해?
우리랑 척지면서 이수연이 받아 줄 곳 있을 거 같아?”
그렇게 대답하는 정 대표를 박 실장은 답답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후… 대표님. 배우는 가수랑 다르다고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R&B만 부르던 가수는 갑자기 록을 부르기 힘들지만 우는 연기만 하던 배우라도 충분히 웃는 연기를 할 수 있는 거라고요.
그리고 배우 소속사는 그냥 배우 한명만 있어도 돌아가는 곳이 천지인데 왜 이수연 만한 배우를 데려갈 곳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애당초 우리 소속사에 압박을 넣을 정도로 큰 배우가 없는데 무슨 수로 다른 소속사를 압박한다는 겁니까?”
박 실장의 말에 정 대표는 한껏 짜증이 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우리 뒤에 진룡이 있고 콘텐츠 제작 부분에 진룡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얼마나 큰데 우리랑 척을 지면서 이수연을 데려 간다고?”
진룡 미디어와 진룡 투자 이 두 곳에서 파생되거나 혹은 영향을 미치는 드라마나 영화가 대충 30% 정도에 이른다는 것은 정 대표가 가진 자신감의 근거 중 하나였다.
박 실장은 정 대표의 말에 작게 한숨 지으며 설명은 덧붙였다.
“우리 소속사의 모회사 격으로 진룡이 있는 것도 맞고 진룡이 콘텐츠 제작 쪽에 제법 넓은 영향력을 가진 것도 다 맞는 말씀인데요.
우선 진룡 미디어 말고도 충분히 많은 제작사가 있고요.
더 큰 문제는 대체 대표님이 어떤 대가와 이유를 들어 이수연과 그 소속사에 압박을 넣으실 생각입니까?
진룡 미디어가 RD 산하의 사업체는 아니지 않습니까?”
박 실장의 지적을 들은 정 대표는 잠시 말을 멈추었고 머뭇거리는 정 대표를 바라보면서 박 실장은 한숨지으며 대표실을 나섰다.
“만약 이수연 씨가 재계약 하지 않으면 배우팀은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니, 애당초 배우한테 컨셉잡고 한 가지만 연기하게 시키다니.
배우를 뭐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혀를 차며 나서는 박 실장을 바라보며 정 대표는 생각을 조금 다시 하게 되었다.
가수들을 데리고 시작한 작은 소속사가 중국의 거대 미디어 업체인 진룡에 투자에 힘입어 점점 규모를 불려 나갔고 이제 한국에서 가장 큰 기획사 중에 하나로 이름 날리게 되었다.
게다가 진룡이 한국에 진출하여 진룡 미디어를 세우면서 그에 발맞추어 배우들을 섭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배우가 이수연이었다.
RD가 이수연을 영입하면서 얻게 된 유·무형적 이익은 상당했다.
이수연이 진룡 미디어를 통하여 찍은 드라마가 중국에서도 제법 괜찮은 인기를 얻게 되었고 그에 따라 정 대표는 진룡 미디어에 더 큰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가 찍은 CF를 통하여 많은 영업흑자를 기록하고 그 공을 모 그룹에 인정받아 자신의 경영권에 대한 신뢰도 돈독히 할 수 있었다.
지금에서야 여러 아이돌 그룹들이 큰 흑자를 내고 있기에 그 금액이 많지 않게 느껴졌지만 분명 RD가 시작되던 그때쯤에는 이수연의 수입이 소속사를 지탱했었다.
당장은 주춤하고 있지만 그건 자신이 이수연을 컨트롤 하지 못하면서 생겨난 일이고 이수연 자체만 본다면 아직 충분한 가치가 있는 배우였다.
잠시 심각하게 생각하던 정 대표는 김 이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년이 워낙 말을 안 들어 처먹어서 내가 냉정함을 잃었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그냥 놓아줘서는 안 될 고기였어.
만약 박 실장 말대로 이수연이 홀랑 다른 곳으로 날라 버리고 그 때문에 배우팀에 지장이 생긴다면 어쩌면 그 책임을 내가 져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겠군.”
진지한 표정의 정 대표를 바라보며 김 이사는 조용히 되묻는다.
“그럼 어쩌시겠습니까? 대표님”
“그래, 박 실장의 말이 맞아.. 그럼 우리가 할 일은 확실하지 무조건 그 드라마를 망하게 해야겠군. 적어도 드라마가 망해야 뒷일을 생각할 수가 있을 테니”
날이 서린 듯 날카로운 표정의 정 대표는 김 이사에게 지시를 이었다.
“우선, 이수연이 촬영하는 걸 꼼꼼히 관찰하도록 해. 나머지는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보지.”
김 이사는 정 대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표실을 나섰다.
김 이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 대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정우철이가....배우를 모른다고?. 어차피 연예인은 다 그놈이 그놈이지. 아이돌이고 배우고 그게 뭐가 다르단 말이야..
연예인들은 소속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그래야 돈도 벌고 성공도 할 수 있는 거지”
정 대표의 작은 중얼거림이 정적에 찬 대표실을 감싸고 조용히 울려 퍼졌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이수연은 대본을 탁자에 던져 놓고 자신의 침대에 몸을 실었다.
“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 봐도 뻔한데 …. 아마 결말은 당신이 전혀 생각 못 한 방향으로 흘러 갈 거야..”
조그맣게 중얼거린 수연은 자신의 길었던 5년을 되짚어보았다.
비록 세상 물정으로 너무 몰라서 속다시피 한 계약이었지만 수연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히 하고자 했다.
그것이 윤 대표와 했던 반드시 좋은 배우가 되겠다는 약속이나마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 대표가 자신을 인형처럼 꾸미고 CF로만 돈을 벌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계속하여 같은 이미지의 배역을 들이미는 정 대표의 행동에 수연은 점점 괴로움을 느꼈다.
자신은 다른 배역도 충실히 연기 할 수 있다고 아무리 피력해도 정 대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배역의 선택은 배우의 이미지를 위하여 소속사에서 결정 한다는 계약 내용의 한 줄이 수연의 5년을 괴로운 시간으로 만들리라는 것을 계약 시에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
그렇게 처음 2년을 정 대표가 시키는 대로 찍었다.
시간이 지나면 정 대표도 생각이 달라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변하지 않는 정 대표를 보며 수연 정 대표에 대한 기대를 모두 접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정 대표가 건네는 대본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선택은 소속사의 몫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거부할 권한이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수의 작품은 강제로 촬영하여야만 했다. 어느 정도 거부권을 가진 대가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그렇게 3년의 세월이 계약서의 명시된 최소한의 작품만 촬영한 채 흘러갔다.
그런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수연의 마음속에는 환멸만이 쌓여 갔다.
연기에 대한 열정은 빠르게 식어서 이제 어느 한구석에도 연기에 대해 두근거림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선생님하고 했던 약속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기분이야.
이제 나는 예전의 그 수연이가 아닌걸”
수연은 잠시 일어나서 대본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전혀 해보지 않았던 연기, 하지만 그 자체가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숱하게 이런 비슷한 연기를 연습했었으니까.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대본을 바라보면서도 수연의 마음은 한줄기 동요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