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1
그렇게 설아의 대사 문제를 해결해 버린 민수는 아주 편한 마음으로 연기 연습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이제 감정은 3단계에서 5단계까지 나눠서 표현 할 수 있게 되었고, 대본의 이해도 역시 윤 대표가 고개를 끄덕일 정도까지 이해의 폭을 넓혀 가고 있었다.
특히 대본 이해의 경우는 윤 대표가 생각하지 못한 다른 참신한 해석도 종종 나와 윤 대표를 웃음 짓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환과 함께 하는 발음 교정 작업 역시 더디지만 조금씩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가장 큰 변화를 보이는 건 호흡이었다.
이제 시간이 지나 전생의 자신의 호흡을 거의 다 찾게 된 민수는 예전에 발성에서 보이던 흔들림을 완벽하게 제어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거 … 이젠 전혀 떨림이 없네. 카메라 공포증은 아닌가보다야.”
강력하게 카메라 공포증임을 주장하던 강환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의식적으로 호흡의 타이밍을 조절하며 호흡을 흘리는 호흡법(이하 다변호흡법)의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와.. 이게 되네…”
처음에는 호흡을 느리게 빠르게 의식적으로 조절해 보던 민수는, 어느 순간 심장이 뛰는 속도가 자신의 의사대로 조금씩 느려지고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장 뛰는 속도가 달라지니 자연스레 호흡 속도를 늦추고 높이고가 자연스럽게 가능했다.
그냥 호흡 속도만 조절하려고 했던 민수는 심장 박동수가 의식에 따라 조절되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거 조약돌을 치우려고 했는데 옆에 바위가 움직인 격이네.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몸뚱이냐.”
점점 상식을 벗어나게 변하는 몸 상태에 민수는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은 감사히 그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스스로 발전하는 동안 설아에게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가장 직접적인 변화는 설아가 민수를 부르는 호칭이 “오빠”로 고정되어 버린 점이다.
“오빠, 더 세게 올리세요. 그렇게 쭉쭉 밀고 다시 당기고.”
이제 운동으로 민수를 이기는 것을 완전히 포기해 버린 설아가 민수 옆에서 그의 근력 운동 자세를 가다듬어 주자 민수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 설아 씨. 대체 언제까지 오빠라고 할거에요? 그거 제가 금지했잖아요?”
민수가 타박하자 설아는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마주 잡고 민수를 바라보며
“아니, 저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오빠를 오빠라 부르지도 못하고 오빠를 선배님이라고 딱딱하게 불러야만 하는 건가요?
오 신이시여. 저에게 오빠를 오빠라 부르게 허하여 주십시오”
설아가 연극 톤으로 장황하게 말을 시작하자 민수는 고개를 저으며 설아를 타박했다.
“1절만 해요. 휴.. 그래요. 마음대로 불러요.”
민수가 포기하자 설아는 배시시 웃으며 민수의 자세를 계속 가다듬었다.
“그래요. 오빠, 원래 모든 것이 포기하면 편해지는 법이래요.
자, 여기는 이렇게 이렇게 움직이면 돼요.”
설아가 계속 붙어서 자세를 만져주자 참지 못한 민수가 소리를 질렀다.
“악.. 설아 씨, 너무 가깝잖아요.
지금은 완전히 붙었어요. 조금 떨어져요.”
민수의 말에 설아는 도끼눈을 부릅뜨며 민수를 노려 보았다.
“뭐래요! 지금 저의 가슴속에 숨 쉬는 트레이너의 혼을 무시하는 거예요?!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고 집중해요! 자자.. 이렇게, 이렇게!”
민수는 설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3부 레깅스와 튜브톱을 장착한 설아의 공격력은 민수의 종잇장 같은 방어력을 수십번이나 꿰뚫어 무력화시키기 충분했으니 말이다.
민수는 운동시간 동안 춘섭 어르신의 위압 넘치는 압박을 상기하며 하루하루 그렇게 견디고 있었다.
설아의 변화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설아의 대사연기는 하루가 달라지듯 변화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같이 연습하던 민수는 설아의 대사 속 감정 표현이 놀랄 정도로 섬세한 것을 느끼고 이유를 물어보았는데 설아가 대답하길.
“음.. 잘 생각해 봤는데요. 대사 자체를 하나의 곡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좀 편하더라고요.”
설아는 그냥 대사 자체를 하나의 노래로 불러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처음에 민수가 말했던 멜로디가 아닌 감정으로 이루어진 노래를 부른다는 그 말을 그대로 성공해 낸 것이다.
민수는 설아의 미친 재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한 설아는 부작용이 있다면서 상큼하게 웃으며 민수를 녹음 실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데 얼굴과 눈으로는 완벽히 연기하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멜로디를 타고 민수의 귀를 자극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노래에 민수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자 설아는 연기하듯 노래하니 연기보다 노래가 더 늘었다며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며 억울해했다.
“설아 씨, 그냥 가수를 하세요. 연기하는 당신은 연기 좀 잘하는 예쁜 여배우밖에 못되겠지만.
노래 부르는 당신은 아마 아시아의 여신이 될 거에요. 이제라도 제대로 된 방향을 잡는..”
여기까지 말하던 민수는 화가 난 설아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오자 재빨리 몸을 피해 도망쳤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드디어 “서쪽 해변”이 종방 했다.
마지막 화의 시청률 8.9% 케이블 드라마치고는 대단한 선전이었고 초반에 방청하던 시청자들을 다른 곳에 빼앗기지 않고 입소문을 탄 시청자들이 조금씩 계속 늘어 난 것이다.
[막장, 억지스러운 로맨스 없이 휴머니즘을 표현한 “서쪽 해변” 아름다운 영상미와 인간의 내면을 잘 표현하고 유종의 미를 거두다]
[전혀 예상 못 한 새로운 스타일의 드라마 “서쪽 해변” 막방까지 그 추진력 잃지 않아]
[빼어난 영상미로 서해안의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한 “서쪽 해변” 진정 볼 것이 많은 드라마]
[윤태준 연기력 “서쪽 해안”에서도 빛났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상의 참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
여러 기사를 봐도 “서쪽 해변”이 생각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나 보다.
“참.. 세상 다시 살고 볼 일이네..”
이런 변화는 민수에게 어이없기만 했다.
그리고 그러던 중 방에서 쉬고 있던 민수에게 윤태준이 찾아 왔다.
“요~ 정 배우, 요즘은 안녕한가!?”
“서쪽 해변”의 예상치 못한 성공에 즐거워하며 웃는 태준의 모습에 민수는 웃는 낯으로 반겨 주었다.
“웬일이야? 윤 배우. 요즘 한창 바쁠 터인데.”
마지막까지 촬영에 시간이 쫓겼던 태준을 생각하며 민수가 가볍게 인사했다.
“이제 촬영도 다 끝났는데 바쁘긴 무슨… CF도 한두 개 만 찍고 나서는 이제 할 일도 없어. 조금 쉬어야지.
진짜 드라마 촬영할 때마다 죽겠다니까.
무슨 대본이 하루에도 두 번씩도 바뀌니..”
엄살을 떠는 태준을 보며 민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시겠지. 대본 다시 외우는 일만 해도 골치 아픈데.
윤배우님은 대본에 호흡까지 다시 다 외우시려니 얼마나 빡세시겠어?”
민수의 말에 태준은 짐짓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오호라. 환이 삼촌에게 들으셨구먼.
어리석은 우민들은 대사만 외우는 데 온 노력을 다 기울이지만, 이 대배우 윤태준은 거기에 호흡까지 더하여 외우고 있다는 것이지.
어떠한가? 이 몸이 이제 좀 더 위대해 보이지 않는가?”
거만한 표정에 익살을 더한 태준의 웃음에 민수는 어이없다는 어투로 대꾸했다.
“기가 막히긴 하지. 역시 사람은 태어나길 잘 태어나야 해. 와... 세상에 대본을 원샷 원킬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역시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해요. 나도 똑똑하게 태어났어야 했는데..”
스스로를 자책하는 민수의 모습을 보며 웃음 짓던 태준은 자신이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기억해 냈다.
“아, 맞다. 정 배우. “서쪽 해변”이 일본으로 수출 된대”
“뭐? 정말. 허… 웬일이냐 이거 허허”
예상치 못한 소식에 놀라는 민수에게 태준이 덧붙였다.
“생각해보니 “서쪽 해변”이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더 잘 통할 소스더라고.
일본이 우리나라 막장 코드가 전혀 안 통하잖아.
잔잔하고 아름다운 영상미를 자랑하며 소소한 이야기 들이 이어지고 이 윤태준이가 연기를 잘했으니 딱 일본에 가서도 좋은 성적 기록 할 수 있지 않겠어”
민수는 태준의 말의 상당 부분 동의했다. 로맨스가 없다는 부분에서 “겨울연가”나 그런 드라마 같은 메가 히트를 기록할 수는 없겠지만 나름 소소하게 인기 있는 드라마가 될 수는 있겠다 싶었다.
“그래, 그건 축하하는데... 그런 이야기 하러 온 건 아니겠고,윤 배우는 무슨 일로 이곳까지 왕림하셨나.”
민수의 질문에 태준은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사실, 차기작 때문에 살짝 고민이 있어서…. “
태준은 민수에게 2개의 대본을 내밀었다. 하나는 드라마의 대본이었고 하나는 영화의 대본이었다.
“드라마는 이희연 작가님 드라마야. 원래 이 작가님이 7월에 드라마 방영하기로 편성 약속이 되어있었어.
그런데 중간에 “서쪽 해변”을 예상외에 제작하게 된 것이고.
작가님이 “서쪽 해변”에 흔쾌히 출연해 준 것이 고마워서 가장 먼저 대본을 보냈다고 하시더라고.
그리고 이거 영화는 이번에 내가 연기한 것이 맘이 드셨다면서 날 쓰고 싶다고 대본을 보내주셨어. 이봉근 감독님 영화야.”
민수는 영화 대본부터 살펴보았다.
“젊은 지성의 고뇌”(가제) 이봉근 감독은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해석과 반전을 맛깔스럽게 잘 표현한다는 평을 받는 젊은 감독으로, 아직은 관객들보다는 배우나 관계자들 사이에 능력 있는 감독으로 인정받고 있는 일종의 미완 대기였다.
이번에 이봉근이 야심 차게 계획하고 있는 “젊은 지성의 고뇌”(가제) 는 때 묻지 않은 젊은 검사가 권력의 힘에 눌려 자신의 소신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그것에 고뇌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의 영화였다.
그리고 이어서 드라마의 대본도 살펴보았다.
“이희연 작가님 작품을 두고 네가 고민을 하는 것을 보니 영화 쪽으로 마음이 많이 가는 가보네.”
민수의 말에 태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좀 그런 면이 있어. 이봉근 감독님하고 작업해 보고 싶은 마음도 좀 있고.
드라마보다는 영화가 촬영 환경이 좀 더 좋은 것도 있고 말이야.
그리고 제일 큰 문제인 게 이건데.. 이 드라마 이거 내용이 좀 허황해 보이는 게 조금 불안하게 느껴지네..”
고민하는 태준의 모습을 바라보며 민수는 생각에 잠겼다.
‘허.. 한가지가 변하니 다른 것도 덩달아서 변해가는구나. “서쪽 해변”이 실패 했으면 태준이가 저 영화 대본을 받지 못했었겠지?
이거 이거… 윤 배우 그러지 마. 넌 저거 찍어야 한다고.,..’
“윤 배우, 이 영화.. 연기의 기본 베이스가 “서쪽 해변”하고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윤 배우가 비슷한 연기를 또다시 하는 거에 대하여서는 좀 부정적인데.
윤 배우, 넌 “서쪽 해변”을 왜 찍었어? 지금이야 나름 좋은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지만.. 원래 저거 배우들이 다 피해가던 대본이었잖아”
“ “서쪽 해변”이라… 막장하고 로맨스 없는 드라마에 호기심이 좀 들었거든.
그 왜 있잖아. 붕어빵에 단팥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 들어있는데 대체 그게 무슨 맛인지 궁금한 거야.
그래서 찍게 되었지.”
민수는 태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더욱 별로인데. 난 이거 영화 안 봐도 윤 배우가 어떻게 연기할지 다 예상이 되어 버리네. 연기는 잘빠질 테니. 영화야 잘 나오겠지만 뭐라고 할까.
좀 재미가 떨어지는 느낌?”
그렇게 말하며 태준은 드라마의 대본을 들며 말했다.
“이거.. 윤 배우가 말처럼 설정이 좀 허황되긴 하는데.. 그래서 더 궁금해지지 않나 어떻게 드라마가 나올지?
그리고 대신 이 작가님 특유의 캐릭터 설정이 개성적이고 매력적으로 잘 되어있는 데다가 남자 주인공은 진짜 멋있네.
선택은 윤 배우 몫이긴 한데.. 만약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난 이거야.
민수는 드라마의 대본을 들고 태준에게 던졌다.
드라마 대본에는 “별에서 온 당신”(가제) 라고 적혀 있었다.